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성경의 핵심적 교리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대표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책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처녀 탄생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즉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그의 책에서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 .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고 말했다. 또 폴 틸리히는 조직신학이라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함은 바로 그를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사상이다. 요한일서 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원문). 요한이서 7, “이는 미혹하는[속이는] 자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음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라. 이것이 미혹하는[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 진리와 밀접한 또하나의 진리는 처녀 탄생의 진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그의 모친이 젊은 부인으로 불리는가 혹은 처녀로 불리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말했고, 자아(自我)와 역사의 드라마라는 다른 책에서도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복음서에 밝히 증거된 내용이다. 마태복음은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으며, 남편 요셉이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으며, 요셉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고 증거했다(마 1:18, 20, 25). 누가복음은 처녀 마리아가 아들을 잉태하여 낳으리라고 전언(傳言)한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반문했고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말했다고 증거했다(눅 1:34-35).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믿음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자는 처녀 탄생을 믿을 수 있다. 또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그의 신성(神性)과 연관되어 있다. 누가복음 1:35,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부활이나 천사나 영을 믿지 않던 사두개파 사람들의 사상이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마 22:29).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또한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나 기적을 의심하는 성경의 비평적 연구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루돌프 불트만은 요한복음이라는 책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폴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그리스도의 행적 전반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굴복시키고 본질적인 부분들뿐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굴복시킨다”고 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신약신학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또 우리는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 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 주변 환경에서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에서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적들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게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또 제자들은 주께서 행하신 기적들의 목격자들이요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말했다(행 10:39).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진실한 증인들에 의해 증거된 내용들이다(요 20:30-31; 21:2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고 하신 말씀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합당하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부정한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부정한다. C. H. 다드는 로마서라는 책에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가라앉힘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라고 말했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루돌프 불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神話)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救贖)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영지주의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대속(代贖)하기 위한 죽음이었다. 속죄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성경적 속죄 개념은 속죄제물이 택함받은 자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힌다는 것이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로마서 3:24-25,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 iJlasthvrion)[유화제물]로 세우셨으니.” 고린도후서 5:14, 21,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 10, 12,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에게서 유전된 망령된 행실로부터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5:9,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그는 로마서라는 책에서,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이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교회교의학에서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부활의 역사는 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 신화(saga)나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루돌프 불트만은 그의 신약신학에서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한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이다”라고 말했고, 또 다른 토론에서 말하기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라고 했다.

폴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말하기를,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 “역사 연구는, 그것의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고 했다.

판넨베르크는 예수: 신인(神人)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을 바울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인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신약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부정하는 이단이다. 사복음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충분하게 증거한다.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기록한다(행 1:3).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썼고(롬 1:4),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썼다(롬 10:9). 또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며(고전 15:3-4) 장차 죽은 자들의 부활의 근거임을 강조했다(고전 15:12-13, 16, 19).

덧붙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승천과 재림과 관련된다. 만일 우리가 그의 부활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의 승천이나 재림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매우 기본적 신앙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곧 그의 신성(神性)과, 처녀 탄생을 부정하고 그의 기적들을 부정하고 그의 속죄사역을 부정하고 그의 육체적 부활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지라도 그것은 성경에 증거된 역사적 예수가 아니고 다른 예수에 불과하다(고후 11:4).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확실히 이단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효성 목사는 연세대학교 철학과, 총신대학 신학연구원, 훼이스(Faith) 신학대학원(Th.M. in N.T. 미국 필라델피아), 밥 죤스(Bob Jones) 대학교 대학원 졸업(Ph.D. in Theology,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공부했다. 계약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합정동교회(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담임목사이다. 신구약 성경을 주석하여 인터넷(http://www.oldfaith.net/01exposit.htm)을 통해 보급하여 많은 목회자들이 견실한 설교를 준비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신학자이다. J. G. 메이천, 『신약개론』을 비롯하여 많은 10권 이상의 외국 신학자들의 좋은 저서들을 번역하여 한국 교회에 보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