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1년 제임스 6세가 성년이 되자, 1560년에 채택한 신앙고백서 지지를 선언하는 왕의 언약(King's Covenant)에 서명했다. 제임스 6세의 유년 가정교사는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 1506-1582)이었지만, 합당한 기독교적 가치가 아닌 세속 왕의 권위를 앞세웠다.

앤드류 멜빌은 두 왕국 체계를 확립했다. 두 왕국 이론이 무엇인지는 1582년 멜빌 목사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후에 잉글랜드 제임스 1세)에게 주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를 간섭하는 왕을 향해서 멜빌이 한 말이다.

“전하, 이 말을 꼭 해야 하겠습니다. 이 스코틀랜드에는 두 왕과 두 왕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임스 왕과 국가이며, 다른 하나는 왕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교회입니다. 스코틀랜드 국왕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왕도, 주도, 머리도 아니며 단지 한 구성원에 불과합니다” (Melville: 2010, 371)1)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主)이심을 실현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는 사회를 추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583년 제임스 6세가 루스벤 성에서 탈출하면서 반격이 시작되었다. 제임스 6세는 반장로교주의자인 아란(Arran) 백작을 중심으로 언약도에 대한 거부를 진행했다. 1584년 통일령(the Black Act)와 의회 결의를 통해서, 집회 자유를 빼앗고 주교제도로 회귀했다(Moore: 2018, 63, 김중락: 2017, 190).

그런데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패배하자 다시 장로교를 지지하는 세력이 증가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이 제정한 통일령을 폐지하고 장로교 질서로 회복했다(Moore: 2018, 63). 1592년 황금법(김중락: 2017, 193)으로 암흑법을 무효화시켜 장로교 제도의 근간을 확립했다.

그런데 1596년 제임스 6세는 린리스코우 법령(Act of Linlithgow)으로 교회 통제를 강화시켰다(Moore: 2018, 64). 무어(Moore)는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분리주의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을 네덜란드로 도주하도록 만들었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분리주의자, 브라운주의자(Separatists, Brownist)을 “경건한 작은 그룹의 교제는 강조했으나,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경시했다”고 정의했다(Moore: 2018, 64).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하고, 1606년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VI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I가 되었다. 제임스 I세는 스코틀랜드 왕과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제임스 I세가 스코틀랜드 왕이었기 때문에, 장로 제도에 호의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스코틀랜드에서부터 장로파에 대해서 명확하게 거부하고 저항했다.

그런데 제임스의 아내가 교황주의 교도였기 때문에 박해를 피해 이주한 150여명의 교황주의 사제들이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제임스는 주교를 임명하고, 귀족을 매수하면서, 장로교 지도자를 투옥시키고 추방시키며 장로파를 박해했다. 1610년 글래스고우 총회에서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했다. 이에 반대하는 멜빌, 존 웰쉬(John Welsh, 1558-1622), 낙스의 조카 등을 투옥시키거나 추방시켰다. 제임스의 행보는 피 흘리며 제거했던 로마 교회를 복구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결국 스코틀랜드 장로파들은 왕의 법에 불복종을 선언했다. 1621년 퍼스 5개 조항(Five Articles of Perth)을 스코틀랜드 의회가 비준했다. 5 조항은 성찬에 무릎 꿇기, 개인 성찬수행, 비공식 세례 거행가능, 견진성사, 축일(부활절, 성탄절)준수 등이었다. 왕이 작성한 5개 조항은 멜빌이 작성한 ‘스코틀랜드 제2 치리서’를 거부하는 내용이다. 제임스 1세의 강력한 절대군주(국교회) 강화는 스코틀랜드 장로파를 압박하고, 분리주의자들은 네덜란드로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결과가 되었다.

제임스 1세가 흠정(欽定)으로 성경(KJV)을 번역해서 상당히 유명하지만, 청교도를 박해한 유력한 군주 순위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다.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국교회를 “매춘부 엄마”로 불렀다(Moore: 2018, 68). 김중락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서 가장 큰 문제를 “제임스 6세의 장로교 혐오”로 제시했다(김중락: 2017, 194).

교회 이해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모두 펼쳐진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헨리 8세 때에 로마 교회(교황주의)에서 국교회주의(성공회)로 전환했다. 로마 교회에서 완전 개혁을 추구하던 개혁파는 국교회주의에 대항해서 분리파(적극분리파와 내부분리파)가 있다. 내부분리파는 아직도 국교회에서 낮은 교회(low church)로 유지되고 있다. 적극분리파는 미국으로 이주해서 회중파 교회를 이루었다. 스코틀랜드는 장로 제도이다. 그 이외에 침례파, 감리교, 구세군 등 무수한 교단이 잉글랜드에서 발생했다.

17세기에 영국에서 발생한 교파를 구분하면, 장로 제도와 로마 교회, 국교회, 분리주의(회중파), 침례파이다. 감리교는 국교회 사제였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사후에 형성되었다. 여러 종파가 발생된 주요 원인은 교회의 주권(주인)에 대한 이해와 주인임을 고백하는 방식이다. 로마 교회는 교황(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이겠지만), 국교회는 국왕이다.

그리고 다른 종파들은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데, 장로파는 하향식이고 회중파는 상향식으로 이해했다. 그 이해는 교회 사역자에 세움에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장로파와 회중파는 교회의 구성원이 거룩을 증진하는 방법, 분별하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에서 차이를 보였다. 크게 장로파와 회중파로 구분할 수 있다. 회중파 계열은 침례교, 구세군, 감리교 등이다. 감리교, 침례교, 구세군 등은 교회의 주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신앙 이룸(혹은 완성) 부분에서 분리된 분파로 분류할 수 있다. 큰 범주로는 분리주의(회중파)로 분류할 수 있다. 장로파는 “구원 이룸”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함”에 관심을 두었다고 평가한다.

장로파들은 교회를 주 예수께서 세우시고 다스리는 주님으로 고백하기 위해서 생명을 바쳤다. 국왕은 자신이 교회의 수장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명을 앗는 것을 감행했다. 우리는 치열한 교리 논쟁 이전에 교회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여 일치를 이룸이 선결되어야 한다. 고대 교회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이해에 관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실체(homoouison)을 고백하면서 신성 이해를 확증하면서 삼위일체를 고백했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은 구원 이룸에 대한 논의였다. 루터는 교회와 교황이 주도하는 구원 방식을 거부하고, 구주 예수께 귀결시켰다. 칼빈은 성경 해석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이룸을 체계화시켰다. 그런데 구원 이룸 도식에 토론을 하면서 다양한 논의를 가져왔고, 그 혼란은 정리하지 못하고 후대로 넘겨 버렸다. 필자는 구원 이룸 도식에 대한 이해도 좋지만 합의에 이룰 수 없음을 인지했다. 그럼으로 합의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도록 협력할 것을 제언한다. 칼빈파는 스위스에서 불링거와 협력했고, 잉글랜드에서 회중파와 협력했다. 다만 회중파가 자체로 사보이선언(The Savoy Declaration, 1658년)을 작성한 것은 그 협력을 깬 것으로 볼 수 있다.

21세기 교회에는 두 에큐메니칼이 있다. 믿음과 직제의 일치로 교회 연합을 이루는 에큐메니칼이 있고, 천상의 주 예수의 다스림을 받은 에큐메니칼이 있다. 17세기 잉글랜드에서 심각하게 교파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유럽의 모든 사상들이(교황주의, 루터파, 칼빈파, 신비주의, 재세례파, 소시니안...) 급속하게 잉글랜드에 유입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총화는 18세기 스코틀랜드 흄(David Hume, 1711-1776)의 회의론(懷疑論, skepticism)으로 종결시켰고, 독일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의해서 계몽시대의 대여명을 밝혔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1781년)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 Copernican revolution)을 이루었다. 유럽은 1차 대전이 발발하기 까지 예수를 탐구하면서 상상하지 못한 풍요 시대를 경험했다. 칸트 이후에 하이데거와 칼 바르트 이후에 있는 우리시대에, 16-19세기 유럽 사상을 정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지금 유럽 지성인들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주를 예수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칼빈, 스코틀랜드 장로파, 네덜란드 개혁파, 미국 장로파와 개혁파, 대한민국 장로파에서 동일한 것이며, 1-4세기 예루살렘과 교부들의 교회와 동일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21세기나 1세기 동일한 주님을 믿기 때문에, 동일한 가치를 생산해야 하고 전파해야 한다. 참고로 은사주의 교회들도 사도적 교회를 주장하는데, 그들은 능력 나타남으로 사도적 교회를 주장한다. 장로파는 교회의 주인을 주 예수로 고백함에서 사도적 교회를 지향한다. 사도의 가르침을 전파함에 힘쓴다. 장로파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소홀하거나 망각하면 즉각 능력 나타남으로 변환될 것이다.

 

<미주 및 참고문헌>

1) ‘And, thairfoir, Sir, as divers tymes befor, sa now again, I mon [must] tell you, thair is twa kings and twa kingdoms in Scotland. Thair is Chryst Jesus the King, and his kingdome the Kirk, whase subject King James the saxt is, and of whase kingdome nocht a king, nor a lord, nor a heid, bot a member!’

James Melville, The Autobiography And Diary Of Mr. James Melvill, With A Continuation Of The Diary V2 (1842)(Kessinger Pub, 2010)

Edwin Nisbet Moore, 『언약도의 역사와 유산』 오수영 역(서울: CLC, 2018)

김중락, 󰡔스코틀랜드 종교개사󰡕 (서울: 흑곰북스, 2017).

김준범,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의 역사와 신앙”, 7회 개혁신앙강좌, 2010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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