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이론의 출발은 선악과 해석이다. 선악과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능동적 순종의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생도 가지지 못했고, 임시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였던 아담을 영생하는 완전하고 영화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선악를 중심으로 하는 계명들을 주었다고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교리는 여기에서 출발하는데, 선악과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기독교 신앙 전체의 변형이 일어난다.

1)처음부터 영생을 가지지 못하였던 불완전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더 적극적인 죽음에 처해진 것이다. 원죄로 인해 아무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의 영생복락으로부터 추방된 아담의 비참한 실상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사례>
“그(아담)는 순종할 경우에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보장을 받았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베려에 의거하여 일정한 조건적인 권리를 획득했다(했을 것이다). 이 계약에 근거하여 아담은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위하여 순종의 방법을 통한 영생을 얻었다(얻었을 것이다).”(벌코프 ,「조직신학」(권수경, 이상원 역)(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7), 427.)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주의 말씀은 아담이 먹는 것을 억제했다면 죽지 않고 죽음의 가능성을 넘어서 끌어올림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 여기서 주어진 약속은 최고 상태에까지 발전된 영구적인 복락과 영광이다.”(벌코프, 427)
 

2)불완전한 상태의 아담이 선악과 계명을 범하여 완전(영화)에 이르지 못하고 저주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로 인한 인간의 ‘전적타락’, ‘전적부패’, ‘전적무능’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3)불완전한 아담에게 완전과 영화로움을 부여하기 위해 선악과 계명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아담이 계명에 순종하지 못했다고 오히려 더 저주하여 죽이셨다는 해석이 설득력이 없다.

4)구주로 오신 둘째 아담 예수께서 첫 아담의 자리에서 모든 계명을 지켜 먼저 자신을 구원받게 해야 했고, 만일 계명을 지키는데 실패했다면 그도 죽을 수 있었다는 비성경적인 사색을 동반한다. 
 


사례>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 자신 역시 구원되어야 하는 존재로서 그가 이루신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 곧 행위언약에 대한 성취인 것이죠.”(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싸이트, 2017.12.15. 노 목사의 페이스 북(2017년 12월 14일)

“이 때 칭의란 바로 그리스도 속죄를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노 목사의 페이스 북, 2019년 2월 2일)

이것은 창조주로서 잃어버린 피조물을 되찾기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훼손하는 비성경적인 사색이다.
 

5)제 2 아담이신 예수께서 첫 아담과 동일하게 선악과 계명의 시험에 통과하여 자신과 인간을 구원한다고 해야 자연스러운 전개인데, 더 이상 선악과가 없으므로 다른 근거 없는 유추에 이르게 된다.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추측, 즉 아담이 처음부터 훗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이미 받았다는 유추이다. 심지어 창조시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율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의 율법을 받기 전에 이미 그 내용을 다 알고 있었다고 유추하기도 한다.

사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그것은 율법이 마음에 새겨졌다는 것을 뜻합니다.”(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5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율법을 마음에 새겨주셨습니다.”(프롱크, 257)

“아담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율법은 사람의 친구였습니다. 아담은 율법을 바라볼 때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사랑했습니다.”(프롱크, 26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시내산에서의 율법조차도 이스라엘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 율법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차이는 돌판에 새기셨다는 것입니다.”(프롱크, 258)


6)성경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들기 위해 율법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선악과에 대한 이 해석을 취하면, 율법은 인간에게 직접 구원을 줄 수 있는 능력과 기능을 함께 동반하고 온 것이 된다.

사례>
“율법은 조건적인 구원을 약속합니다. 오직 율법에 완벽히 순종할 때에만 우리는 영생을 얻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프롱크 259)


7)성경은 단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전도하라고 한다. 그러나 선악과에 대해 이 해석을 취하면 반드시 먼저 율법을 전해야 한다. 먼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저주의 율법을 전해야만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신다고 한다.

사례>
“우리의 마음과 양심에 하나님의 율법을 적용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율법을 사용하여 우리의 죄와 죄책을 드러내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만 우리 마음에 복음을 위한 자리가 생깁니다.”(프롱크, 175)


8)선악과에 대한 이 해석을 취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서 일으키는 변화는 죄와 저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즐거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삶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처음 아담에게 주신 율법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사례>
“복음은 죄인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어떻게 회개가 일어납니까? 그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금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시고, 우리는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입니다.”(프롱크, 264)


9)성경은 하나님을 배반한 아담과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께서 대신 짊어지시고 피 흘리심으로 죄와 사망이 떠나가고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악과에 대한 이 해석을 취하면 계명 준수에 실패하여 죽은 첫 아담을 대신하여 계명 준수에 성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으로 둔갑된다.

사례>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한 모든 계명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자신의 죄의 짐을 느끼는 죄인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프롱크, 268)

 

10)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신 죽으심이 우리의 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선악과에 대한 이 해석을 취하면 모든 율법에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여겨진다.

사례>
죄인은 자신의 대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 죄인에게 전가됩니다.(프롱크, 236)

 

지금까지 간략하게 요약한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능동적 순종의 의’와 ‘수동적 순종의 의’로 구분하는 구원론이다. 이론적으로는 율법의 의와 십지가의 의, 둘로 나누어 반씩 강조하는 것 같으나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약화되거나 사라지는 특징을 보인다.

실제로 능동적 순종의 의를 강조하는 분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동일하게 강조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이것이 능동적 순종의 의, 수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신학의 열매이다. 심지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공로로 구원얻음이라는 기독교의 이신칭의를 회복한 종교개혁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를 수립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례>
“노승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는 신학 뽀개기’. 종교개혁 신학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중세 신학의 오염을 치료하는 키워드로 썼습니다.”(노승수 목사, 2월 3일 페이스 북)

 

다음에는 왜 선악과와 원죄의 본질을 완전한 하나님 백성으로 지어진 아담이 하나님 섬김에 대한 거부의 표시로 해석해야만 기독교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바르게 설명되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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