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청교도 사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아예 거짓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심하지 않습니까? 종교개혁 신학을 바르게 이어받고 계승하지는 못했어도, 좀 순수성이 떨어지는 신학으로서는 좋은 면이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요? 신형 벤츠만 굴러다녀야 한다는 법이 없고, 수 십년 된 썩은 똥차라도 굴러가면 타고 다니도록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답변>
원래 청교도 신앙, 청교도 교회, 청교도 신학은 영국의 종교개혁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스코틀랜드 장로파, 잉글랜드 장로파, 잉글랜드  독립회중파, 잉글랜드 분리회중파, 그리고 (회중파 인물이 시작한) 잉글랜드 침례파가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장로파는 교회정치에 대해 관심가지고 칼빈주의를 추구하였으나 신학에서는 회중파와 큰 차이를 발전시키지 않았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는 교회정치와 신학에서 분명한 칼빈주의를 추구했습니다. 침례파도 신학의 중요한 부분에서 회중파와 같았습니다.

결국 영국의 청교도 운동은 크게 장로파와 회중파의 종교개혁 사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웨민고백서 작성까지 함께 협력하다가 웨민고백서 발표(WCF, 1647년) 직후 원수가 되어 서로 등을 돌렸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의회와 국왕 세력이 대립할 때, 미력했던 의회파의 군대를 지휘하여 승리한 후 정권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독립회중파 인물이었고, 존 오웬과 같은 독립회중파 청교도 신학자들과 긴밀하게 교제하였습니다. 군사행동으로 잉글랜드의 최고 권력자로 올라선 크롬웰은 의회에서 장로파 인물들을 무력으로전부 추방하였고, 이후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 청교도는 처음에 언약도라는 명칭으로 시작되었고, 초기의 대표적인 인물인 존 낙스(John Knox, 1513?~1572)가 스위스로 망명하여 개혁자 칼빈의 학교에서 신학을 직접 배웠습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장로파 청교도는 정통 종교개혁 신학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회중파 청교도와 길을 달리한 이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로 자리잡았습니다. 회중파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에 앞장서리라고 기대했던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1533~1603)으로부터 배척당하자, 그때부터 과격하고 비성경적 종교개혁 사상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일부는(분리회중파) 영국 국교회를 사탄의 집단으로 간주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고, 또 일부(독립회중파)는 영국 국교회 안에 남아서 자신들이 원하는 종교개혁을 추구하였습니다.

역사의 격랑과 우여곡절을 거친 후 영국 성공회(영국 국교회, Church of England)가 잉글랜드의 대표적인 교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반대로 모든 청교도들은 박해받고 추방되었습니다(1662년).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운동이 공식적으로 추방당하기 전부터 분리회중파는 인근의 네덜란드 등으로 망명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1620년부터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새로운 교회, 회중교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운동이 완전히 종식되기 전, 청교도 지도자들에 대한 거센 핍박이 일어나자 존 카튼(John Cotton, 1584~1652) 등의 독립회중파 인물들도 결국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회중교회에 합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영국 국교회를 반대하는 모든 종교개혁 교회를 청교도라 불렀으나,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청교도와 청교도 신앙에 대한 정의는 달라졌습니다. 장로파는 웨민고백서(1647년) 작성을 기점으로 회중파와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갈라졌고, 이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발전시켰습니다. 청교도 중에서 명실공히 칼빈의 사상을 제대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청교도는 스코틀랜드 언약파, 즉 훗날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입니다. 오늘 날 ‘청교도 신학’, ‘청교도 신앙’이라고 불리우는 특이한 장르를 형성하는데 관련된 인물들을 주의 깊게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모두 회중파 청교도 인물들이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인물은 없습니다. 청교도 신앙이란 실질적으로 영국에서 회중파 청교도 운동을 일으켰고 이후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회중교회를 세운 사람들과 그들의 영적인 후손들의 신앙을 뜻합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영국의 종교개혁 운동은 스코틀랜드 언약파(장로파), 잉글랜드 장로파, 잉글랜드 분리회중파, 잉글랜드 독립회중파, 잉글랜드 침례파 등을 형성시켰습니다. 처음에는 그들 모두가 청교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청교도 신앙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신앙 장르는 그 중에서도 분리회중파 청교도와 독립회중파 청교도들이 발전시켰고, 이후 대서양 건너 신대륙에서 회중교회를 그 열매로 탄생시킨 회중파 청교도의 신앙과 신학을 의미합니다.

청교도 신학의 초기 인물로는 회중파 청교도의 아버지인 윌리엄 퍼킨스, 리처드 십스, 존 프레스턴, 중기 인물로는 존 오웬, 리차드 백스터, 신대륙으로 이주한 존 카튼, 그리고 후기의 인물로는 조나단 에드워즈, 로이드존스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바로 이들의 신학과 사상이 한국 교회가 우상시하고 있는 청교도 신앙입니다.  

 

종교개혁신학과 청교도 신학

청교도 신학이 겉으로 종교개혁 신학을 계승한다고 하였으나, 속으로는 철저하고 교묘하게 종교개혁 신학을 훼손하였습니다. 청교도 신학이 종교개혁 교회의 신학, 즉 개혁신학을 어떻게 교묘하게 훼손하였는지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만 말해 보겠습니다. 
 

1. 기독교의 출발 왜곡: 원죄 왜곡

기독교 신앙은 아담의 원죄로부터 출발합니다. 타락으로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되찾고 자기를 경배하며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을 보시기 원하여 팓괴된 창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과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한 원죄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호6:5-7)

이와 같이 성경은 아담의 원죄의 본질이 하나님에 대한 아담의 반역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합니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본분을 떠나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가 처음의 사람 아담의 죄와 본질적으로 같다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백성 됨의 언약과 함께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결코 청교도 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아담이 하나님 백성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십계명과 함께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청교도신학은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 아담의 마음에 십계명을 새겨주었고, 아담은 능히 그것을 지킬 수 있었음에도 지키지 않아 저주받았고 영생획득에 실패했으므로 하나님 백성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청교도 신학이 맞다면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은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될 후보자를 지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은혜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은혜로 먼저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될 후보자에게 스스로 노력하여 영생과 하나님 백성의 자격과 권리를 취득하라고 명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처음부터 행위구원, 율법구원, 펠라기우스-알미니안주의를 가르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3) 청교도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된다는 보장도 없고, 곧 타락하여 영원히 저주받을 아담을 지으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자화자찬하하신 이상한 분입니다. 

4) 청교도 신학은 아담의 마음에 새겨진 십계명이 훗날 시내산에서 돌판에 기록되어 주어졌다고 합니다. 순정상태의 아담과 죄의 종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일한 십계명 준수로 영생을 취득해야 했다는 청교도 신학의 논리는 너무도 엉성하고 이상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아담의 죄의 내용과 본질이 하나님 백성 됨의 언약 안에서 지어진 아담의 교만과 반역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칼빈과 어거스틴은 흙으로 지어진 천한 자(아담)가 과분하게도 하나님의 형상과 영생과 모든 탁월한 은사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과 반역을 시도한 것이 원죄의 본질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원죄에 대한 공교회와 종교개혁 신학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 (기독교강요, 2.1.4)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2.2.1)

그러나 청교도 신학은 아담의 하나님 백성되기 위한,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하여 영생획득하기 위한 조건이었던 십계명 준수거부가 원죄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청교도 신학은 아담의 선악과 범죄를 성경과 정통교회의 가르침대로 아담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위한 결단의 표시로 보지 않고,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 영생획득을 위한 계명준수 거부(실패)의 상징으로 봅니다. 이것을 거창하게도 행위언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청교도 신학은 기독교에서 벗어나버렸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인데, 아담의 원죄에 대해 왜곡하면 예수 믿음의 내용이 성경적일 수가 없습니다. 결국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어이없게도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들과 같은 신학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만 표현의 방법이 달랐다고 우깁니다. 그것을 요즘 거짓 신학자들은 미국의 칼빈신학교의 교수였던 사람의 이름을 넣어 '멀러 테제'라고 거창하게 주장하고 있으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늘 윌리엄 퍼킨스, 리차드 십스, 존 오웬, 리차드 백스터, 조나단 에드워즈 ... 등의 이름난 청교도 신학자들의 미련한 신학과 주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미 성경과 길을 달리한 자들의 어리석은 신학을 들먹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2. 구원론 왜곡

청교도 신학의 제일 심각한 문제는 구원론을 왜곡했다는 것입니다. 공교회와 종교개혁 교회의 구원론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 즉 완전히 흠 없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속죄와 배상의 피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배상의 피가 믿는 자에게 죄책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의’를 선물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얻으므로 하나님 백성으로 살고 영생할 권리와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외에 다른 것이 더 있어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덧입게 되어 하나님의 의를 얻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과 하나님의 의를 얻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1)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 6:1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19)

그러나 청교도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계명 준수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었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없이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그럴싸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이라고 교리화하였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우리에게 구원과 하나님의 의를 준 복음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계명 준수가 우리에게 복음이 되었다는 전혀 성경에 없는 다른 복음을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율법을 마음에 새겨주셨습니다.” (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57)

“아담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율법은 사람의 친구였습니다. 아담은 율법을 바라볼 때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사랑했습니다.” (프롱크, 26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시내산에서의 율법조차도 이스라엘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 율법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차이는 돌판에 새기셨다는 것입니다.” (프롱크, 258)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한 모든 계명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자신의 죄의 짐을 느끼는 죄인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코르넬리스 프롱크, 268)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아담의 원죄를 하나님 백성 됨의 언약과 함께 창조된 아담의 반역이라고 믿지 않고, 하나님 백성되고 영생얻기 위한 조건의 계명준수 거부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변형입니다. 십자가 중심의 기독교가 십계명 등의 율법 준수 중심의 기독교로 변경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청교도 신학이 성경적 기독교 신학이 아님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글이 길어졌으므로 오늘은 이정도로 마치고 다음에 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청교도 신학의 문제성에 대해 해야 할 말이 많습니다. 저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더 이상 청교도 신학을 종교개혁 신학, 즉 개혁된 교회의 신학, 또는 개혁신학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제가 추천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은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

복음주의 신학의 패러다임은 시대의 정신과 필요에 맞게 예수 믿음을 변경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가 아니고 ‘성경이용’의 정신이 복음주의 신학의 근본 패러다임입니다. 여성안수가 시대의 정신으로 떠오르니 여성안수도 주장합니다. 같은 원리로 다원주의 신학, 천주교와의 연합, 오순절 운동과의 연합, 영성신학(관상기도)과의 연합 ... 등 복음주의 신학은 시대의 이슈, 관심, 필요를 기독교 속에 반영하면서 지속적으로 영역을 넓히고 신학의 경계를 바꾸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 편하고 즐겁게 믿게 해 주는 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장점입니다. 그런 신앙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의 문제는 나중의 일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청교도 신학도 복음주의 관점에서는 아주 좋은 신학일 수 있습니다. 회중파 청교도들이 활동할 당시 영국 사람들은 구원과 무관하면서도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구원이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청교도 운동은 그 상황에서 진정 구원받는 신앙을 정착시키기 위한 열정이었고 몸부림이었습니다. 회중파 청교도들은 새로운 율법주의를 도입하여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삶과 행위와 믿음의 변화를 유도하였습니다. 확실하게 신앙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받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각인시키는 것이 그들의 최고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를 노골적으로 표방하면 갈라디아서 등의 사도들의 성경에 의해 정죄를 받을 것이니, 우회적인 방법으로 율법주의를 영국 사람들에게 확산시켰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율법(십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 존재로 지어졌다. 인간은 영생얻기 위한 조건의 십계명(율법)를 지켰어야만 하나님 백성이 되고 영생을 누릴 수 있었는데, 그것을 거부하여 영벌에 처해졌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담과 우리 대신 모든 율법(십계명)을 지켜서 우리에게 영생의 권리와 자격(하나님의 의)를 주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율법의 요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할 요구는 남아있다.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증거이다" ... 이런 식으로 기독교 복음을 그 당시 영국의 필요에 맞게 고쳤습니다. 전도, 성화, 칭의, 언약 ... 모든 영역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청교도 신학입니다. 좋은 뜻으로 한 일들입니다. 절대로 나쁜 뜻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간에 성경에서 매우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경을 고쳐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열정으로 믿습니다. 그 열정이 대단하여 최고의 신학이라는 명성도 얻었습니다.이 상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합니까? 종교개혁 신학, 즉 개혁된 교회의 개혁신학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의 결론은 청교도 신학을 개혁신학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으나, 웨슬리 신학, 오순절 신학, 영성신학 등이 포함되는 복음주의 신학의 범주에 넣고 존중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은 방언기도 거부하고, 영성신학 거부하고, 다원주의 거부하고, 펠라기우스-알미니안 거부하고, 웨슬리 신학도 거부하는 독특한 복음주의 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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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