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로, 쯔빙글리는 그가 그 제목으로 유명해진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1525년 3월)를 구별하여 제시하는 일의 선구자였고, 이로써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종교라는 말은 모든 개혁자들이 그 말을 그런 의도로 사용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 경건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나는 ‘종교’라는 말로 기독교인들의 경건 전체를 이해하는 데, 곧 신앙, 삶의 방식, 명령, 예배 질서, 성례전을 말한다.” 그러므로 ‘종교’라고 할 때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이 세상의 여러 종교를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중세 말기에 “종교”라는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하여 하는 생각들과 활동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기독교 종교”(Christian religion)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 가운데도 참된 것이 있고, 거짓된 것이 있다는 것을 쯔빙글리가 앞장서서 드러낸 것이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참된 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참으로 교제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일치하는 대로 하는 종교이다.

“참된 종교 또는 참된 경건은 바로 사람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에 있다.”

“경건은 언제나 유일한 보배에게 하듯 하나님께 매달리며, 그에게만 붙어있고, 그 분만 존경하고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며 그 분을 모독하는 것을 멀리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당신이 전심으로 영혼의 시랑이신 주님을 신뢰하고 그에게만 눈을 고정하고 그 분에게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경건도 경건이라고 하면 안 된다.”

거짓된 종교는 삼위일체와 관련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을 많이 허용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미신’이라고도 표현한다. 쯔빙글리는 이렇게 말한다:

“신실함은 무엇보다 먼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어떤 방식으로 그를 섬길까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요구한다. 그 다음에는 그로부터 배운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더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제거하지 아니할 것을 요구한다 ... 참된 종교, 또는 경건은 한 분이고 유일하신 이 하나님을 붙잡는(cling to)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믿는 내용과 예배하는 것과 교회의 제도들과 사회와 국가의 삶을 사는 것을 강조하면 최소한으로라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쯔빙글리가 말하는 “참된 종교”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한다고 하고, 성경과 관련한다고 하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에 다른 것을 더 하거나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라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거짓 종교이다. 예를 들어 말하지면, 쯔빙글리는 “이 빵은 미사에서 매일 바침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를 속하는 공로나 희생이라고 우리를 가르치는 것은 거짓된 종교이다”고 말한다. 또한 천주교의 이중 공로에 의한 구원론을 제시하는 신학자들의 생각을 언급하면서, “그 신학자들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공로로 하늘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포하며, 동시에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섬기고 돕는 자로 제공한다는 것은 놀랍고도 뻔뻔한 기만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에 의하면, “거짓 종교, 거짓 경건은 하나님 아닌 다른 자를 의뢰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때때로 “교황의 교회,” “교황의 추종자들”, “로마 추종자들”(die Römischen), “교황주의자들,” “주교들의 총회,” 심지어 “마귀의 교회”라고 하고, 그리고 그 대표자들을 “나의 대적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천주교회를 거의 거짓 종교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것은 “오히려 위선, 불신앙, 미신이라고 지칭되어야 마땅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의 개혁의 원칙은 전통적인 의식들과 관례들과 가르침의 성경적 토대를 점검하고, 그것들이 신약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잘 드러내고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지를 묻는 것이다”고 말하는 오즈먼의 말은 정확한 것이다.

1522년에 일어난 사순절 기간 동안 어떤 음식을 먹고 먹지 못하고 하는 문제에 대하여 성경에 따라서 성경이 금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지만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자유롭다는 쯔빙글리의 입장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기독자의 자유를 잘 드러낸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쯔빙글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법”(Divine Law)이라고 하면서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항상 성경에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쯔빙글리는 선언한다: “금식하기를 원하면 금식하십시오. 고기 먹기를 원치 않으시면 먹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마십시오.”

쯔빙글리의 성경적 설교를 들으면서 취리히 성도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1522년에는 외텐바흐(Oetenbach)에 있던 도미니칸 수도원에서 수도원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것에 반대하고 수도원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과의 분리와 그로 말미암은 수도원 재산 처리의 문제로 시의회는 1522년 12월에 이 문제에 대해 모종의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런 불화가 계속되면서 취리히를 지배하던 콘스탄츠 대주교와 취리히 시 사이에 대립이 점점 심화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방식으로 천천히, 그러나 성경적 입장으로 취리히 통치자들의 동의를 이끌어낸 쯔빙글리는 9명의 다른 스위스 설교자들과 함께 1522년 7월 2일에는 주교와 스위스 의회(the Swiss Diet)에 사제들의 혼인에 대한 허락을 요청하는 데로 나아갔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취리히를 주관하는 콘스탄츠 주교에게 청원하는 식으로 되어 있지만 이 문제를 대중에게 알려서 취리히와 스위스 전체가 종교개혁을 지향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별 반응이 없자, 쯔빙글리는 “1522년 8월 23일에 <<첫째요 마지막인 설명>>(A First and Final Explanation, Apologeticus Archeteles)에서 자신이 소요를 일으키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이고, 이단이라는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면서 자신을 변호하고, 교회의 규례들은 성경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주교는 사람들이 만든 인간의 법의 편에 있는 것이고,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편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부터 쯔빙글리는 유물들을 존숭하는 것(the veneration of the relics), 성자들에게 기도하고, 그들의 중보를 기대하는 것, 고해 성사, 그 외 천주교가 성례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와 연옥의 존재, 그리고 결국에는 화체설과 교황의 수위성에 대해서까지 성경에 비추어 비판하였다. 쯔빙글리는 천주교회의 미사를 “몰염치하고 거침없이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그리스도가 수치스럽게 되는 행위”라고 표현하며, “미사는 만행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미사는 지체 없이 중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제정에 맞게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의 제정에 부합하게 거행되는 성찬을 “감사의 예전”이라고 한다.

신부나 수녀나 수사들의 순결 서약에 대해서 쯔빙글리는 성경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맹세하는 자들은 불손하게 행하는 것이고 ... 하나님의 율법에 있지 않은 다른 일들을 서원한다면 그것은 무의미다”고 잘 말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우리의 전통 때문에 어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가장 크게 모독하는 증거다.”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을 고안해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모든 “자의적 숭배”는 “위선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함이다.” 그리하여 아주 솔직하게 그는 말한다: (중세 수도원에서 하던) “정절, 청빈, 순종의 서약은 하나님의 명령에서 도망하는 것이고,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쯔빙글리는 “기름 바름, 성수 뿌리기, 강복과 그런 제의들이 ... 말씀의 선포로 ... 무가치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면 곧바로 이런 상징은 사람이 고안해 낸 음식 금지처럼 아주 조용히 폐지시켜야 한다”고 논의한다. 아무리 놀랍고 멋있어 보이고 경탄한 말한 것이라도 “신앙이 삶에 해를 끼치는 물건들은 우리가 용인하면 안 되고 조용히 그리고 당국의 권위로 분명하게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으로부터 잘 가르치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하며, 그것이 필수적이다: “우선적으로는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이런 외적인 일들은 아무 것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 것들에게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백성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인지적 이해 외에도 정감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는 어떤 일을 벌써 버렸지만 감정은 그렇게 버릴 준비가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들과 성화들의 제거는 조용히 이루어져야 하고 “모든 면에서 사랑이 교사로서 다스려야 한다.”

이런 종교개혁적인 주장에 대해서 “1522년 12월 15일에 스위스 연방 의회(the Confederation Diet)는 교회 문제를 다루어 결정하면서, 각 칸톤은 이런 ‘새로운’ 가르침을 금하고 바젤과 쥬리히에서 책을 출판하는 것을 감독하도록 권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523년 1월 3일에 취리히 시 대의회(the Large Council)는 취리히 시와 주변 마을의 모든 성직자들이 1월 29에 취리히 시의 법원 건물(courthouse)에서 모이도록 공고했다. 이 1523년 1월 논쟁에서 쯔빙글리는 자신이 이제까지 설교한 것을 정리한 <67개조>(67 Articles)를 써서, 취리히 시청에서 600여명이 지켜보는 데서 콘스탄츠 주교의 대리자(vicar-general)인 요한 파베르(John Faber, Johannes Fabri)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1) 성경에 근거해서 (2) 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독일어로 잘 표현하였고, 그 내용을 통치자들과 대중에게 잘 제시하였다.

핵심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그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인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라고 할 수 있었다. “오직 신앙”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우리의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콘스탄츠 대주교는 신학 문제를 평신도들의 판단에 맡길 수 없다는 근거로 불참하였지만, 결국 이것이 시 정부가 이런 문제를 다루는 전례가 되게 하였다.

결국 시의회가 최고의 궁극적 권위를 가지고 최종적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논쟁 후에 시정부는 “‘다른 지시가 있기 까지’ 울리히 쯔빙글리는 이전과 같이 계속해서 거룩한 복음과 순수한 성경을 선포하여야 하며, 다른 모든 설교자들도 같은 기준으로 성경에 합당하게 가르쳐야만 하며,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쯔빙글리는 이것이 “교황권 하에 있는 적그리스도적인 상황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여겼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취리히 개신교회의 토대를 마련한 회합”이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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