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철학이 대학을 장악하면서 기독교의 위기가 시작

21 세기의 교회는 다양한 문제들에 의해서 도전을 받고 있다. 그 문제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들이다. 성경 말씀에 분명하게 예고된 문제들만 해도 미혹의 문제 (마 24:3), 배도의 문제 (살후 2:3; 행 20:30), 인간의 이기적 사상과 타락한 문화의 문제 (딤후 3:1-8) 등이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은 “깨어있으라” “예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이다. 혹은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 혹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깨어있지” 않고, “예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참예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문제들이 (아이러니칼하게 말한다면) 아주 질서있게 준비되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이 글의 목적은 이 문제들의 역사적 물줄기들이 어떻게 교회 안에 들어와서 마치 기독교의 한 지체인 것처럼 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고, 교회가 “깨어 있고” “예비하는” 일들을 모색해 보고자하는 데 있다.

지난 500 년의 서구 역사를 (혹은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의 약 1 세기를 “개혁의 시기 (Age of Reformation)”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부르고 있으며, 이 시기를 지배하고 있던 주 세력은 설교자들 (preachers) 이었다고 한다. 제 2 기는 “계몽(啓蒙)의 시기 (Age of Enlightenment)” 혹은 현대주의 시기 (Age of Modernism)이라고 하며, 이 시기의 주도(主導)세력은 과학자들 (Scientists) 이라고 한다. 그 다음 20 세기를 “후기 현대주의 (Post Modernism)” 이라고 하며, 이 시기를 이끄는 지배세력은 철학자들 (Philosophers) 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단히 짧은 기간이지만 21 세기, 특히 9/11 사건 이후의 시대를 ‘탈(脫) 현대주의’ (Trans-modernism) 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은 ‘유명인사’(有名人士, Celebrities) 들이라고 한다.

포스트 모던이슴 시대의 특성은 절대 진리의 상실이라고 한다면, 트렌스 모던이슴의 특성은 비진리의 득세(得勢)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세속 역사 사상이 왜 기독교 교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간단한 결론부터 언급하면, 이 사상들이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이다. 교회 생활과 활동들과 예배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미쳤기 때문에 당연히 연구의 대상이 되며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 곧 성경에 근거한 세계관과, 인간의 사상에 근거한 세속적 세계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혹자는 곧, “인간의 사상에 근거한 세속적 세계관”이 어떻게 “기독교 세계관”에 소속할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 세계관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다루어져야할 문제가 되는 것이다.

The Rev. Dr. John Killinger

금년 (2008 년) 6 월, John Killinger 라고 하는 기독교 목사가 발언한 내용이 여러 지상에 보도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리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추진력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한사코 이에 매달리는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교리란 이제 종교적으로 볼 때 지나간 옛날의 유물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성경 말씀에 대한 견해가 변했으며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견해도 변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도 “예수는 그 분이 참례받을 때에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된 것이지,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발견하는 바와 같이 반드시 선재(先在)했던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복음의 타협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이해 (a more advanced understanding)” 를 대표하는 견해라고 했다. 계속해서 그는 “예수는 자신을 세상의 구세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그리고 아마 십자가에 처형될 때까지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Killinger 는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참 기독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 왔는가? 성서적 기독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타락 (Fall)에서 회복해야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과 같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그 말씀을 경청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세상 신학

이러한 새로운 신학에 대해서 Francis Schaeffer는 “신신학 (new theology)” 고 불렀고, James Boice 는 “세상 신학 (world's theology)” 라고 불렀다. 무오(無誤)한 성경 말씀이 아니라 세상 학문과 세상 지혜에 근거한 이 새로운 신학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교리들을 재 정의해 왔다.

첫째, “하나님은 죽었다”는 (Death of God) 신학이다. (흥미로운 것은 금년, 2008 년, 7 월호 Christianity Today 지의 표지 제목은 “하나님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쪽에서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부고(訃告)를 쓰고 있을 때, 다른 한 쪽에서는 젊은 신학자들 간에 하나님 생명의 생동력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한다).

▲ Karl Barth(1886-1968)

둘째,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 하는 것이다. Karl Barth에 의하면 성경이란 하나님의 말씀 (Word of God)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 (word of God) 에 대한 인간의 증거 (man's witness)에 불과하다.

셋째, 죄에 대한 재 정의이다. 죄란 하나님과 그의 의로운 법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 아니라, 무지 혹은 사회 구조들 속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억압들이다. 그러므로 죄란 인간들의 체제 속에 있는 것들로서 새로운 입법이나 사회 개선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 구태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속죄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 예수님에 대한 재 정의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오신 성육신의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 창조적 삶을 위한 한 모형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한 좋은 예 (example) 이지, 구원자 (Savior) 는 아니라고 한다.

다섯째, 구원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救贖)”이 아니라, 이 세상 제도들의 구속(拘束)에서의 해방으로 재정의 되었다.

여섯째, 믿음이란 더 이상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대로 받아드리는 순종이 아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보는 상황들을 아는 것 (awareness)으로 재 정의 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막스주의 (Marxism)와 근접한 사상이다. 왜냐하면 막스주의에 의하면, 공산주의는 바로 억압에 대한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발생하여 그에 대한 조치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복음전파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멸망하는 세상에 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injustice)을 전복(顚覆)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주요 교단들에선 다투어“세상 의제들 (world's agenda)”이 교회의 우선순위를 점하게 되었다. 곧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우선적으로 빈곤 (식량부족), 인종문제, 환경문제, 에너지 문제등의 해결에 있게 된 것이다. (이상 내용의 일부는 James Montgomery Boice 의 “기독교 신앙의 바탕들” 제 4 권, “하나님과 역사”를 참고한 것임)

성서적 교회들은 당연히 세상의 문제들, 곧 죄에 의해서 타락한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 해결을 성경에서 제시해 주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사람의 일” 보다 “하나님의 일”이 먼저이다 (마 16:23).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로 장사(葬事)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분명하고 언제나 일관성이 있다 (눅 9:60). 그러면 세상의 일이 먼저 우선하게 되는 데는 조금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질서 정연 (?)”하게 교회 안에 잠입하기도 하고 진군하기도 해왔기 때문이다.
 

흘러들어온 세속 세계관들

“성경의 역사적 비평” 이라는 책에서 Eta Linnemann 은 유럽의 대학교 역사에 관한 W. P. Fuchs 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Linnemann 은 현제 기독교회 안에 들어온 사상들의 비 성서적 뿌리들을 서구 문화, 특히 상아탑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 기독교회 안에 들어온 사상들은 대단히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 두어야할 필요가 있다.)

첫째, 스콜라 철학 (Scholasticism) 은 “새로운 이성적 지식을 기독교 신앙들과 합의하도록 (기독교에) 끌어 들여왔다”고 한다 (Fuchs 의 Universitat 에서) 그들은 진정한 지적 발전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이방인들의 세속적 지혜가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Linnemann 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골 2:3). 그래서 세속 철학과 (특히 아리스토틀의 철학이 과학에 의해서 대치될 때까지) 신학이 동침하게 되는 사태가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다. 그 때, “신학은 여왕이었고, 철학은 그의 시녀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몇 날이 못되어서 전에 시녀였던 이방사상은 이제 갓 출발한 대학들 안에 들어와서 주권적 권위를 획득하였다.”

두번째, 인본주의 (Humanism) 는 만물의 “결정의 기준”으로 인간을 수립하였다. 전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내용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서 배웠으나 이제는 인간들의 정신에서 나오게 되었다 (훗날, 이 사실은 Hegel 의 “세상 영 (Weltgeist)” 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정반합 (thesis, antithesis, synthesis)” 으로 정립되어 교회에 안착함). 그들은 “인간”에 대한 신분을 “땅에 속한 자도 아니고 혹은 하늘에 속한 자도 아니다. 인간은 짐승으로 전락할 수도 있고,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다. 만물은 오직 그의 의지에만 달려 있다. 그는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소유할 수 있다” 라고 말한 Picho della Mirandola의 말을 Linnemann 은 소개하고 있다. (Kurt Dietrich Schmidt 의 책, Kirchengeschichte에서).

그러나 Linnemann 은 Picho della 의 “만물은 오직 인간의 의지에만 달려 있다” 라고하는 말이나, 인간이 “하늘에도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롬 9:16).” “다른 이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Linnemann 은 “인본주의 영향 아래 기독교는 인본주의적 문화가치나 전수하고, 과학과 문화에 있어서 예절과 도덕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계몽된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고 개탄하고 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의 말씀 안에서 계시하신 지식을 부인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인간 정신의 산물인 문화가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를 대치해 버렸다고 Linnemann 은 기술하고 있다.

세 번째, 계몽주의 (Enlightenment) 는 이미 반 기독교적인 인본주의 사상에 더 첨가할 것이 별로 없다. 다만, Hobbes, Spinoza, Descartes, Kant 등은 이미 인본주의가 수립해 놓은 계획을 실행해 갈 뿐이었다.

네 번째, 독일 이상주의 (German Idealism)의Kant 에게서 절정을 이룬 계몽주의 철학은 그 후에 문학의 형태를 취하여 전진하였다. 초기 낭만주의 기간동안에 활동한 Lessing, Schiller 및 Goethe 등은 이 계몽주의 철학에서 습득한 형상으로 인간을 재 형성하였다. Hegel 의 영향으로 등장한 그의 제자들 Marx 와 Engels 등은 이제 하나님을 제거해 버린 “Frankfurt 학파”를 창설하였다. 이 모든 활동들이 독일에서는 대학교들에서 잉태되고 출산되어 왔다.

다섯 번째, 기술의 시대 (The Age of Technology). 처음에는 Humboldt 의 대학 이념과 서로 상치가 있었으나, 사실은 기술의 지적 시발점은 인본주의-이상주의자들의 교육이념과 대단히 일치하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해 버렸다. 그 당시, 대학에 몸을 맡긴 학생이면 누구나 다 무신론적 멍에를 매어야할 것이 필수 조건이 되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학문적 사상의 탐구에 금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Linnemann 은 전혀 새로운 대학 설립을 주장하고 있다. 우선 사상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대학들을 새워야한다는 것이다. 교육과 기술이 하나님 사상에 근거한 그러한 교육기관 말이다. 새로운 출발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고.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이 산은 아마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내산이겠고(민 3:1), 혹은 예수님의 변화산일 수도 있고, 승천하신 산일수도 있을 것이다(마 28:16). 우리 목회자들은 세상을 보지 말고 “산”을 보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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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윤 목사는 정태윤 목사는 미국 달라스에 있는 서남침례교회의 목사이다. 정태윤 목사는 현대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서 멀리 벗어났음을 안타까워는 목회자들과 함께 ‘복음주의 형제회’를 조직하여 매년 복음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천주교의 심각한 배도를 설명하는 데이비드 헌트의 책「짐승위에 탄 여자」을 번역하여 국내에 보급하였고, 그 외에도 「진정한 복음」,「참 복음과 거짓복음」, 「로버트 채프만: 사랑의 사도」를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