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즈가 남긴 글 등의 자료를 더욱 보강하였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나는 대로 구체적인 자료들을 더 보강할 것인데, 이제 미국과 한국의 <바른믿음 아카데미>를 위해 떠나야 할 시간이 되어 당분간 못하겠습니다. 에드워즈 부흥은 17세기 판 빈야드 부흥이었다고 말해도 아주 틀리지는 않습니다. 에드워즈 부흥을 무조건 감싸면 빈야드-신사도 기름부음 사상을 수용하여야 합니다. 심각한 면을 감추고 좋은 부분만 부각하여 우상으로 만드는 것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에드워즈 전문가로 명성을 얻으므로 어떤 면에서 속임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740-42년에 일어난 에드워즈의 2차 부흥, 즉 역사에 ‘1차 대각성’(the First Great Awakening)이라고 명명된 부흥에 대해 알아보자. 그 동안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일어난 1차 대각성의 밝은 면들을 소개하는 수많은 책들과 자료들이 쏟아졌다. 대부분의 에드워즈 관련 자료들은 에드워즈에 대한 엄청난 칭찬과 존경심을 유발하는 내용을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1차 대각성 속에는 이해할 수 없는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이상하게도 그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는 자료들은 거의 없다. 에드워즈의 1차 대각성 중에 일어난 거짓 부흥의 요소들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 왜 그럴까? 에드워즈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탄이 장난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모든 일들이 성령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찬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또 다른 범죄이다.
 

조지 휫필드의 순회설교

1차 대각성은 영국에서 건너온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71-1170)가 에드워즈의 교회에서 설교함으로서 시작되었다. 당시 휫필드의 설교가 뉴잉글랜드 지역에 미치는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휫필드의 설교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있다. 휫필드가 에드워즈가 사는 노스햄프턴에 오기 전에 보스턴에서 설교할 때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들었다. 결국 건물이 붕괴되었고 다섯 명이나 죽는 재앙이 발생했다. 그 정도로 휫필드의 순회설교의 인기는 높았다. 

에드워즈는 비교적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설교하였다. 손동작도 거의 없이 설교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힛필드의 설교는 대단히 웅변적이었다.  화려한 손동작이 매우 멋있어서 청중의 관심을 강력하게 사로잡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휫필드가 어디에서 설교한다고 알려지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마차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로 인해 길거리에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휫필드는 1740년 10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에 에드워즈의 교회에서 설교했다. 그날 밤에도 에드워즈 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 다음 토요일 오후에도 에드워즈의 교회에서 설교했고, 다음 날 주일에는 두 번이나 에드워즈의 교회에서 설교했다. 에드워즈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고, 특히 에드워즈의 얼굴은 눈물로 흥건하게 젖었다. 휫필드가 떠난 후의 상황을 에드워즈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 일이 있고 바로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을 대화의 소재로 삼기 시작하며 영적인 일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신앙 목적의 모임에 더 열심을 내었고, 설교를 듣기 위해 더 부지런히 모이기 시작했다. 부흥은 이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구원의 상태에 머물기 원하는 사람들, 즉 휫필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먼저 자신들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젊은이들에게서 일어났다.” 1)
 

또 시작되는 괴이한 현상들

휫필드의 설교를 통해 에드워즈가 섬기는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부흥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1734-35년의 1차 부흥의 때와 만찬가지의 광신적인 현상이 또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나이가 어린 청소년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몸에 임하는 성령의 감동(?)이 넘쳐서 녹초가 되어 기진맥진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에드워즈는 어떤 신자의 집에서 청소년들에게 설교하였는데, 성령의 임하심이 너무 강력하여 온 몸의 ‘힘이 빠지고 녹초’가 되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밤에는 설교를 하지 않았으나 그 청소년들이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집으로 가지 못하고 그날 밤을 그 집에서 보내야만 했다. 2)

과연 이런 현상이 성령의 역사일까? 사도행전의 부흥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었던가? 성령(?)이 임하여 온 몸의 힘이 빠지고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지 않아 그대로 누워있는 모습은 빈야드 집회에 수 없이 나타났던 현상이다.  성령은 못 움직이는 환자도 고쳐서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 아닌가? 대체 어느 나라 기독교의 이상한 성령이 이러한 일을 한다고 하던가?

사도 요한이 성령이 이끄심으로 천국 보좌 환상을 본 후에 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다. 우리에게 천국을 알려주시기 위해 죄인으로서는 볼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요한에게 보게 하시는 초자연적인 일로 말미암아 요한의 몸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특별계시 체험은 사도들 이후 그 누구에게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대체 왜 에드워즈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괴이한 현상이 나타났을까? 에드워즈의 이 부분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빈야드 집회를 비판하였던 것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에드워즈는 17세기 판 빈야드 운동가?

얼마 후 에드워즈는 17세 이하의 소년들의 모임을 인도했다. 그때에도 소년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 그곳에서도 마치 어린애들이 집에서 떼를 쓰면서 우는 것처럼 우는 이상한 울음’을 보였다.3) 성령의 감화가운데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았던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로 보기에는 어색 모습이었다.  그 당시의 모습에 대해 에드워즈가 남긴 기록을 그대로 옮겨보자.

"So that the whole room was full of nothing but outcries, faintings and such like."4) (그래서 괴상한 울음들과 실신하는 등의 현상들이 방안에 가득해졌다)

청소년들에게서 '비명에 가까운 발작적인 울음 현상들''실신하는 현상들'이 나타났고, 그 유사한 종류의 다른 괴이한 현상들이 온 방안을 가득 채웠다는 것이다. 그해 여름에 에드워즈는 16-26세의 청년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말씀을 전했다. 그때에는 더욱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누구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Many seemed to be very greatly and most agreeably affected with those views which excited humility, self-condemation, self abherrence, love and joy: many fainted under these affections."5)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아 흥분된(?) 겸손, 자기 정죄, 자기 혐오, 사랑(?), 기쁨(?)에 빠졌다. 그리하여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신(입신?)하였다.)

그곳에 모여 에드워즈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극도로 '흥분된 겸손', '자기 정죄', '자기 혐오' 감정이 풍성하게 나타났고, 동시에 '실신하여 황홀경'에 빠지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자리의 성령이 마약에 취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 부분에서 역사학자 조지 막스덴(George marsde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모임에서 시작된 황홀경 체험 현상은 곧 주일예배로 퍼졌다. (주일 예배의 회중 속에서도) 비명에 가까운 울음이 나타나서 예배를 가득 채웠고, 어떤 사람들은 예배 후에 남아서 실신하여 황홀경을 맛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괴상한 전염병이 퍼지는 것 같이 기도하고 찬양하였다."6)

주일 예배에까지 괴상한 울음과 정신을 잃고 입신에 빠지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성령의 부흥이었을까? 그때 그곳에 내린 성령이 마약에 취하지 않았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무렵에 에드워즈는 또 다른 개인의 집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 설교하였다. 그때에도 또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에드워즈가 직접 기록한 내용을 보자.

"It was a very prequent thing to see an house full of outcries, faintings, and convulsions(격련, 진동, 괴이한 웃음이 터지는 것) and such like , both with distress, and also with admiration and joy."7) (괴이하게 울부짖고, 실신(입신)하고, 몸이 진동하는 현상과 고뇌와 극도의 행복감이 교차하는 등의 현상이 온 집안에 가득 찬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대체 1741년 부흥 당시에 마약 먹은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많았으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었을까? '비명 같은 울음', '실신이나 입신', '몸의 진동이나 괴이한 웃음보가 터지는 현상''그 비슷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마약에 취한 성령의 장난이 아니라면 과연 이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 이 무렵의 상황에 대한 에드워즈가 직접 남긴 기록을 보자!

"It was pretty open, so that there were some that were so affected, and their bodieds so overcome, that they could not go home, but were obliged to stay all night at the house where they were."8) (성령(?)에 의해 몸이 압도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일이 흔했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집으로 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다.) 

에드워즈는 친구에서 보낸 편지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이와 같이 언급했다.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현상 등이 나타났다고 기록하였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서 밤새도록 누워 있었다는 것이 정상적인 일인가? 이것이 훗날 빈야드-신사도 집회에서 수 없이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에드워즈의 집회에서 나타났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면 무엇인가? 베뢰아 출신 장경동은 안수하여 사람의 몸을 마비되게 하는 괴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에드워즈는 안수하지는 않았으나 본질적으로 괴상한 성품의 성령의 역사라는 면에서 무엇이 다를까?

부흥은 노스햄프턴 인근의 도시들로 번지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교인 수가 많이 증가했다. 인근의 서필드, 하트퍼트, 노스스토닝턴, 보스톤, 힝엄, 플리머스, 미들즈버러 등 여러 도시에서 교인들의 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그런데 동시에  괴상한 성령에 압도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은 점점 많아졌다. 에드워즈 외의 다른 설교자들의 집회에서도 괴이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1741년 5월, 조나단 파슨스(Jonathan Parsons) 목사가 설교하는 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괴이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조나단 파슨스가 직접 남긴 글을 보자

"Under this sermon ... so that the joints of their loins were loosed, and their knees smote one against another. Great numbers cried out ... Several stout men fell as though a cannon had been discharged; a ball had made its way through their hearts. Some young women were thrown into hysteric fits."9) (이 설교를 할 때 ... 그들의 다리의 무릎에서 힘이 빠졌고, 무릎이 떨며 서로 부딪혔다. 많은 사람들의 기괴하게 부르짖었고 ... 건장한 남자들은 대포 알에 맞은 것처럼 쓰러졌다. 어떤 젊은 여자들은 괴상하게 떨면서 발작하였다.) 

파슨스는 자신이 설교하자 ‘허리에 힘이 풀리고 두 무릎이 부딪히는 현상’, ‘건장한 남자들이 대포에 맞은 듯이 거꾸러지는 현상’, ‘여자들이 흥분하여 몸이 진동하는 현상’ 등이 나타났다고 한다. 누가 이런 일을 그 지역에 끌어들였었던가? 위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또 다른 순회설교자 파슨스(Parsons), 횔녹(Wheelock), 포머(Pomeroy) 목사가 설교하였던 곳에서도 다음과 같은 모습들이 나타났다. 10)

'비정상적인 울부짖음이나 웃음(기쁨)'
'몸의 진동'
'극도의 흥분상태'(rages)
'사로잡히고 마비됨'
'실신 또는 입신'

이런 일을 일으키는 거짓 영을 그 지역에 끌어들인 사람이 누구였던가? 위대한 칼빈주의자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다른 사람이 이런 일을 먼저 시작한 적이 없었다. 


에드워즈의 설교를 듣고 쓰러지는 사람들

그 무렵 에드워즈가 직접 설교하기 위해 엔필드(Enfield)로 갔다. 그러나 그곳의 부흥(?)의 열기는 너무나 뜨거워서 이미 완전히 난장판으로 변해있었다. 사람들은 상식을 잃고 짐승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에드워즈가 설교를 시작하니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일시에 거꾸러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너무나 커서 설교를 지속할 수 없었던 에드워즈는 설교를 끝내지 못하고 마무리해야만 했다.11) 성령이 역사하면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짐승같이 변하는 것인가? 그런 성령이라면 온 인류가 거부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대체 에드워즈의 이런 모습과 빈야드 집회를 이끈 사탄의 사람들의 모습은 무엇에게 크게 다를까?

 

망나니 제임스 데이븐포트

1741년 7월, 바로 이 무렵 1차 대각성을 망친 대표적인 망나니 광신자 제임스 데이븐포트(James Davenport)가 등장하여 1차 대각성에 광신주의의 불길을 더 뜨겁게 달구었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찬양을 인도했고, 광적인 기도회를 인도했다. 그래서 그의 집회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등의 괴이한 현상을 많이 보였다. 특히 그는 기존의 목회자들 대부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막무가내로 비난했다.

기존의 목회자들을 회심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은 휫필드와 길버트 테넌트 등의 다른 유명한 대각성 순회설교자들에게서도 자주 등장했다. 이 때문에 에드워즈의 대각성의 영향을 크게 받은 예일 대학의 학생들이 외부 부흥사들만 높이고 존경하고 자기 학교의 교수들을 구원받지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깔보며 무질서한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사태는 매우 심각하여 그 당시 예일대학 학생이었고 훗날 인디언 선교에 헌신하여 큰 발자취를 남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가 퇴학당하게 되었다.
 

예일대학 측 에드워즈 대각성과 결별

예일대학 측은 학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에드워즈를 초정하여 학생들에게 설교하게 했다. 예일대학 학장 랙터 크랩(Rector Clap)측은 에드워즈가 대각성의 광신적 현상들에 대한 따끔하게 경종을 울려 학생들이 자제하도록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설교는 학교 측의 기대와는 달랐다. 에드워즈는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말을 하는 듯이 시작하였으나, 결국 대각성에서 일어난 무질서한 일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주장했다(1741년 9월 10일).

“만일 이것이(광신적이고 무질서한 현상들)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면 나는 기독교 신앙을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성경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12)

이때 에드워즈가 예일대학 설교에서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자신에게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어지러운 현상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과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심각한 내용이었다.

특히 에드워즈는 설교의 말미에서 괴이한 현상들 그 자체로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몸의 진동, 비정상적인 신음과 울음, 온 몸의 힘이 빠짐 등의 현상 그 자체를 가지고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할 수는 없다고 했다.13) 이 당시에는 이런 현상들에 대해 판단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신사도 운동을 경험한 우리는 거짓 부흥과 미혹의 영의 현장에서 이런 종류의 괴현상들이 홍수를 이룬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즈 시대에는 그렇게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아마도 에드워즈 자신은 부흥운동에서 나타나는 그런 현상들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신앙감정론> 등에서 부흥의 기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지역의 여러 곳의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신앙적인 것에 몰두하게 하는 비상한 영향력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14)

그러나 이와 같은 에드워즈의 주장은 맞지 않다. 왜냐하면 신사도 운동을 비롯하여 여러 거짓 부흥에 젖은 사람들에게서도 종교적인 일에 몰두하게 만드는 비상한 영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부흥의 현장보다 오히려 거짓 부흥의 현장에서 영적인 일에 대한 관심의 열기는 더 뜨겁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때 에드워즈는 자기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예일대학 측은 대각성의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학생들에게 바른 설교를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에드워즈를 불렀으나 결국 실망하였다. 그 이후 예일대학은 에드워즈의 대각성에 대해 등을 돌렸다. 그래서 그 당시 예일대학 학생이었고 대각성에 고무되어 무질서한 행동으로 학교의 질서를 어지럽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퇴학시키게 된다.

 

 

에드워즈 부인 사라의 황홀한 입신

1742년 1월, 대각성 기간 동안 일어난 많은 신비현상들 중에서 백미로 꼽히는 일이 일어났다. 에드워즈의 부인 사라가 이틀 동안 세 번이나 입신에 빠졌다.15) 에드워즈가 외부에 설교하러 갔고 사무엘 부얼(Samuel Buell) 목사가 대신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 사건이 일어났다. 1742년 1월 21일 수요일, 사라는 최초로 황홀한 입신에 돌입했다. 그날 오후에 두 번째로 입신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에 세 번째로 입신에 들어갔다. 사라는 몇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못했고, 천국의 황홀감에 취하여 있었다. 그 황홀감이 이후 2주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에드워즈가 사라의 입신 현상을 성령의 위대한 사역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절대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이다. 

"Now it such things are enthusiasm, and the fruits of a distempered brain, let my brain be evermore possessed of that happy distemper!"16) (만일 사라의 입신이 광신적(이단적)인 현상이라면, 또는 두뇌가 병들어서 나타난 현상이라면, 나는 나의 두뇌가 영원히 그 행복한 질병의 상태에 잡혀 있기를 바란다!)

과연 입신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입신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바울이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받기 위해 천국을 본 체험(고후 12:2)이 성경에 나오지만, 그것은 특별계시를 성경에 기록한 사도에게 주어진 특별한 체험이다. 사도 바울의 그 체험을 그 이후 시대의 모든 신자들에게 체험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일이라고 할 수 는 없다. 몸을 땅에 두고 영혼이 하늘에 다녀온다는 입신 체험은 결코 기독교 신앙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이방종교의 사이비 현상이다.

그런데 그때에는 입신하여 황홀경에 빠져 헤매는 사라의 모습이 주변의 신자들에게는 너무도 귀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보였다. 다른 여성도들이 빈번하게 입신에 빠지는 사라의 신비한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숙였다. 과연 지금 어누 교회의 목회자의 부인이 사라처럼 입신하면 어떻게 될까? 문제는 에드워즈의 태도였다. 문제는 에드워즈 자신도 입신하는 사라의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나중에 사라의 황홀한 입신 체험에 대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로이드존스의 무분별한 에드워즈 답습

문제는 로이드존스가 에드워즈의 오류를 그대로 계승하여 이후의 후배들이 구원론에서는 칼빈주의를 택하고 성령-부흥론에서는 저질 은사주의와 타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로이드존스는 에드워즈의 대각성 중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성령의 역사로 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드워즈는 1740년의 부흥운동에서 일어난 비일상적인 특별한 현상들에 대해서도 변호해야 했습니다. 에드워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사람의 몸에도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변호했습니다. 한번은 그의 부인 사라에게서 ‘공중부양’(levitation)이라고 불리우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사라 자신이 움직이려고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말 그대로 저절로 방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되었습니다. 집회 중에 사람들이 기절(swoon, 황홀경)하거나 무의식의 상태에 빠지는 일들이 자주(sometimes) 일어났습니다.17)

로이드존스는 에드워즈 부인 사라에게서 나타났던 이런 괴이한 현상을 분별하지 않고 그대로 위대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받았고, 자기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그런 괴현상들을 흠모하게 만들었다. 대체 무슨 성령이 사람을 축구공처럼 통통 뛰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할까? 한국교회에 은사주의가 팽배해질 때에 회자되었던 저질 성령의 장난이 로이드존스에게는 위대한 성령의 부흥으로 보였나보다.

“100년 전 여러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 질문에 가장 잘 대답하는 길은 그것은 오순절 사건의 반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부흥, 187)

로이드존스는 에드워즈에게서 배운 대로 성령이 더 부어지는 것이 부흥이라고 보았다. 성령이 더 부어진다는 것은 성경적 성령이해를 파괴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성령을 이미 받은 사람에게 또 성령이 임하여 층층이 쌓이는 시루떡처럼 성령이 엉겨 붙어 두터운 단층이라도 형성된다는 것일까? 성령 단층이 형성되는 것이 부흥인가? 하늘에서 성령이 교회에 더 부어지고, 성령이 신자에게 더 부어진다는 위험한 발상이 오순절 운동의 핵심이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에드워즈에게서 배운 대로 오순절 성령사상을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의 반복을 부흥이라고 하여 성령론에 관해서는 오순절주의를 확실하게 견지했다.

부흥의 때에는 예언의 은사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문자 그대로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부흥, 252)

성령론에서 오순절 사상으로 기울면 반드시 예언과 방언에 대해서 열리게 된다. 로이드존스가 에드워즈의 성령-부흥론을 그대로 계승하여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의 반복을 추구하였으므로 성령이 또 새롭게 부어질 때 동반되는 특이현상을 수용한 것이다. 로이드존스의 다른 글을 보면 방언에 대해서 닫히지 않고 열려있다. 그리고 위의 글 처럼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사실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은 거짓 부흥의 현장을 헤집고 다니는 사탄의 장난일 뿐이다. 오히려 에드워즈는 신자들이 환상을 보거나 위로부터 임한다는 영감을 들먹이면서 예언 비슷한 것을 하려는 것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부흥 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로이드존스는 에드워즈가 엄금한 것도 이처럼 풀어놓았다. 


대각성 부흥 속의 사탄의 발자국

에드워즈의 부흥에서 나타난 그런 일들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 동안 이것을 부흥의 현장을 헤집고 다니는 사탄의 발자국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왜 없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설마 하나님께서 입신시키고, 쓰러뜨리고, 울부짖게 하고, 진동하게 하고, 거꾸러지게 하였을까? 무슨 유익이 있어서 하나님은 신자들을 그렇게 만드셨던 것일까?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닌데, 계속해서 신비한 부흥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범죄가 아닌가?

어떤 일이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에는 그 일의 열매를 보아야 한다. 대각성 이후 에드워즈와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일어난 열매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이후 에드워즈의 영적인 리더십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젊은이 성경 사건’이라고 불리우는 일이 일어났다. 대각성을 통해 은혜를 경험한 20대 초반의 남자 청년들이 산파들의 교본에 나오는 여성의 몸 그림을 가지고 여자 청년들을 희롱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곧 바로 에드워즈는 징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들의 행실을 바로 잡으려고 했으나, 그 무례한 청년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에드워즈를 무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무례하게 반응했다.

“어디 한번 해 볼 테면 해 봐라!”

대각성을 경험한 교회와 신자들이었으나, 이상하게 에드워즈에 대한 태도는 이전과 같이 못했다. 에드워즈의 리더십은 크게 손상되었다. 그 무렵 사례비가 적어 살기 어려웠던 사라가 교회에 사례비 인상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교회 측은 전혀 에드워즈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교회 측은 에드워즈에게 사례비를 마지못해 올려주기는 했으나 그 모습이 전혀 은혜롭지 못했다. 에드워즈로서는 얻는 것보다는 손해가 더 많았다. 신자들의 에드워즈에 대한 존경심은 확실히 이전과 같지 못했고, 에드워즈의 영적인 권위는 또 다시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곧 이어 에드워즈의 일생에 가장 큰 재앙이 되는 사건이 그 교회에서 벌어졌다. 에드워즈의 전임자, 스토다드 목사(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는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모든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하게 만드는 신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성찬과 세례를 전도와 회심의 수단으로의 삼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에드워즈는 그것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오직 은혜로 거듭난 성도만 성찬에 참여하여야 하고, 확실하게 개종한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번이나 큰 부흥을 경험했던 바로 그 교회의 신자들은 에드워즈의 바른 가르침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네가 뭔데 오래 동안 해 오던 것을 바꾸려고 하니?”

교인들은 에드워즈를 쫓아내기를 원했다. 에드워즈에 대한 신임투표의 결과는 230:23이었다. 압도적인 표 차이로 에드워즈는 그 교회에서 해임되었다. 이것이 두 번의 세계적인 부흥을 경험한 교회의 신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목회자에 대해 갖는 자세일까? 왜 사람들은 오늘 날의 신사도 집회에서 벌어지는 것과 거의 비슷한 일들이 에드워즈의 부흥에서 동일하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할까? 왜 그것이 사탄의 장난이었다는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할까?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에드워즈의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던 바로 그 교회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에드워즈의 대각성 부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꿈꾸는 것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엄청나게 숫자가 늘어나는 대대적인 부흥을 바라는 것도 허상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는 일상의 부흥이 최고의 부흥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알미니안주의가 일어나면서 칼빈주의가 무너지고 있을 때 다시 칼빈주의 신앙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귀하게 쓰셨던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가 배우고 존경해야 할 충분한 위대한 인물, 즉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제외하고 손에 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그의 부흥운동에서 사탄의 미혹도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 미주 ---

1) Iain H. Murray, Jonathan Edwards: A New Biography (Carlisle, P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6), 164. 
2) Ibid., 165.
3) Ibid.
4) 
George M. Marsden, Jonathan Edwards: A Life (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3), 217.
5) Ibid.
6) Ibid., 217-218.
7) 에드워즈가 Thomas Prince에게 1741년 6월 9일에 보낸 편지. Ibid., 218.
8) Ibid.
9) Ibid., 218.
10) Ibid.
11) Ibid., 220.
12) Ibid., 231.
13) Ibid., 234.
14) Ibid., 235.
15) Ibid., 240.
16) Ibid., 241.
17) 
D. M. Lolyd-Jones,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Carlis, PA: The Banner of The Truth Trust, 2016), 3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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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