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7)

글을 시작하며

눅16: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과 함께, 마11:12(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 전파를 통해서 세상을 정복해 나간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역사를 선포하는 귀중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번역 성경들의 오역과 오석으로 인해 마11:12의 말씀은 세계 교회사에서, 특히 한국교회에서 심각하게 오용되고 있는 사탄의 메시지가 되고 말았다. 아래 마11:12을 소재로 한 어떤 심각한 저질 설교의 한 부분을 보라.

“~여기가 좋사옵나이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도울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가 싫다고 하나님 걸 빼앗아야 합니다. 천국은 빼앗는 자 거라고 했습니다. 달래야 합니다. 조건이 어디 있어요, 아버지한테? 아버지한테 야곱이라는 사람은 여러분, 어떻게 했어요? 사기꾼이요, 도적놈이요, 그런데 누구 거 도적질했어? 아버지 거 도적질했어. 그런데 아버지가 도적놈이라고 했어요, 안 그랬어요? 아니라 그랬습니다.

~믿으면 아멘하세요. 잘 들어요, 잘 들어야 합니다. 지금 잘 들어요. 성경은 계속 침노하는 자 거라고, 빼앗는 자 거라고 합니다.

~(야곱처럼)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 가지고라도 빼앗아 잘 사는 그 아들을 보고 자랑하는 걸 믿으면 아멘하세요. 여러분, 비밀이어요. 놀라운 비밀이야. 사람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 사람들에게는 거짓말하지 말아야 하지만, “아버지 이번에 내게 축복만 해주신다면, 내가 목사가 되겠어요.” 그래가지고 대학 딱 들어가고 난 다음에 목사가 안 되도 아버지가 오래 참는 걸 믿으면 아멘 하세요.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이렇게 좋으신 분이야.”1)

위의 어처구니없는 설교는 오래 전에 있었던 한국교회 강단의 비극적인 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한국교회 강단의 슬픈 현실이다. 물론 지금은 마11:12을 위의 설교처럼 노골적으로 무식하게 설교하지는 않는다할지라도, 거의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적어도 의미상으로는 위의 어처구니없는 설교와 대동소이하게 설교하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일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중세교회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로 간에 영토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중세의 기독교 국가들은 마11:12을 근거로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시키면서, 자랑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양 다른 나라들을 침략했다. 근세 시대에서도 기독교 국가들인 유럽의 열강들은 마11:12을 근거로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시키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등을 향한 침략 전쟁을 하나님의 뜻인 양 노골화시켰다.2)

세계사에 나타난 이런 어처구니없는 해프닝들은 마11:12의 헬라어 원문 “bia,zetai”(비아제타이)를 수동의 의미인 “침노를 당하나니”로 오역하고, 반대로 “biastai.”(비아스타이)를 능동의 의미인 “침노하는 자(들)”로 오역했기 때문에 생겨난 비극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금까지 모든 교회는 마11:12의 심각한 오역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마11:12을 바르게 번역한다는 것은 대단히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바른 믿음을 위해서는 번역 성경의 오역을 바로 수정해야 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이다. 특히 마11:12을 바르게 번역하는 작업은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글을 끝까지 그리고 천천히 정독해야 할 것이다.

 

고대 헬라어에서 ‘중간태’란 무엇인가?

마11:12의 “침노를 당하나니”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는 수동태의 모양을 띠고 있는 동사이다. 스테판 헬라어 분해 사전에서도 이 동사를 VIPPS3(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단수,3인칭)로 표시하고 있다. 이에 비해 바우어 사전을 비롯한 상당수의 주석들에서는 이 동사를 ‘중간태 또는 수동태이다’라고 설명하면서 수동태일 수도 있고, ‘중간태’일 수도 있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 속에서의 헬라어 동사들 중에 수동태도 되고 중간태도 되는 동사는 없으며, 수동태이든지 능동태이든지 둘 중 어느 한 쪽에 속해 있는 동사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마11:12의 바른 번역의 관건은 “침노를 당하나니”로 번역된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를 수동태도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중간태’로 보아야 할 것인지를 바르게 판단하는 것에 달려있다.

헬라어를 공부한 이들은 기억하겠지만, 헬라어 동사에는 능동태와 수동태 그리고 현대 언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중간태’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어떤 언어에서도 동사의 ‘중간태’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주어가 주체적으로 동작하는 것을 묘사하는 능동태의 동사와 주어가 수동적으로 동작당하는 것을 묘사하는 수동태의 동사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 헬라어로 기록된 성경에는 수동태의 모양을 띤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수동의 의미로 번역하면 전혀 뜻이 통하지 않고, 능동태로 번역해야 제대로 뜻이 통하는 문장들이 더러 발견된다는 것이다.

어떤 동사가 수동태의 모양을 띠고 있음에도 그 의미가 능동이라면, 이 동사를 수동태라고 명명할 수는 없다. 또 그렇다고 해서 수동태의 모양을 띠고 있는 동사를, 능동의 의미가 있다고 해서 능동태라고 명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수동태의 모양을 띤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능동의 의미로 쓰인 동사를 이도저도 아닌 ‘중간태’라고 편의상 명명하게 된 것이다(‘중간태’는 수동태의 의미 변화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단순히 동사의 모양만 가지고는 수동태인지 ‘중간태’인지 구별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고대 헬라어의 동사들 중에 ‘중간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장 속에서 수동태의 모양을 띤 동사들 중에 그 의미가 능동인 경우에 그 동사는 ‘중간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장에서 ‘중간태’로 사용된 동사라 할지라도 다른 문장에서 얼마든지 수동태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면 고대 헬라어에서 왜 굳이 수동태의 모양을 띤 동사로 능동의 의미를 나타내려고 했을까? 물론 그 이유는 정확하게는 잘 모른다. 그러나 수동태 모양을 띤 동사로 능동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문장들을 관찰해 보면, ‘중간태’는 능동태 동사처럼 주어의 동작을 묘사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동작하는 동작의 주체인 주어를 강조하는데 초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마11:12을 원문대로 미리 원문대로 바르게 번역한다면, “천국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공격하나니(여기서 ”공격하나니“가 능동의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수동태 모양을 띤 동사(중간태)를 사용한 이유는 공격하는 동작의 주체가 바로 ‘천국’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천국에 의해) 공격당하는 자들은 (천국을) 차지한다”가 될 것이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빼앗느니라(?)

KJV처럼 대부분의 번역 성경은 “bia,zetai”(비아제타이)를 왜 수동의 의미로 번역하는 것일까? 마11:12의 주어인 “천국”(h` basilei,a tw/n ouvranw/n/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공격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bia,zetai”(비아제타이)가 수동태의 모양을 띠고 있어도 능동의 의미로 사용된 중간태일 것이라는 판단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이 “bia,zetai”(비아제타이)를 수동의 의미로 번역한 이유는 어설프게 전후문맥을 염두에 두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마11:12 바로 앞에 언급되었던 세례요한과 마11:12의 천국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어설픈 전후문맥을 염두에 두고 마11;12를 읽는 이들은 “세례요한은 헤롯에 의해 폭력적인 죽음을 당했다. 이렇듯 천국은 원수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침노 당한다. 그래서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원수들이 천국을 빼앗는다”라고 마11:12을 이해하고 번역한다. 다음은 “bia,zetai”(비아제타이)를 수동의 의미로 번역한 아래 번역 성경들이다.

공동번역: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KJV: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NASB: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s violence, and violent men take it by force.

안타깝게도 위의 번역들은 마11:12의 주어인 “천국”의 주권적인 본질적 속성을 놓친 오역이다. 왜냐하면 전능자 하나님이 그의 절대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천국은 본질적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공격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헤롯에게 공격당해 참수 당했지만, 천국은 헤롯에 의해 결코 목이 잘리지 않는다. 오히려 천국은 세례요한이 참수 당함으로 말미암아 더욱 강하게 세상을 향해 침노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헤롯의 공격에 의해 참수 당했을 때, 천국복음으로 세상을 공격하시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유대 당국자들에 의해 공격당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은 세상의 공격에 의해 결코 죽지 않는다. 오히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더욱 더 강하게 세상을 향해 공격했으며, 그 공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통치되는 “천국”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특성에 비추어 볼 때, 마11:12에서 “천국”을 주어로 하는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는 비록 수동태의 모양을 띠고 있는 동사이지만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의 의미로 쓰여진 ‘중간태’가 명백하다. 그러므로 “bia,zetai”(비아제타이)는 “침노를 당하나니”가 아니라 “침노하노니”로 번역해야 한다. 이것은 마11:12의 유사본문인 눅16: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눅16:16에는 하나님 나라가 공격당한다는 어떤 암시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복음 전파자들을 통해 세상을 향해 전파되는 복음으로 공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들어가느니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복음으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의해 공격당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침입 당하게 되는 것이다{눅16:16에서 ”침입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마11:12와 동일한 “bia,zetai”(비아제타이)이며, 눅16:16에서 이 동사는 명백하게 수동태이다. 이것은 뒤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대부분의 헬라 교부들이나 칼빈, 그리고 헨드릭슨, 리델보스 같은 이들은 “bia,zetai”(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보고, “천국은 공격한다”로 바르게 이해했다. 그리고 NIV(has been forcefully advancing)를 비롯한 상당수의 번역 성경들도 “bia,zetai”(비아제타이)를 “천국은 공격한다”으로 바르게 번역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bia,zetai”(비아제타이)를 “공격한다”로 이해한 모든 이들과 모든 번역 성경들은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의 주어인 “biastai.”(비아스타이)가 능동의 의미로 사용된 “bia,zetai”(비아제타이)에서 유래된 것으로만 생각하고, “biastai.”(비아스타이)를 능동의 의미인 “침노하는 자들”로 오역하고 만 것이다. 헤르만 리델보스도 이 부분을 “천국은 침노한다.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빼앗는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투쟁이 요구된다”라고 주석했다.3)

“bia,zetai”(비아제타이)를 “공격한다”로 바르게 번역했으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biastai.”(비아스타이)를 “침노하는 자들”로 오역한 번역 성경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새번역: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NIV: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을 수 있을 만큼 나약한 나라인가?

마11:12에서 “침노하는 자들”로 번역한 “biastai.”(비아스타이)는 “bia,zetai”(비아제타이)에서 온 명사이므로, “bia,zetai”(비아제타이)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달리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bia,zetai”(비아제타이)가 “침노를 당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수동태라면, “biastai.”(비아스타이)는 침노를 당하는 천국을 “침노하는 당사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bia,zetai”(비아제타이)가 “침노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중간태’라면, “biastai.”(비아스타이)는 침노하는 천국에 의해 “침노당하는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bia,zetai”(비아제타이)를 “침노하다”의 의미로 바르게 이해한 자들이 “biastai.”(비아스타이)를 “침노하는 자들”로 번역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명백한 실수이다. 이런 실수는 눅16:16에서도 발견된다.

눅16: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에서 “침입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마11:12에서와 동일하게 수동태 모양을 띠고 있는 “bia,zetai”(비아제타이)이다. 따라서 눅16:16에서 이 동사가 수동의 의미로 쓰였는지, 능동의 의미로 쓰였는지를 판단해서 수동태 또는 ‘중간태’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11:12의 “bia,zetai”(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보고, “침노하느니라”의 능동의 의미로 번역한 자들이나 번역 성경들은 물론이고, 이 동사를 수동태로 보고, “침노를 당하노니”로 번역한 자들이나 번역 성경 모두는 눅16:16의 “bia,zetai”(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보고, 능동의 의미로 번역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눅16:16의 “bia,zetai”(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보고, 능동의 의미로 오역한 번역 성경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BibleWorks 등 대부분의 주석들과 모든 번역 성경은 이 동사를 ‘중간태’로 본다).4)

개정개역: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공동번역: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다. 그 이후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데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새번역: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의 때까지다. 그 뒤로부터는 하나님 나라가 기쁜 소식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모두 거기에 억지로 밀고 들어간다.

NIV: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proclaimed until John. Since that time,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is being preached, and everyone is forcing his way into it.

KJV: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until John: since that time the kingdom of God is preached, and every man presseth into it.

마11:12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이 그의 절대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천국”을 주어로 하는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는 능동적인 의미로 쓰인 ‘중간태’가 명백하므로 “침노하노니”로 번역해야 마땅하듯이, 눅16:16의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의 주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마다”(pa/j/파스)이므로,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 의해 동작되는 수동태가 명백하다.

그러므로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는 수동의 의미인 “침노를 당하나니”, 또는 “들어감을 당하나니” 등으로 번역해야 마땅하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을 조금도 침범할 수 없다. 사람은 오히려 천국 복음을 들음으로써, 천국에 의해 공격당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사람마다 자신의 힘으로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마다 복음으로 공격당해,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믿음으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그의 양들을 양 우리로 들어가게 인도하시면, 그의 양들은 그의 양 우리로 들어가게 된다. 결코 양들이 자신의 힘으로 양 우리를 침노하여 양 우리에 들어가거나 양 우리를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
 

글을 마치며

아담이 하나님이 되려고(천국을 침노하려고) 하나님을 거역했듯이, 이 시대의 교회들과 신자들이 타락과 파멸의 나락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을 침노하여 차지하려는 이 시대의 세속적인 교회들과 신자들의 사악한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구나 너무나 적절하게도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을 차지할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을 오역한 사탄의 메시지가 이들의 어리석은 교만을 정당화시켜주기까지 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 이런 교회들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결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타락한 교회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들로 우뚝 서서 박수를 받고 있으며, 오히려 사탄의 하수인들이 믿음의 영웅들로 추앙받기까지 한다.

오순절주의, 신사도주의, 신비주의, 성령주의, 알미니즘, 조나단 에드위즈를 믿음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교회들, ‘회심 준비론’을 주장하는 자들, ‘유보된 칭의’를 주장하는 자들, 수많은 이단들의 교주들 등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또 나름대로 적절하게 거짓 진리로 위장은 하지만, 하나같이 하나님의 자리를 엿보며,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며,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의 자리를 침노하는 자들이 틀림없다.

[바른믿음]에서, 특히 정이철 목사가 사력을 다해 이런 자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절대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밝히 드러내어, 하나님의 참 교회와 하나님의 참 자녀들이 하나님을 흉내 내는 거짓 교회들과 거짓 믿음의 영웅들에게 미혹되지 않고, 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의 참 교회를 섬기며, 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로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적어도 [바른믿음] 독자들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의 오역의 심각을 인지하고, 또 우리 속에도 내가 하나님이 되고 싶은 교만이 숨어있음을 자인하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진리의 말씀에 따라 철저하게 하나님이 되고 싶은 교만을 죽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 각 주 ----

1) 권성수, 성경해석학-1, pp. 11-12.

2) 류모세, 열린다 성경 난해구절-1, p. 235.

3) 헤르만 리델보스, 마태복음, p. 338.

4) 그러나 스테판 헬라어 분해 사전에서는 이 동사를 VIPPS3(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단수 3인칭)로, 즉 수동태로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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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