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얼마나 다르게 읽고 예수님을 얼마나 오해하는지 정말 놀랍다. 오컬티즘 영지주의자들이 성경을 난해한 상징으로 해석하며 마법과 사탄주의를 만들었던 것처럼, 그들도 성경의 일부만 인용해 정반대의 해석으로 이끌면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대적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

1) 잘못된 선민사상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선민으로 택하신 것은 바로 그들이 통로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거룩하고 아름답고 희생하고 손해보고 참고 성결하게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난 자들이 세상과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제사장이자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특권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특권을 잘못 해석해서 유대인이 인류의 중심에 있고 비유대인은 개나 돼지와 같다고 생각하며 범죄에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유대인은 비뚤어진 선민사상 때문에 역사 내내 미움받고 학살까지 당해야 했는데,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핍박이라고 주장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고 인류 역사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이제 유대교의 실수를 기독교도 범하고 있다.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교회도 선민이 갖는 특권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사람들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아서 더 잘 살고 더 높아지고 더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복을 통해서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많은 헌금을 주장하고 높은 건물을 세우고 목사님들이 대기업 총수만큼 급료를 받아도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주신 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일까?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복받는다고 전도하는 것은, 바로 우상숭배하는 종교들의 유혹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서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바르게 삶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려주는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복 받은 자의 모습이다.
 

2) 종교적 열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소나무 뿌리를 뽑을 정도로 열성을 드리고 금식과 철야로 고행하며 기도해야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오해한다. 그런 치열한 기도를 좋은 믿음이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발상은 하나님을 이방종교의 신으로 보는 것이다. 삼천배를 올려야 한번 눈길을 준다는 부처, 온몸을 채찍질하며 고행해야 성결하게 해준다는 ‘하느님’, 음식상을 차리고 돈을 바치고 많은 춤을 추어야 소원을 들어준다는 무당신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며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뉴에이지적 신념은 가장 악한 것이지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며 하나님을 움직이겠다는 의도로 열심을 부리는 종교적 신념도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선한 행동일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종교의식이나 고행이나 수련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알고 온전히 우리의 인생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간섭하고 인도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고 슬픔에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3) 신앙적 자신감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가 사탄인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므로 거짓된 사탄의 세력을 두려워하거나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들은 진리와 사랑의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바르게 인도하실 것을 믿으므로 자신은 지금 바른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다.

사실,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도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허락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하나님은 무수한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셨다. 언젠가 결국 깨닫게 하실 때가 있겠지만 그동안의 시간 낭비는 억울한 손실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에게는 진리의 기준인 성경이 주어졌으므로 이것을 힘써 알고 분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가 하나님 알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성경을 읽을 때 우리 안의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지, 저절로 알게 해주시지는 않는다.

기독교서점에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법, 하나님의 음성듣는 법, 하나님을 아는 법… 등의 노하우에 관한 책이 무수하게 많이 나와있다. 나도 그런 책들을 열심히 읽었고 많이 가르치기도 했다. 남들을 가르치기에는 좋은 서적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런 책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거나 음성을 듣지는 못했다. 그저 들었다고 착각하고 듣는 척하고 만족한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알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가면서 그분을 알아갈 수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기쁨과 슬픔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함이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알고 들을 수 없다.

그럼 어떻게 그분을 체험하고 평안할 수 있을까? 말씀에 기록된 대로 순종하고 그 열매를 보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이심과 사랑이심을 체험하고 평안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신비 체험이나 신적 능력이기 이전에, 우리의 결단이고 행동이다.
 

4) 목사의 신격화

목사를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종이라며 특별히 성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목사가 기도하면 더 잘 응답되고 목사가 축복해주면 더 복받는다 생각하고 심지어는 그의 손길이 한번 스치는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엄금하신 우상화다. 목사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라고 생각하며 신격화하는 것은 가톨릭의 전통을 배우고 답습한 것이다.

가톨릭은 교황이 하나님의 대리자라며 무소불위의 막강한 종교권력을 누렸던 기관이다. 인간들끼리 신품성사를 주고 받은 주교나 신부들도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카리스마화시켜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불렀다. 그들이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해주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고 죄를 고백하면 용서를 선포하는 권한이 있다고 여겨서 중세 시대 사람들은 집을 팔아 헌금하면서라도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의지하려 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흉내내어 속이려는 가장 참람한 죄악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목사들도 가톨릭의 비성경적인 전통을 본받아서 신적 권위를 누리려하고 있다.

교인들이 자신을 신격화해서 떠받드는 것을 말리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암암리에 자신을 신격화한다. 기름부으심 받은 목사를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보이는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종인 목사를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교인들은 목사에게 대기업 회장 만큼의 사례비를 주고 최상의 진미를 대접하며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목사의 엄청난 도덕적 잘못을 알면서도 감추고 덮어주는 것을 하나님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그를 신격화하려 하자 옷을 찢으며 만류했지만, 지금의 목사들은 교인들의 대접을 마땅하게 즐기거나 부추기면서 타락하고 있다. 훌륭한 목사들이 거룩한 의도로 목회를 시작했다가 교인들의 비뚤어진 대접을 받으면서 타락하고 멸망하고 있다. 목사를 신성화하고 우상화하는 것은 타락의 지름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목사는 가톨릭의 신부들처럼 신령한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선생과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성경을 공부하며 깨달은 것을 설교와 가르침으로 전하고 교인들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라야 한다. 목사가 그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교인은 그들의 생활비를 책임지고 공급하며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사랑할 뿐이다.
 

5) 화려한 성전

대형교회들이 호화 건물을 짓는 근거로 솔로몬의 성전을 이야기한다. 옛적 솔로몬의 성전은 화려하고 장엄했다. 그곳은 죄사함을 위한 희생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나는 극히 성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희생양이 되시고 나서는 이후 그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성전이 되었다. 이제 교회는 그런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공부하고 친교하는 장소일 뿐이다. 장소는 편리하고 쾌적하면 충분할뿐 그 이상의 화려함은 필요없겠다.

교회들이 성전건축을 시작하면 교인들은 경제적 부담을 느끼지만, 주변의 눈치와 체면을 보면서 또는 하나님이 기뻐하며 복주실까 기대하면서 어떤 경우는 빚을 내어서까지 큰 헌금을 한다. 교회는 그것을 훌륭한 믿음이라고 칭찬하지만 과연 하나님도 칭찬하실까?

불교권이나 이슬람권의 신전들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룬다. 가톨릭의 성당도 화려함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저들의 우상은 화려함과 정성을 즐거워하겠지만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 그런 것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 하나님은 심지어 헤롯 성전을 헐어버리기까지 하셨다. 물론 적대적인 이방인을 통해서였지만 하나님은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교회는 투자나 상속의 목적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 적당한 크기의 건물을 렌트해서 사용하면 어떨까? 평일에는 노숙자들이 와서 잠자고 쉬는 곳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수고와 비용이 매우 크겠지만 봉사와 헌금이 그것을 위해 사용된다면 어떨까? 현실적으로 볼 때 나 혼자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6) 십일조의 율법

교회들이 십일조로 부유해지면서 각종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맞는다면 그렇다고 십일조를 그만두자고 말할 수는 없다. 교 회들은 십일조를 안 내면 저주받는다고 설교하거나 교회의 직분을 박탈하 면서, 또는 교인들의 십일조를 묵인하면서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대부분 이 지지하고 있다.

반면 십일조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금지하는 소수의 교회들이 있다. 그 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렇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드려서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 등의 일에 전념하게 했다. 십일조는 이스라엘이 지켜야하는 율법의 하나였다.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약속을 고스란히 경험했다. 예수님도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물질로는 십일조의 율법을 지켰지만 내면적으로는 율법 정신이 없었던 바리새인들을 크게 책망하시는 말씀이었다. 아직도 구약 시대를 살고 있던 그들은 율법의 의무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면서 모든 율법은 완성되었 다. 이제 십일조의 율법은 의무가 아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AD 70년에 는 로마를 통해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성전 일을 맡았던 레위 지파는 십일조를 받을 이유가 없어지게 되었다.

여전히 십일조를 지지하는 목사들은 율법과 성전 이전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야곱도 십일조를 드렸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단 한번 행했던 것이거나 자원한 십일조였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성경은 초대교회의 교인들에게 십일조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제 교회가 헌금을 필요로 하는 것은 목회자의 사역, 교회의 관리, 구제 와 선교에 충당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정해진 액수가 아니라 교회와 교인 의 사정에 따라 달리 드려져야 한다.

나는 가난한 교회를 다닐 때는 십삼조의 분량까지도 드렸지만 부유한 교회를 다닐 때는 작은 헌금만 드리며 필요한 사람들을 직접 돕는다. 의무 인지 두려움인지 소망인지는 모르지만 생활비도 모자라 빚을 지며 사는 친구가 빚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셨던 책망을 그에게도 하실지 모른다. 은혜가 율법보다 더 귀한 것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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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옥 선교사는 서강대에서 신문방송학, 산호제바이블컬리지에서 신학, 산호제주립대대학원에서 소셜웤을 전공했다. 서울과 산호제에서 다년간 직장을 다녔고 산호제에서는 교회에서 전도사로도 일했다. 현재는 예수님과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 세상이 갖는 수많은 오해들에 대해 답변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도하고 있다.
저서 <예수신화?예수실화!>는 성경은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에서 기록된 역사서며, 예수님은 성인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변증한다. <시대읽기>는 기독교를 왜곡하거나 혼합해서 파괴하려는 반기독교적 세상의 정체와 그것의 반인륜적인 역사를 폭로한다. 이들 내용을 요약하고 추가해서 <예수는 실화다>와 <성경적 시대읽기>를 다시 출간했다. 최근 출간된 <다시살다>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개인 이야기를 간증한다. 번역서로는 <당신은 괜찮습니까?>와 <회복프라소>가 있는데 성경적 회개와 용서와 예수 안에서의 치유와 회복을 주제로 한다. joookkim@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