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정이철 목사님, 우리 목사님은 설교 중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에 대해 자주 말하는 편입니다. 설교 중에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하도 좋은 말을 많이 들어서 에드워즈는 흠 잡을 데가 없는 성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로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올리시는 글을 보고 에드워즈라는 사람에게 문제가 많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에드워즈를 특별히 좋아하는 우리 목사님이 방언 기도를 하는데, 에드워즈도 방언 기도했을까요? 방언 기도를 하는 우리 목사님이 혹시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방언 기도에 대해 배우고 도전을 받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질문드립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방언 기도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한 마디로 말해, 에드워즈는 방언과는 완전히 무관합니다. 특히 방언 기도와는 바늘 끝 정도의 연관성도 없습니다. 에드워즈는 방언은 사도들의 시대에만 잠시 존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성경의 방언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은사로 보았지,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은사로 보지 않았습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에서 방언과 예언, 그리고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거나 소경이었던 사람을 치유하는 특별한 성령의 이적들은 같은 영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에드워즈가 방언, 예언, 사도 시대의 성령의 특별한 이적들을 하나로 분류하여 본 이유는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성령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을 증거하는 방언, 예언,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의 특별한 성령의 이적 등이 일어났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는 그 사명을 다한 특별한 성령이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이론을 은사중지론이라고 합니다. 에드워즈는 사도들의 시대의 방언, 예언, 특별한 성령의 이적들을 교회를 세우기 위한 특별한 사도시대의 은사로 보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는 은사중지론자였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를 꼭 은사중지론자로고만 분류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성령을 받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기존의 신자에게 성령이 또 다시 임하는 현상을 특별하게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는 그런 현상을 성령의 ‘신적인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임할 때에 신자들은 성령에 압도당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쉽게 말해서 신자들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몽롱한 상태로 두러누워서 시간을 보내며 황홀경을 체험하는 소위 ‘입신’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드워즈가 성령의 ‘신적인 빛’이라고 강조했던 현상은 이후 오순절 운동에서 성령(재)세례로 등장했고,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으로 확장되어 되풀이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방언과 예언을 말하지 않는 초기 단계의 성령세례 운동가였던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강조했던 성령의 신적인 빛이 임하는 모습은 현대의 신사도 운동 집회에서 기름부음이 임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오순절 운동의 선구자이고 동시에 신사도 운동의 조상이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 차원에서 보면 에드워즈는 은사지속론자입니다.

에드워즈는 계시가 내포된 방언과 예언, 그리고 성령의 특이한 이적들이 사도시대에만 국한된 성령의 역사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날 에드워즈를 존경하면서 동시에 방언 기도하고, 예언하는 은사를 추구하거나 실행하는 사람은 소위 에드워즈의 광팬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방언, 예언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졌는지 그가 한 말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방언, 신유, 예언 등과 같은 특별하고 이적인 성령의 은사들이 부여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부어졌습니다. 요엘의 예언에 따라 사역자들만이 아니라 젊은이나 노인을 망라한 세계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을 부여받았고, 관리와 지체 높은 자들이든 종이나 하녀 같은 비천한 부류의 사람들도 차별 없이 은사를 부여받았습니다 ... 그리고 이것은 사도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곧 그리스도가 탄생한 후 백 년 동안 괄목할 만하게 지속되었고, 그러기에 그 시기는 이적의 시대로 불립니다.(에드워즈가 1739년에 했던 설교. 1774년「구속사」로 출판)1)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방언과 예언이 사도들의 시대에만 존재했던 특별한 성령의 은사라고 보았고, 약 100년 정도 교회에 존재하다가 사라졌다고 보았습니다.

“사도는 저 영감의 은사들은 신적 사랑 안에 있는 성령의 은사와 비교할 때 유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은사들은 단지 초대 교회를 돕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서, 교회가 항존직 규칙들을 온전히 수립하고 은혜의 일반적인 수단들이 확립될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어린 아이 상태를 벗어나 성숙해지면 그런 은사들은 그칠 것이며 장성해지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 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기독교회가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장성해짐에 따라 예언과 방언과 계시가 그치고 사라져 갈 것이라고 말할 때, 사도는 천국에서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장성해진다는 점을 염두해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에드워즈가 1741년 예일대 졸업식에서 했던 설교. 1741년「성령의 역사의 분별 방법」으로 출판)2)

에드워즈는 성령의 영감과 관련된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지상에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 속에서 필요했던 한시적인 은사로 보았습니다. 교회가 성숙해지면 자연히 사라지는 은사라고 이해하고 가르쳤습니다. 교회가 온전해지고 성숙해진다는 것은 성경 66권이 주어지고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의 조직이 갖추어지는 것과 관련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가오는 교회의 영광스러운 시대에 이 이적적인 은사들이 회복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 은사들이 그 시대의 영광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영광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라면 일 년 내내 예언적 환상과 계시를 맛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15분간이라도 성령의 달콤한 은사를 즐기겠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적이고 신성한 아름다움, 무한한 은혜, 그리고 죽기까지 하신 사랑을 보여주고, 믿음의 거룩한 활동, 신적 사랑, 감미로운 만족,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겸손한 기쁨을 이끌어 내는 그 영향 말입니다.”(1741년 예일대 졸업식 설교. 1741년「성령의 역사의 분별 방법」으로 출판)3)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이미 사라진 방언과 예언이 다시 회복되는 일을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자신은 성령의 영감으로 말미암은 방언이나 예언을 경험하는 것보다 단 15분이라도 ‘성령의 달콤한 은사’를 즐기는 편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성령의 달콤한 은사는 특별한 ‘성령의 임재체험’입니다. 에드워즈는 성령이 임하여 특별한 감각적인 방식의 성령체험이 이루어지는 것을 표현할 때에 자주 ‘성령의 달콤함’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성령의 ‘신적인 빛’이라고도 자주 표현했습니다. 사실은 신자의 몸에서 기운이 빠지고, 환상을 보고, 천국의 황홀경을 체험하는 오순절 운동 집회의 성령세례, 그리고 신사도 운동 집회의 성령의 기름부음 현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더 완전한 교회의 신앙은 주로 자비와 신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지식, 방언 및 예언이 폐하고(고전 13:8) 하나님의 교회에서나 은혜로운 영혼 속에서 이 거룩한 감정들이 더 고양될수록 교회나 특정한 영혼의 상태는 그만큼 더 탁월하고 완전해지는 것입니다.”(1742년에 출판한 「균형잡힌 부흥론」에서)4)

에드워즈는 교회가 세워진 후 방언, 예언과 같은 성령의 영감으로 비롯되는 계시적인 은사는 사라지고, 대신 거룩한 ‘종교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성령체험으로 신자들의 영혼이 성화된다는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대각성 부흥을 통해서 일어나는 괴상한 성령의 역사, 즉 괴이한 신체적 현상을 동반하는 성령체험으로 신자들에게서 거룩한 감정이 일어나고 성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영적 교만의 문제로 돌아와 말씀드리자면 영적 교만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외양에 있어서 독특성을 과시하게 만듭니다. 독특한 방식으로 말한다든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방언을 쓰게 한다든지, 독특한 음성으로 말을 한다든지, 표정이나 행동을 독특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1742년에 출판한「균형잡힌 부흥론」에서)5)

이 내용은 에드워즈가 부흥을 훼방하는 교만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을 열거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많지 않았을지라도 어느 시대에나 방언하는 사람들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칼빈의 시대에도 소수의 방언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교리문답서에 알지 못하는 말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명시했고, 웨슬리의 청중 속에도 방언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에드워즈 시대의 뉴잉글랜드에도 방언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던 모양입니다.

특이한 사실은 에드워즈가 방언하는 사람을 부흥을 훼방하는 교만한 사람으로 간주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하여 원수들이 부흥을 훼방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특징들 중 하나가 방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원문을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프랑스 어나 인디언들의 언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을 영적으로 교만하다고 보는 것은 비상식적이므로 에드워즈가 거짓 방언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을 영적으로 교만하다고 보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현재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역사하심에 매우 해를 미치는 잘못된 것 하나는 오늘 날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계시나 영감(inspiration)으로 성도들을 인도하여 주신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오류를 보호하여 주고 계속 지지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 인도되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잘못된 행실로부터 벗어나고 변화되지 못할 것이다.”6)

에드워즈는 성령이 직접주시는 메시지가 내포된 방언이나 예언이 지금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신앙이 변질될 것이고, 그런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어리석은 행실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저 외에도 에드워즈의 신학과 부흥을 연구한 저명한 학자들이 에드워즈가 방언이나 예언처럼 성령의 직접적 계시를 전달하는 은사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신학과 부흥에 대해 연구하여 750 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저서를 낸 양낙홍 교수는 에드워즈가 사도시대의 성령의 영감을 부정했고 대신 ‘성령의 조명’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설명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영적 조명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져 있는 진리를 부각’시킬 뿐 성경에 없는 새로운 어떤 새로운 진리나 명제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새로운 진리나 교리를 제시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받았던 영감(inspiration)이다. 에드워즈 당시 어떤 광신자들이 그러한 영감을 받는 척했다. 그러나 신령한 빛은 그러한 영감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하나님, 그리스도, 내세에 대해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어떤 새로운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게 해 줄 뿐이다.”7)

총신대 신대원 이상웅 교수도 에드워즈가 방언이나 예언처럼 성령의 영감으로 비롯되는 은사를 거부했고, 이미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게 만드는 성령의 조명을 인정했다고 설명하면서 에드워즈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습니다.

“성령의 조명은 어떤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시 없이 단지 마음으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며 이미 주어진 계시를 적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에드워즈)8)

에드워즈는 성령의 ‘신적인 빛’이라는 미명하게 거짓된 성령의 임재체험을 높임으로 현대의 오순절 운동의 성령(재)세례,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의 조상이 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방언과 예언을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에드워즈가 거짓된 성령의 임재체험을 교회에 끌어들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하고, 몸을 제압하고 압도하는 마귀가 영적인 폭력으로 신자들을 유린하게 만든 심각한 오류를 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방언과 예언의 병폐가 에드워즈에게서 비롯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 미주 ---
1) 조나단 에드워즈,「구속사」(존 스미스 편집, 김귀탁 역)(부흥과 개혁사, 2015), 475.
2) 조난단 에드워즈,「부흥론」(고언 편지, 양낙홍 역)(부흥과개혁사, 2009), 363.
3) Ibid., 364.
4) Ibid., 393.
5) Ibid., 558.
6)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1. 404. Iain H. Murray, Jonathan Edwards: A new Biography (Calisle, P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6), 243.
7) 양낙홍,「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부흥과개혁사, 2017), 191.
8) 이상웅,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부흥과개혁사, 2013), 395.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