이창모 목사의 옥성호의 [야고보를 찾아서] 비판(1)

<야고보서를 찾아서>의 저자 옥성호

 

글을 시작하며

어느 날 어떤 분에게서 이 메일이 왔다. 메일의 핵심만 요약하면 “옥성호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습니다. 옥성호가 쓴 <신의 변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큰일이 난 것 같습니다. 이 책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일부 목사님들까지도 흔들리고 있습니다.”였다.

이 메일 전체에서는 <신의 변명>에서 옥성호가 주장하는 몇 가지 사실들이 두서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처음에 필자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메일에 나열된 옥성호의 주장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전에 옥성호가 쓴 3권의 <부족한 기독교>만 염두에 두어도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이런 옥성호가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정없이 짓밟으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신 구원자는 더 더욱 아니며, 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원 사건으로 믿는 기독교는 바울이 조작해서 만들어낸 거짓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조롱하는 것이 어떻게 옥성호에게 가능한가 하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지체하지 않고 옥성호가 펴낸 <야고보를 찾아서>와 <신의 변명>을 구해서 단숨에 다 읽었다. 이 책들을 한 마디로 평가한다면, 지독한 성경(신학)적인 무지에서 나온 어처구니없는 소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서초교회 잔혹사>, <영적 대통령> 등의 소설을 쓴 소설가로서 성경도 소설처럼 여기고, 성경을 소재로 <야고보를 찾아서> 등의 소설을 쓴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이 메일을 보내주신 분의 걱정처럼, 한국교회에 큰일이 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 옥한흠 목사님의 집안에 큰일이 난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옥성호가 쓴 책들의 내용들(신약성경을 공격하여, 예수를 하나님으로, 그리고 구원자로 믿는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시도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런 시도들은 이미 하나님의 교회가 시작되면서부터 있어왔던 일들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대교 신학자들과 역사적인 예수 연구자들 등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것들과 유사한 옥성호의 책들을 읽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특히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치 새로운 진리를 만난 것처럼, 이 책으로 한국교회가 끝장날 것처럼 흥분해서, “이제야 올 것이 왔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옥성호가 외친 진리 앞에 정직하게 서서 반성해야 한다”는 둥의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현장을, 또 반면에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은 정말로 성경이 무너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큰일났다”라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현장을 on-off line 구석구석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옥성호가 그의 책에서 모독하고 있는 성경 말씀이, 결코 하찮은 피조물들에게 모독당할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임을 다시 변증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필자는 두 번 다시 읽기 싫은 책들이지만, 옥성호의 책들을 다시 손에 들고, 옥성호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서운 궤변인가를 입증하기 위해 펜을 들어, <신의 변명>보다 먼저 출판된 <야고보를 찾아서>부터 비판하기로 결심했다. 옥성호의 <야고보를 찾아서>를 비판하는 이번 첫 글에서는 옥성호가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지를 간단하게 살피고, 또 책 전체를 통해서 옥성호가 꾸며내는 이야기가 얼마나 허구로 가득 찬 궤변인지를, <야고보를 찾아서>의 책 내용의 일부를 인용해서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회부터는 총 7장으로 구성된 <야고보를 찾아서>를 장별로 하나하나 비판할 예정이다.
 

<야고보를 찾아서>에서 옥성호가 주장하는 것들

옥성호는 <야고보를 찾아서>의 [들어가는 말]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은 사본들이 필사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이 변개되고 오염되었으므로 결코 신뢰할 만한 문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책 “성경 왜곡의 역사”(청림출판, 2006)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Bart D. Ehrman을 언급한다, 그리고 <야고보를 찾아서>의 책 속에서는, ‘기독교는 바울이 세운 거짓 종교’라고 역설한 “James D. Tabor”와 유대 신학자 “Hyam Maccoby”을 여러 번 인용하고 있다. 또 역사적인 예수 연구가인 E.P Sanders와 James D. G. Dunn도 그의 각주에서 발견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옥성호는 신약성경을 믿을 수 없는 문서로 단정한 책과 ‘역사적인 예수 연구’와 ‘유대교 신학’에 심취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영에게 미혹당한 것처럼 보인다. 옥성호는 <야고보를 찾아서>에서 담대하게 신약성경을 무차별 공격한다. 물론 그의 공격의 궁극적인 타켓은 사도 바울이다. 옥성호는 기독교가 예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유대교 신학자들이 그래왔듯이 바울이 만든 조작된 거짓 종교라고 주장한다.

옥성호가 주장하고 있는 <야고보를 찾아서>의 황당한 소설의 내용을, 1-7장까지 장 별로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존경받는 바리새인 가말리엘]에서 옥성호는 문두에서 행5:34-40을 제시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신(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았다(pp. 40, 46). 예수의 제자들은 나중에 바울이 전파하기 시작한 교리,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죽음으로 유대인이 아닌 온 인류의 죄를 사한다는 ‘구속 교리’는 전혀 몰랐다(p. 45). 따라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류의 구원자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바울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신으로 말하고 다녔다면 가말리엘이 결코 그들의 편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말리엘은 야웨를 유일신으로 믿기 때문이다. 또 설령, 가말리엘이 제자들을 변호했다 할지라도, 다신론을 주장하는 제자들을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그냥 두지 않고, 사형을 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신으로 격상시킨 범인은 바울이다.

2. [할례 논쟁]에서 옥성호는 문두에서 갈1:1-22을 제시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바울은 율법, 특히 할례를 경멸했기 때문에, 바울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깊은 갈등이 있었다(p. 50). 왜냐하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율법을 대단히 존중했기 때문이다(pp. 61-62). 이렇게 바울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의 최악의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율법을 경멸하는 바울의 복음과 율법을 존중하는 예수로부터 배운 제자들의 복음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3. [유월절 어린양]에서 옥성호는 문두에서 요19:12-16을 제시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요19:14(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과 같은 내용을 기록한 공관복음의 평행 본문들을 비교해 보면, 예수의 죽은 날짜와 십자가에 달린 시간이 서로 다르다. 예수가 죽은 날짜는 공관복음에서는 금요일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목요일이다. 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시간은 공관복음에서는 오전 9시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오후 2~3시쯤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각기 다른 날 두 번 죽지 않는 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둘 중에 하나는 거짓이다(p. 105).

이 부분은 <바른믿음>에 게재된 필자의 글 [요19:14의 “유월절의 예비일”과 “제 육시”의 바른 해석]을 읽어보면, 옥성호의 주장이 허무맹랑한 소설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4.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에서 옥성호는 문두에서 고전11:23-32을 제시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찬식은 예수님이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바울이 교회를 장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창작품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존중하는 예수님이, 율법에서 금지하는 ‘피를 마셔라’고 말씀하셨을 리 없고, ‘피’를 마시는 성찬식을 제정했을리없기 때문이다(p. 148). 그러므로 성찬식은 율법을 경멸하는 바울이 그리스 신비주의에서 힌트를 얻었지만, 고린도전서에서 보다시피 ‘주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사기처서 만들어낸 종교 의식이다(pp. 162ff).

5. [세례요한]에서 옥성호는 문두에서 눅3:3-14을 제시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모친의 복중에 있을 때,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예수가 누군지 알아차리고 뛰노는 반응을 했다(눅1:44). 그리고 예수에게 세례를 줄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에게 임하고, 그것을 본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다(요1:32-34). 그런데 그랬던 그가 예수가 누구인지를 의심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pp. 185-186). 또 예수는 세례요한을 먼저 온 엘리야라고 했지만, 정작 세례요한은 자신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명백하게 부인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을 통해서 본 예수는 인류의 구원자일 수 없다. 단지 바울이 예수를 인류의 구원자로 선택했을 뿐이다(p. 234).

6. [마리아와 요셉]에서 옥성호가 말하고 있는 것은 필자의 능력으로는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을 만큼 난잡한 소설이어서 어쩔 수 없이 생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을 다루는 본장에서 상세하게 살필 것이다.

7. [예수의 동생 야고보]에서 옥성호는 문두에서 행15:13-21을 제시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 율법주의자였고 반 로마주의자였다(물론 예수님도 그렇다고 한다). 따라서 반 율법주의자이며 친 로마주의자인 바울이 예수를 이용하여 만든 자신의 거짓 기독교를 포교하는 일에 야고보가 최대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pp. 281ff). 따라서 바울의 거짓 기독교를 널리 포교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영향력으로 신약성경에서 야고보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옥성호는 예수의 부친 요셉도 반로마주의자였기 때문에 복음서의 무대에서 일찍 내려버렸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에서 야고보가 적은 분량으로 소개되는 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야고보를 만났다고 기록한 실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금이라도 야고보에 대해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p. 275).

위에서 본 것처럼 옥성호는 자신의 주장이 진리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경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헤집고 다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주장들은 자신의 상상에서 나온 추측들을 근거로 내린 결론들이다(나중에 상세하게 입증할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옥성호의 <야고보를 찾아서>를, 작가의 상상과 추측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라고 규정하는 이유이다.
 

옥성호의 <야고보를 찾아서>는 교묘한 거짓 논리로 독자들을 속이고 있는 궤변이다. 

그는 <야고보를 찾아서> 전반에서 독자들을 교묘하게 속이는 수법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거짓 주장이 마치 성경보다 더 진실한 것처럼 위장한다. 그는 먼저 어떤 성경적인 사실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나서, “과연 그럴까?” 등의 질문을 던져놓고, 뒤이어 “아마도 이럴 것이다”,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등의 말로 자신의 상상에서 나온 근거 없는 추측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어느 새 자신의 근거 없는 추측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면서 그것을 근거로 성경은 허구이고 자신의 주장은 진실이라고 사기를 친다.

<야고보를 찾아서>의 [들어가는 말]을 보면, 자신의 상상에서 나온 어처구니없는 추론들을 조금은 인정하는 듯하다. 그래서 옥성호에게 신앙적인 양심이 조금은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야고보를 찾아서>를 읽어내려 가다 보면 얼마 자니지 않아서 이런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왜냐하면 책 속에서 그에게 신앙적인 양심은 조금도 없다는 슬픈 현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 전반에 걸쳐서 성경이 침묵하는 내용에 대한 나름의 추론도 없진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철저하게 ‘성경 말씀’에 근거한 주장을 펼쳤다. 내 주장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가진 논리에 따른 해석이다. 따라서 더 근거 있고 설득력 있는 논리를 만난다면 나는 얼마든지 기쁘게 내 모자람을 인정할 것이다."(pp. 22-23)

위의 밑줄 친 옥성호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책에서 그가 전개하는 논리들 중 ‘자기 나름대로의 추론’이 없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근거 없는 자신의 추론을 바탕으로 밑도 끝도 없는 거짓 결론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야고보를 찾아서>에서 난무하는 그의 궤변적인 논리 전개 방식이 무엇인지 한 예를 통해 살펴보자.

다음 내용은 행5:34-40에 대한 옥성호의 이야기다.

"물론 서기 52년에 사망한 가말리엘은 사도행전이 쓰였던 당시 이미 없었지만 일부 증인들이 살아 있었고 바리새인 사이에서 스승 가말리엘이 산헤드린에서 예수의 제자들을 살린 이야기, 또는 예수의 제자들이 주도한, 소위 ‘예수 운동’의 미래와 관련한 그의 ‘예언’은 아마도 매우 유명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스승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설 같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저자는 이 이야기를 쓰면서 차마 가말리엘을 익명으로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사실과 연결되기 때문에 사도행전 속 다른 내용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가말리엘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또 정확하게 쓰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저자에게는 당시 유대교의 주도 세력이었던 바리새파의 환심을 사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는 가말리엘의 실명을 밝혔을 뿐 아니라, 전체 맥락과 썩 어울리지 않음에도 그를 높이 평가하는 구절까지 삽입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합리적인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다른 부분은 몰라도 가말리엘의 ‘메시지’만은 백 프로 진실을 기록했다.'”(pp. 22-23)

그는 행5:34-50을 근거로 “사도행전의 저자가 다른 부분은 몰라도 가말리엘의 ‘메시지’만은 백 프로 진실을 기록했다”라는 결론을 자신 있게 내린다. 그러나 그가 이런 결론을 내린 근거는, 필자가 밑줄로 표시했듯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다시 말하면 밑도 끝도 없는 자신의 추측 네 가지와 행5:34-40이 실명으로 기록된 가말리엘의 말이다.

필자도 글을 쓸 때, 때로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해서 단정적으로 주장하지 못하고, “아마도”, “어쩌면” 등의 궁색한 말을 써서 추측으로 어떤 결론을 내릴 때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아니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추측을 또 다른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게그는 게그일 뿐이듯이 추측은 추측일 뿐이므로, 추측을 근거로 해서는 믿을만한 어떤 진리를 도출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 생명의 영원한 생사가 걸려 있는 성경 말씀에 대한 문제라면, 더욱 인간의 상상에서 나온 추측을 근거로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내는 짓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 사항이다. 그럼에도 옥성호는 <야고보를 찾아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추측성 논조를 계속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하고 있다. 소설을 쓰는 것이면 모를까 영원한 생명이 달려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서의 이런 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가장 몹쓸 짓이다.

또 옥성호는 행5:34-40에서 누가가 가말리엘의 실명을 밝혔기 때문에 “사도행전 저자가 다른 부분은 몰라도 가말리엘의 ‘메시지’만은 백 프로 진실을 기록했다”(야고보를 찾아서, p.23)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옥성호는 실명을 밝혔기 때문에 가말리엘의 말은 백 프로 진실이라고 하면서, 실명으로 기록된 예수님과 베드로의 말씀들, 그리고 바울 서신서들의 말씀들을 거짓이라고 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예수님의 실명으로 기록한 요10: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천명하셨고, 자신의 죽음이 양을 위한 대속적인 죽음임을 밝히셨다. 그럼에도 옥성호는 실명으로 기록된 가말리엘의 말은 진실이라고 난리를 치면서 어째서 실명으로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라고 핏대를 높이는가?

또 마태가 실명으로 베드로를 언급하며 기록한 마16: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에서 베드로는 분명하게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옥성호는 실명으로 기록된 가말리엘의 말은 진실이라고 하면서도, 왜 실명으로 기록된 베드로의 말은 거짓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신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그리고 옥성호의 핵심 공격 대상인 바울은 자신의 실명(롬1: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으로 로마서와 기타 서신서들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옥성호는 실명으로 기록된 가말리엘의 말은 진실이라고 하면서, 왜 바울의 기록들을 거짓으로 매도하는가?

아무튼 ‘실명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백 프로 진실이다’라는 옥성호의 말은 어느 나라의 원칙인지는 모르겠지만, 믿을만한 명제는 결코 아니다. 성경 말씀은 백 프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백 프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러므로 백 프로 진실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앞글에 이어지는 옥성호의 억지 넋두리를 하나 더 살펴보자.

"내가 사도행전의 저자를 오해하는 걸까? 그가 다른 모든 내용도 얼마든지 백 프로 진실만을 기록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글쎄 .....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다. 여러 번의 심각한 사례가 있지만 여기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구절, 산헤드린 재판 장면이 나오는 5장 33절을 살펴보자. 저자는 산헤드린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화가 치밀어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화가 치밀어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나쁘게 말해서 아주 성의 없고 사실적인 구체성이 결여된 문장이다. 인터넷으로 맛집을 검색할 경우 밑에 보통 그 식당을 다녀온 사람들의 리뷰가 달린다. 많은 사람은 그 평가를 보고 식당에 갈지 안 갈지를 결정한다. 그런데 그 리뷰가 다 손님이 쓴 것이 아니다. 소위 말해 ‘댓글 알바’의 글도 심심찮게 섞여 있다. 댓글 알바의 글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사도행전 5장 33절과 같은 수준의 글이다. 성의가 없고 무엇보다 조금도 사실적이거나 구체적인 표현이 없다."(p. 24)

옥성호는 행5:34-40을 제외한 사도행전의 나머지 모든 내용에 대해서는 “글쎄....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다”는 추측으로 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행5:33을 예로 들면서 사도행전 전체가 거짓이라는 자신의 추측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참 뒤에서도 “나는 사도행전의 진술이 창작이라고 생각한다”(p. 85)라는 말을 한다.

옥성호가 문제 삼은 행5:33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행5장 33절과 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29~32절을 함께 살펴보자.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 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 라 하더라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행5:29-32은 산헤드린 공회가 심문한 말에 대한 베드로와 사도들의 답변이다. 그리고 33절은 그 답변에 대한 산헤드린 공회의 반응이다. 옥성호는 산헤드린 공회의 반응을 기록한 33절을 알바 댓글 수준이라고 비아냥거린다. 알바 수준의 댓글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적이지 않으며 구체적이지 않고, 성의 없이 쓴 것이 특징인데, 누가가 쓴 33절이 그렇다는 것이다(pp. 30-31). 그래서 옥성호는 알바 댓글 수준의 33절 한 절만 보아도 사도행전 전체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가 33절을 어떻게 써야지 알바 댓글 수준이 아닌, 믿을만한 글로 옥성호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옥성호의 주문대로 누가가 다음과 같이 성의 있게, 사실성 있게, 구체적으로 썼다면 옥성호는 행5:33을 믿을만한 진실이라고 인정했을까?

“사도들의 말을 들은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으며, 화를 참지 못해 코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서 직경 15cm의 각목으로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고 난 뒤에 그들의 스승인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아 잔인하게 죽여 버리자고 의논했다”(행5:33)

그러나 누가가 이렇게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행5:33을 기록했다 할지라도 아마도 옥성호는 또 다른 어이없는 추측들을 내세워서 사도행전은 믿을 수 없는 허구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아담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히 왜곡해서 아담(하와)을 미혹해서 무너뜨렸다. 유대 광야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히 변조해서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시험했다.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사용하셔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오늘날에도 사탄은 동일한 수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시험하여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다. 사단은 엉터리 설교자들의 엉터리 성경 해석과 설교를 통해서, 번역 성경의 오역들을 통해서, 그리고 아예 노골적으로 옥성호처럼 성경을 부인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시험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들이 이런 사탄의 시험을 이기려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하고 바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엉터리 말씀 위에 세워진 믿음은 엉터리 믿음일 수밖에 없고, 바른 말씀 위에 세워진 믿음은 “바른 믿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순절 주의, 신사도주의, 회중파 청교도, 능동적 순종, 유보된 칭의 등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른믿음>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사탄의 미혹으로부터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특히 장로교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생겨난 잘못된 몇 몇 부분들을 비판하고 있는 정이철 목사의 모습은 실로 처절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정 목사는 장로교에 소속된 목사이므로 장로교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문제 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살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이철 목사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일들을 묵묵히 수행하는 이유는 적어도 옥성호가 부인한 하나님의 말씀인 행5:29(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을 가슴에 선명하게 새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도 동일한 이유로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 옥성호의 <야고보를 찾아서>를 비판하기로 결심하고, <바른믿음>을 통해 이 작업을 시작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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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