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소위 퀴어 신학은 비교적 근자에 나타난 신학적 논의로서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아주 극단적으로 여성신학적이고, 포스트모던적 해체주의적인 신학적 활동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살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잘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퀴어신학은 정통적 기독교의 주장과 정통적 기독교 신학과는 그야말로 대체적인 입장에서 신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엄밀히 말하면, 이는 기존의 기독교와 기존의 기독교 신학을 대체하려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정통적 기독교와 정통신학에 대립하여 서는 주장인 것이다. 퀴어 신학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신학은 “백인적이고, 남성적이며, 유럽적이고, 이성애적인 신학”이라고 한다. 즉, 전통적 신학이 이런 편견 속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신학이 다 상황적임을 인정하면서 이제 성적인 정향에 대해서도 상황화된 논의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 퀴어 신학의 주장이다. 특히 ‘퀴어 사람들’(queer people)의 경험에 비추어서 전통적 기독교를 재검토(re-examine)하고 재편성(reframe)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퀴어 신학은 이제 우리가 기독교의 잠정성(provisionality)을 참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제는 ‘퀴어 사람들’의 다름과 이상함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해 준 것을 생각하면서 전통적으로 “정상적”이라고 하던 것과 “건강한 것”이라고 하던 것을 극복하고 넘어서며, 결국 전통적 기독교 자체를 극복해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정도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자연적인 형태는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정통적 기독교 밖에 있다고 하거나 적어도 정통적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새롭게 하려는 주장의 하나라고 해야 한다.

사실 퀴어 이론가들은 마치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와 같이 ‘퀴어’라는 것이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퀴어적인’ 것은 “그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계속 어떤 것을 부정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퀴어 신학은 항상 성경에 근거해서 자신을 명확히 하려는 정통적 기독교와 같이 서 있을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이것은 퀴어 신학을 주장하는 분들이 더 잘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논의도 신학적 논의의 하나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기독교에 대한 명확한 입장이 있지 않고, 각기 자신들이 반응하는 대로 예수와 관여하거나 하나님과 관여하면 된다고 하는 입장을 가지는 태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퀴어 신학은 성경에 대해서, 심지어 하나님께 대해서도 상대적 입장을 취할 때만 허용될 수 있는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통주의 입장에서는 퀴어 신학은 바른 기독교 신학이라고 할 수 없다. 오직 성경을 상대적으로 여기는 입장을 가지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이것도 있을 수 있는 신학적 논의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퀴어 신학을 인정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결국 성경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에 달린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정통 신학의 입장에서는 퀴어 신학은 바른 신학적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절대적 하나님 대(對) 퀴어 하나님

그 결과, 퀴어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정통신학이 말하는 하나님 이해와 상당히 다르다. 대개 퀴어 신학자들은, 오랜 신비주의 전통을 언급하면서, “인간이 사용하는 은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므로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서 최종적인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서는 ‘퀴어 신학’은 결국 ‘퀴어 하나님’(queer God)을 요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하며, 현상 유지(status quo)의 신학자들의 ‘닫힌 곳에서 나오실’(come out할) 필요가 있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퀴어 신학자들도 때로는 삼위일체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의미가 정통신학의 의미와는 상당히 다르다. 심지어 어떤 퀴어 신학자는 삼위일체는 “세 사람이 동성애적 관계를 하는 것”(gay, sexual threesome)을 표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사실 이것은 퀴어 신학자들이 잘 알고 있고, 사실 정통적 하나님 이해를 바꾸어 보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주장이다. 어떤 퀴어 신학자는 신비주의 전통에 천착하면서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신이 되는 것이라고 까지 한다. 그러니 정통신학이 그들의 신학과 신앙과 삶으로 섬기고자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퀴어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아주 명백히 드러난다. 이것은 절대적인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의 문제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인간과 죄에 대한 이해의 대립

정통신학의 인간 이해와 퀴어 신학의 인간 이해도 다르다. 그래서 정통신학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 자신들의 죄로 그 형상을 일그려 뜨렸고 동성애도 그런 죄의 하나라고 보는 데 비해서, 퀴어 신학에서는 동성애가 죄가 아니고 정당한 사랑의 표현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성애가 정상적이라고 하는 것이 변태적인 주장이고 이데올로기적 질서이므로 우리는 과감히 그것을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데서 모든 수정주의 신학의 모습과 같이 전통적 용어를 다 뒤집어 사고하는 그들의 사고가 나타난다. 다른 데서는 이성애가 정상이고 동성애가 변태적이라고 하는데 비해서, 이들은 동성애를 변태적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변태적인 사고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퀴어 신학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양성을 다 가진 사람들’(intersex people)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근거해서 그들은 “우리가 인간의 성은 심지어 생물학적인 수준에서도 단순하거나 그저 두 가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퀴어 신학에서는 정통신학과는 다른 의미에서 인간의 몸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몸을 떠나서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표현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우리네 인간도 동물이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몸을 강조하는 퀴어신학에서는 성 관계를 포함하여 인간의 몸으로 하는 상당히 많은 것을 성례전적인 것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몸으로 하는 이런 경험의 장이 하나의 “영적인 실천”(a spiritual exercise)이며, 바로 신적 계시의 장이라고도 표현하려고 한다. “성적인 사랑, 에로틱한 사랑이 결국은 우리를 넘어서 타인을 참으로 끌어안는 것이 되며, 에로티시즘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그리고 그 성적인 사랑에 동성애적인 것이 아무 차별 없이 다 포함된다는 것이다.

정통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지가 구속이 동성애를 비롯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참으로 믿으면 동성애를 비롯한 죄에 대한 형벌에서 주께서 자유하게 하셨을 뿐만 아리라, 그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원칙적으로 자유롭게 하셨고(확정적 성화 또는 단정적 성화, definitive sanctification), 또한 계속해서 자유롭게 하여 가시기에 (점진적 성화, progressive sanctification), 주님의 구속사역에 근거해서 동성애를 비롯한 죄의 권세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퀴어 신학은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하며, 그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나 성령님의 능력이 이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할 필요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이 그런 식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끝까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이런 주장은 정통적 기독교의 인간 이해와 죄 이해와 상당히 대립적인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