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 쯔빙글리와 개혁파 교회(1)

스위스의 종교개혁, 특히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寡言)이 아니다. 취리히를 비롯하여 루체른(Oswald Myconius, 1488–1552), 바젤(Myconius, 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 베른(Berchtold Haller, c. 1492-1536), 제네바(Farel, Viret, Calvin 등), 그리고 조금 밖에 있는 스트라스부르(Wolfgang Capito, c. 1478–1541, Martin Bucer, 1491–1551) 등 각 도시들이 이룬 종교 개혁의 성과는 놀랍다.

후에는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스위스 연방들(the Swiss Confederation)이 함께 스위스의 종교 개혁을 하게 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1528년 1월에 베른에 모여서 개신교 회합을 가졌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유럽의 개혁파 교회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 일의 앞자리에 서 있는 쯔빙글리의 개혁파 교회에 대한 기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그의 생애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 보기로 하자. 1484년 1월 1일에 (지금은 St. Gall 칸톤에 속해 있는) 산악지대인 톡켄부르크(Toggenburg Valley)의 빌트하우스(Wildhaus)의 부유한 농부인 울리 쯔빙글리(Uly Zwingli)와 마가렛(Margaret)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들의 11명의 자녀 중에서, 훌드리히(울리히)는 발렌쉬타트 호반에 있는 베젠(Wesen/Weesen)의 수도원장이었던 그의 삼촌 바돌류뮤 쯔빙글리에게 “5살 때” 보내어져 공부를 시작하였고, 10세 때인 1494년에 바젤에서, 그리고 조금 후에 베른에서 라틴어 학교를 다녔다. 1498년 겨울 학기부터 비엔나 대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여, 1502년 여름 학기부터는 바젤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바젤에서) 1504년 9월 18일에 학사 학위를, 그리고 바젤의 St. Martin에 있는 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면서 계속 공부하여 2년 뒤인 1506년에 석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바젤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후에 평생 동지로 활약하는 레오 유드(Leo Jud)를 만났다고 한다.

이때까지도 그들은 아마도 중세의 “via antiqua” 방식에 익숙한 선생님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된다. 그는 이런 교육을 당대의 뛰어난 인문주의자들로부터 받았으니, 베른에서는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 그는 Lupulus로 언급되기도 한다)에게서, 비엔나에서는 당시 독일의 최고 인문주의자라고 불리던 콘라트 켈티스(Conrad Celtis)에게서, 그리고 바젤에서는 “1505년부터 신학 교수로 가르치고 있던” 토마스 비텐바하(Thomas Wyttenbach, 1472-1526)에게서 교육받았다. 쟈끄 끄르부와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인문주의 학교에서 교육받은 쯔빙글리는 일생 그 흔적을 간직했고 그의 활동 속에서 그 공헌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활동 속에서 그는 인문주의적 방법을 고수했는데 그것은 원천에로의 복귀와 지적 엄격성이다.”

1506년에 “라페르스빌(Rapperswil)에서 처음으로 설교하고, 9월에” 주교가 있던 콘스탄츠(Constanz)에서 사제품을 받은 쯔빙글리는 1506년 말부터 그랄루스 칸톤(the confederate sate of Glarus)의 제일 도시요 산지 지역인 그랄루스(Gralus)에서 10년 동안 주임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고전과 교부들의 작품들, 특히 어거스틴의 글들을 읽었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1513에서 1516년 사이에 에라스무스의 글을 읽었으며, 1513년부터 “신약성경을 원어로 읽기 위해서”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에 스위스 용병의 채플린으로 참여해, 1512년의 파비아(Pavia) 전투, 1513년의 노바라(Novara/Novarra) 전투, 특히 1515년 9월 14일(금요일)의 (밀라노 남쪽 16Km 지점에 있는) 마리그나노(Marignano)에서의 전투에서 수많은 스위스 용법이 죽는 것을 목격하고서 확신을 가지고 용병 제도를 강하게 비판하게 된다. 쯔빙글리는 “스위스 젊은이들이 외국 군대 용병으로 참여하여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서 스위스 민족에게 분노를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승리한 프랑스의 영향이 강화된) 그랄루스 통치자들과의 불화 때문에 1516년 (4월)에 쯔빙글리는 그랄루스를 떠나 이로부터 15마일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인 (쉬위츠 칸톤[Canton Schwiz]에 있는) 아인지데른(Einsiedeln)으로 옮겨가 사제로 사역하게 된다. 여기서도 계속해서 교부들의 글들을 읽고, (의사요 St. Gall의 시장을 여러 번 역임한) 요아킴 바디안(Joachim Vadian)과 (당대의 지리학자요 시인으로 에라스무스와 친구였던) 하인리히 글라레아누스(Heinrich Glareanus, 정확히는 Heinrich Loriti [또는 Loreti]인데 그가 그랄루스 출신이어서 이렇게도 불렸다고 함)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더 받고, 희랍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아마도 히브리어도 공부했다고들 한다.

그의 친구인 하인리히 글라레아누스가 “바젤로 1514년에 이사하고, 에라스무스가 1514년 8월부터 1516년 5월 사이에 바젤에 있었으니,” “아마도 1516년 봄에” 쯔빙글리가 에라스무스와 바젤에서 만났을 것이라고 한다. 쯔빙글리가 에라스무스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 그의 존경심과 그의 헌신이 흥미롭다. 1516년 3월에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신약 성경이 출간되었을 때 쯔빙글리는 그 중에서 바울 서신을 한 구절 한 구절 필사하였고, 바울 서신의 상당 부분을 외웠다고 한다. 이 모든 것에 근거해서 개블러는 1519년 이전, 즉 취리히 이전에 쯔빙글리는 “철저한 에라스무스주의자요, 에라스무스적인 성경적 휴머니즘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그런 사람으로 취리히에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때도 그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에라스무스적인 관점을 가진 것을 아니라는 것이 더 바른 견해이다. 즉, 이때도 쯔빙글리는 의지의 자유를 말하는 에라스부스적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1522년에 쓴 글에서 그는 “7-8년 전에 나는 나 자신을 전적으로 성경에 헌신하기로 하였다”고 쓰고 있다. 그러니 그 때가 1515-16년이다. 그 때부터 쯔빙글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최고의 권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미친 “성경 자체의 창조적 영향을 무시하면 안 될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마셔야 할 ‘참된 샘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참으로 경건한 자가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그렇게 그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확신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 말고 그 어떤 다른 말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피터 스티븐스가 잘 말하고 있듯이, “그에게 있어서 성경으로 돌이켰다는 것은 사람의 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이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돌이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다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는 것도 쯔빙글리의 사상을 정확히 요약한 것이다. 후에 그는 루터를 “천년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할 만큼 진지하게 성경을 깊이 탐구한” 하나님의 병사로 존중했으나, (위의 각주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자신이 루터에게서 복음을 처음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하고, 따라서 자신이 루터파로 불리는 것은 거부하였다. 그러니 쯔빙글리가 의지의 자유를 주장하는 에라스무스의 주장과 자신의 입장을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 분명한 것이다.

1519년에 당시 취리히의 학교장(Schoolmaster)으로 있었던, 후의 바젤의 종교개혁자의 한 사람인 오스왈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 1488-1552)의 추천과 취리히 참사회원들(canons)의 투표로 35세의 나이로 취리히의 “시민 사제”(Leutpriester, people’s priest)로 선임된 그는 취리히 시의 종교개혁을 의미 있게 전개시킨다. 당시 7,000명 인구를 가진 취리히에는 3개의 교구에 57명의 사제들과 24명의 참사회원들(canon)과 200여명의 남녀 수도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1521년 4월 29일에는 쯔빙글리 자신도 취리히 시의 24명의 참사 회원들(canons) 중 하나가 되고, 동시에 시민 사제의 역할도 겸하여 하게 되었다고 한다. 취리히에서 쯔빙글리가 행한 일들이 오늘날의 개혁파 교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 것인가? 바로 이것이 이 글에서 내가 드러내어 언급하려고 하는 주제이다. (이승구 박사의 '취리히 쯔빙글리와 개혁파 교회'가 앞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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