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단들과 조용기, 문희곤, 하용조 목사의 사역이 지닌 결정적인 문제는 행위구원론을 퍼뜨리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이신칭의’ 교리는 사라지고 다시 로마 가톨릭이 주장한 행위구원론이 한국교회를 뒤엎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교리적으로 전혀 검증 되지도 않고, 심지어 명백히 문제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가 선하다 하여 칭송되는 경우가 많다. 올바른 교리가 무너지고, 한국교회의 신학이 반펠라기안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존경할만한 신앙인이면 그들이 교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는다. 이들이 좋은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그들의 행위를 보고 판단한다. 한국교회 설교 강단에서 외치는 이들에 대한 존경의 근거는 오직 ‘행위’이다. 특히 권세의 자리를 버리고 오지로 들어가 약한 자들을 도운 사람들의 삶은 모든 것을 다 덮어 두고 존경하고 찬미한다.

사실 ‘내려놓음’이나 ‘권리포기’ 사상은 성경적 도움 없이도 가능하다. 이런 종류는 교리적이지 않아도 된다. 사실 법정의 ‘무소유’와 다를 바 없다.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의 삶이 한국 교계에서 그토록 회자되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는 설교 시간에 이태석 신부의 영상까지 보여 주며 그를 찬양하였다. 이태석 신부의 무엇을 보고 그리하였는가? 물론 그의 봉사는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기 부족함이 없지만, 그의 행위만을 보고 강대상에서 칭송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는 힌두교인들이 더 나은 힌두교인들이 되도록 돕고 무슬림이 더 나은 무슬림이 되도록 돕고 가톨릭 신자가 더 나은 가톨릭 신자가 되도록 도와야 한다.”(마더 테레사)

마더 테레사는 어떤가? 그는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정한 여인이다. “우리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그분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라고 말하는 만인 구원론자였다. 그녀는 어떤 종교에 속했건 인간은 죽는 순간 하나님 아비지 품으로 간다고 믿었다. 한국교회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헨리 나우웬은 또 어떤가? 그도 로마 가톨릭 사제이며, 만인 구원론자였다. 하버드대학의 교수 자리를 버리고 토론토의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정신박약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였던 천주교 사제였다.
 


그의 외적인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을 존경하는 태도가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다. 무엇을 믿느냐? 어떻게 믿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의 삶이 이들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삶이 그리스도와 비슷해 보인다면 이들이 설령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더라도, 반펠라기안의 신학으로 무장된 행위구원론자일지라도, 부활을 믿지 않을지라도, 기독교 신학과 합치될 수 없는 로마 가톨릭 신부일지라도 덮어놓고 본받고자 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믿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경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한국교회에는 반펠라기안이 득세하여 이미 행위구원론이 대세가 되었고 ‘믿음에 의한 구원론’은 사실상 폐기처분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앞날을 내다 볼 때, 한국교회의 상당한 부분이 ‘온누리화’ 되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한국교회는 이미 로마가톨릭의 신학인 반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에 의해 장악되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앱 6:11-12)

사실 한두 번의 경각심으로 반펠라기우스주의에 항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반펠라기우스주의가 무차별적으로 확산된 것은 성도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귀의 궤계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무지하면 악한 무리들이 처음에는 성경의 일부를 왜곡하지만 나중에는 성경 전체를 왜곡한다. 그 책의 내용이 성경을 전반적으로 왜곡하여도 그 책이 한국 기독교 서적의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래도록 진열되어 있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온누리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특별히 개혁교리를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비록 세미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끊임없이 교리의 무의미함을 설교할 것이지만, 개혁교리를 가는 곳 마다 외쳐야 한다. 지금은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을 대항하여 외쳤던 외침을 다시 외쳐야 하는 시대이다.

로이드 존스는 로마 가톨릭을 ‘마귀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고 단언했다. 로마 카톨릭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된 체제였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배교 체제’라고 단언했다. 개혁주의 목사들이 로마 카톨릭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이 보이면서 결국 다른 신을 섬기게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맏아들임을 믿으며, 마리아의 처녀 잉태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으며, 예수님의 기적도 믿고, 십자가의 대속도 믿고, 그분의 육체적 부활도 믿는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두려운 존재들이다.

성도들이 피상적으로 살펴본 결과 천주교의 가르침이 성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적으로 민감해야 할 영적군인을 무장해제 시켜 놓는 것이다. 영적 트로이 목마와 같다. 로마 가톨릭이 저주 받아 마땅한 이유는 ‘첨가물’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 첨가물로 인해 그들의 사상은 전적으로 성경적인 것에서 이탈하였다. 이들은 음식 속에 치명적인 독을 타 놓았다. 그 양이 매우 적으므로 곧바로 죽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죽게 될 것이다.

지금 개신교 안에서 부는 바람은 로마 가톨릭과 매우 비슷하다. 성경의 진리들을 다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반펠라기우스주의이다. 인간의 차원에서 ‘은혜 받을 만할 것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마음의 밭을 ‘갈아 놓으라’는 것이다. 마음속의 ‘컵을 뒤집어 놓아야’ 은혜의 단비가 내게 담겨진다는 것이다. 예배를 ‘철저히 준비해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쓴 뿌리를 치유 하라’는 것이다. 오늘 은혜 받기를 ‘결단’하라는 것이다.

이것들이 반펠라기우스주의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기 이전에 인간적인 방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 내리려고 하거나 최소한 인간 편에서 은혜 받기 쉽게 만들어 놓으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또한 자기들이 지금까지 ‘지속적인 계시’를 받아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비해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은 ‘계시는 신약 성경과 함께 종결’되었다고 말한다. 로마 가톨릭은 주저함 없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길’이라 말하며 계시들을 첨가한다.

이것이 로마 가톨릭이 해온 기만이고, 그 결과 성경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직통 계시 같은 것은 과거에는 프로테스탄트에게는 이상한 소리였지만 현재 많은 선교단체, 오순절적 교회 등에서는 동일한 소리가 들린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전도단이나 온누리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신학보다는 로마 가톨릭 신학과 더 가까울 것이다. 정직하게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이 사도직을 계승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사제들은 교회에서 훈련받은 자들로서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 받은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은 사제들이 독특한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신사도 운동이 여러 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로마 가톨릭 신학과 다를 바가 없다. 한국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과 닮아 가고 있다. 특히 설교자의 설교가 닮아 간다. 참된 복음의 제시가 없이 윤리적, 도덕적 설교에서 신비적 설교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이기에 거짓말 하면 안 되고, 남에게 사기 치면 안 되고, 친절하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한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와중에서도 십일조를 했더니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고 하거나, 또 다른 사람은 병중에 있었는데 기도로 치유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설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회개와 칭의에 관해서는 거의 울려 퍼지고 있지 않다. 로마 카톨릭이 사단의 걸작품인 이유는 성경적인 것 같지만, 그 끝을 확인해 보면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중심, 즉, 반펠라기우스적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본주의이고, 행위구원론이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이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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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