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구절 호세아 13장 14절 해석의 문제

질문>
호세아서 13장 14절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고 주석을 찾아보아도 명쾌하지 않아 전혀 다른 두 가지 견해가 있어 문의 드립니다.

1. 개역개정 :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호13:14)

2. KJV : I will ransom them from the power of the grave; I will redeem them from death: O death, I will be thy plagues; O grave, I will be thy destruction: repentance shall be hid from mine eyes.

3. 표준새번역(개정):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내가 그들을 사망에서 구속하겠다.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이제는 내게 동정심 같은 것은 없다. 또는 '나더러 그들의 몸값을 갚아 주고 그들을 스올의 세력에서 빼내란 말이냐? 나더러 그들의 몸값을 치르고 그들을 죽음에서 살려내란 말이냐?'(호 13:14)

4. CEV : Should I, the LORD, rescue you from death and the grave? No! I call death and the grave to strike you like a

plague. I refuse to show mercy.

5. GNB : I will not save this people from the world of the dead or rescue them from the power of death. Bring on your plagues, death! Bring on your destruction, world of the dead! I will no longer have pity for this people.

1과 2는 유사한 해석이고 물론 히브리 원전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고요. 그런데 구속하겠다고 하면서 뉘우침이 내 눈앞에서 숨으리라고 했습니다. 3,4,5는 구속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비를 보여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명확히 이해가 되지 않아 도움을 구합니다.

 

답변>
목사님 말씀처럼 호 13:14절은 참으로 해석이 어려운 구절로 보입니다. 본 구절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다른 두 견해가 있습니다. 이 구절을 축복의 말씀으로 보는 견해(칠십인역 성경, KJV, NASB, NIV, 개역한글, 개역개정, 현대어성경)가 있는 반면, 반대로 심판의 말씀으로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은 편입니다(CEV, GNB, RSV, NEB, JB, Ward, Walff, Jeremias, Jacob 등).

14절 후반의 “뉘우침이 내 눈앞에서 숨으리라”는 구절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계획을 바꾸지 않고 반드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와 이스라엘의 회개가 하나님의 눈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형벌이 확실히 임함을 나타낸다고 보는 견해(칼빈)로 갈라집니다. 그런 가하면 NIV처럼 14절 전반부는 축복의 말씀으로 보고 후반부는 하나님의 심판의 형벌로 다르게 번역하여 또 다른 혼란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구교의 공동번역 성서는 아예 이 난해한 삽입절의 번역을 생략해버렸습니다.

호세아서의 난해함은 호세아서가 구약 가운데서도 스가랴서와 더불어 그 어느 책보다도 많은 메타포(은유)와 파라독스(역설)가 있고, 어리석은 우리 인간에게 이 같은 다양한 은유와 역설과 수사적 표현들 속에서 독특한 시청각 교육을 시키시는 인간 상상을 초월한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시 방식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13장 안에만 해도 심판 받아 마땅한 이스라엘을 아침 구름, 사라지는 이슬,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등으로 묘사하고(13:3) 심판주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자, 표범, 암곰, 암사자, 들짐승 등으로 비유하고(13: 7-8), 심판의 몽둥이(도구) 역할을 할 앗수르 군대를 동풍에 비유(13:15)하는 것을 봅니다.

14장에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이슬(14:5)과 푸른 잣나무(14:8)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이스라엘을 백합화, 백향목, 감람나무, 곡식, 포도나무, 포도주 등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14:5-7).

이 같은 현란한 비유 가운데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유대의 수사학적 묘사에 익숙하지 않았던 번역자들이 난해한 번역에 이르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훌륭한 성경 번역자들마저 유대적 문법과 사고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으니 동방의 작은 나라에 사는 우둔한 우리들이 해석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호세아서 전체의 큰 그림에서 보면 역설과 은유적 표현 가운데, 고멜처럼 죄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애증을 볼 때 제 개인적으로는 결국 이 구절도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심판이 아닌 (변장된) 축복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는군요. 따라서 혹시 이 구절을 부정적 표현으로 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수사적 반문으로 볼 수 있으므로(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책망할 때 가끔 너무 화가 나고 흥분하여 자녀를 저주하는 듯한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으나 그 자체도 사실은 사랑의 애증의 표현인 것처럼) 결국 호세아서의 전반적인 그림에서는 심판 받아 마땅한, 또한 징계 받은 자들까지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선지서에서도 이 같은 반전의 말씀은 자주 발견이 됩니다. 인간과 생각이 다르고 인간 생각보다 높은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사 55:8-9)은 이방인과 고자(鼓子)조차 구원하시는 사랑이 넘치는 분으로 나타납니다(사 56:3-5). 이들은 사실 거룩한 여호와의 총회에 절대 참여할 수 없는 자들 아니었습니까?(신 23:1).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은 파숫군들과 몰지각한 목자들을 향해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짖지도 못하는 벙어리 개(새끼)’들이라고 칭하면서 삼림의 짐승들보고 와서 그들을 다 삼켜버리라고 저주하니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파숫군과 몰지각한 목자들로 상징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었어도 놀랍게도 창조주 하나님은 그들을 또 용서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사 57: 11-19). 인간은 일반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절대 남을 용서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섭리라고밖에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호세아서의 본 구절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으로 보든,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의 표현이라고 보든, 어느 쪽의 표현이든 간에 결국 호세아 14장에 묘사된 데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약속된 은혜의 구절로 보고 싶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으니까요. 그래서 호세아서의 마지막 14장 말씀이 마치 너무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처럼 다가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중략)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호 14: 5-7, 9).

이 같이 귀한 구절을 꼼꼼하게 찾아 읽으시고 남들이 발견치 못하는 미묘한 문맥을 잡아내시는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평안하시고 건승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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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