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시대의 칼빈과 영국 식민지 시대에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Virginia에서는 성공회, New England에서는 회중교회를 중심으로 정부가 교회에 관여하는 일종의 신정정치를 구현하였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도전에 직면하여 제네바에서 교회를 개혁하였는데, 율법에 기초한 엄격한 교회법을 제정하였고, 그 법을 실행하는 종교국을 설정해, 제네바 시민들의 종교생활을 점검하였다. 만약 법을 어길시 목사, 장로, 성경 교사등 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그 법에 의하여 처벌 받았다. 벌은 엄격하여 권징, 출교, 파문, 축출, 고문, 심지어 사형(화형)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인간의 본성은 타락하여 외부에 의한 억제가 없으면 인간은 방종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당시 교회회원이 되는 것과 생존권은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법에 굴복 했어야만 했다. 물론 first priority는 그들의 신앙을 개혁신앙으로 견고히 하고 어떠한 신학적 도전과 이단사설로 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영적문제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의 글에서 율법을 어떤 때는 회심 전의 용도로, 즉 첫 번째 용도인 하나님의 의와 정죄를 선포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고 회개케 한 후 복음을 선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 받은 후 즉 회심 후에 율법의 세 번째 용도인 선한 행실을 강조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의 글에서도 청교도의 ‘회심준비론’과 비슷한 사상이 나온다고 주장한 죠엘 비키의 말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칼빈 시대의 종교법, 그리고 청교도 시대의 ‘회심준비론’은 그 시대에 적합한 그 시대의 기독교 산물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다. 같은 칼빈주의를 추구한 회중파 청교도와 장로파 청교도들 사이에 어떤 사상적 차이점이 있었는지? 물론 교회 정치면에서는 현저히 차이점이 있었다. 뉴잉글랜드의 회중파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Jonathan Edwards가 스코틀랜드 개혁파 장로교의 보고요 산실이었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그의 마지막 생애를 마쳤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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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훈 장로는 Nevada주의 Las Vegas에 거주하며, 갈보리장로교회(협동장로)에 출석한다. 직업은 치과의사이고, 라스베가스의 '김리훈 보철치과'의 원장이다. 남가주대학(USC), 캘리포니아대학(UCLA, 치의학박사), 미시간대학(U of M, 보철전문의 석사)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미주 총신(M.Div)에서 개혁신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