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성화론’이라니 ... 누가 이런 말을 입에 담을까요? 이런 망측하고 부끄러운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칭의를 얻으면 성령이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을 자동으로 성화를 시키신다는 것일까요? 성령을 받으면 자동으로 성화된다는 그런 주장일까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자동으로 성화가 된다는 것일까요?  누가 그런 해괴망측한 말을 입에 담았을까요?  


의지와 각오로는 성화불가

먼저 우리가 지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사람의 각오와 강한 결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해 주셨으니,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보답의 차원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변화된 삶(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성화라는 주장은 복음을 파괴하는 나쁜 사상(신인협력구원설)입니다.

그런 나쁜 사상은 전통적인 천주교에서 강하게 주장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를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해 주었으니, 이제부터 너는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그리 못하면 죽을 줄 알아라!”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해 구원이 시작되었으나, 그 사람이 만들어 가는 성화로 말미암아 구원이 완성된다는 신인협력 행위구원론입니다. 종교개혁을 유발했던 중세의 전통적 천주교가 이 사상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종교개혁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개최된 천주교의 트렌트 공의회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이후의 성화된 삶 두 가지가 구원의 절대적 요건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천주교의 구원의 길은 ‘믿음’과 인간의 의지와 결단으로 이루어가는 ‘성화’, 이 두 가지입니다.

많은 논란과 찬반이 있지만, 웨슬리안 신학도 유사성이 있어 보입니다. 웨슬리 신학의 어떤 부분을 보았는가에 따라 어떤 학자는 성화와는 전혀 무관하게 오직 믿음으로 칭의와 구원을 얻는다고 웨슬리가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의 주변의 대부분의 웨슬리안 목회자들은 믿음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이후 그 사람의 의지와 신앙의 행위에 따라 구원이 완성되기도 하고 파산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구원을 주신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고, 구원을 끝까지 유지하고 완성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라고 합니다.

‘칭의’와 ‘성화’, 이 두 가지가 구원의 길이라는 사람들의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이 오직 은혜의 선물로 주신 구원을 인간과 하나님의 합작품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 사상 속에는 구원받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성화를 이루어간다는 교묘한 공로주의 사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김세윤 교수와 최갑종 교수의 주장

누가 이런 나쁜 것을 주장하여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를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을까요? Fuller 신학교 김세윤 교수와 백석대학교 총장 최갑종 교수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김세윤 교수는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이후의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성화에 의해 구원이 파산되기도 하고 완성되기도 한다는 ‘유보적 칭의론’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핵심은 믿음으로 구원이 시작되나, 이후의 의지와 노력으로 진행되는 성화를 보고 하나님이 최후에 구원 여부를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상은 천주교와 어떤 웨슬리안들의 신인협동적 행위구원론과 같습니다.

백석대학교 총장 최갑종 교수도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의지의 결단으로 진행되는 성화로 구원이 완성되기도 하고 추락하기도 한다는 가르침, 이 두 가지 모두 성경적인 구원론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사상도 천주교와 다수의 웨슬리안들의 신인협동적 행위구원론입니다.
 



박영돈 교수의 주장의 모호함

고신의 박영돈 교수의 말도 그들의 분위기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묘하게 수긍하는 듯한 말을 다음과 같이 자주 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 없이 확신으로만 충만한 사람, 거룩하게 살지 않는데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이는 망할 사람입니다. 마귀는 거짓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확신을 전혀 흔들거나 공격하지 않고 더욱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자기기만에 빠져 확실하게 망하게 합니다.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서 믿었기에 구원받았다고 굳게 확신하는 것은 마귀가 준 거짓 확신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마귀적으로 왜곡된 구원의 복음을 통해 마귀가 심어준 거짓 구원의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며 자신의 구원의 여부를 염려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확고히 하려는 경각심이 없습니다.”(박영돈 교수, 값싼 은혜의 복음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돌아보면서 구원을 확고히 하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박영돈 교수의 말은 다분히 성화로 구원을 완성한다는 행위구원론적 발언입니다. 본인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닐지라도 읽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전달되어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주를 본다고 했습니다. 죄에서 떠나 순결하고 거룩하지 못한 이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거룩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성경말씀에서 완전히 벗어날 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박영돈 교수, 구원파의 거짓 구원론을 반박함)

여기에서의 박영돈 교수님의 표현은 오직 믿음이 아니라, 칭의(믿음)와 성화가 구원을 준다는 성화구원론과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본인은 그 뜻으로 한 말이 아닐지라도 읽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뉴저지의 행위구원론자 벤자민 오 목사가 이런 부분을 대대적으로 활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호한 부분으로 인해 박영돈 교수는 김세윤, 최갑종 교수의 구원이 믿음으로 시작되고, 이후의 인간의 행위로 완성된다는 행위구원론을 단박에 박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모호한 표현을 사용함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만일 박영돈 교수님이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했으면 아주 좋았을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칭의(구원)을 얻은 사람에게는 즉시로 복음적인 삶으로의 방향 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의지의 노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활의 은혜를 적용시키는 성령이 그 사람에게 임하심으로 그 사람이 영적으로 새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속성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즐기는 죄의 99%가 여전히 떠나지 않고 남아있을지라도 이미 성령이 그 사람을 십자가와 연결시키셨으니 속성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작은 속성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칭의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변화되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구원과 성화의 관계

구원받은 자에게서 일어나는 성화에 대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는 이전처럼 아내를 때리지 않고, 이전처럼 자식에게 욕하지 않고, 길에 떨어진 휴지를 주우려고 하고, 이전과 달리 예배에 일찍 오려고 하고, 길에서 구걸하는 불상한 사람을 보면 동정심을 발휘하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고, 선교하려고 하고, 자기 죄를 회개하려고 하고 ... 이러한 성화의 증거들이 나타납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성화는 그렇게 실질적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노력과 행위의 열매가 아닙니다. 행위와 노력으로 이런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하면 그 순간 복음은 왜곡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노력하여 스스로를 성화시킨다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가 성령에 의해 그 사람에게 적용됨으로 나타나는 그 사람의 속성의 변화의 흔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화됨은 십자가와 부활을 적용시키는 성령의 재창조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전과 달리 아내를 때리지 않고, 지도자들을 욕하고 저주하지 않고 대신 위하여 기도하고, 휴지를 줍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사랑을 나누고 ... 등의 성화의 모습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박영돈 교수의 문제는 이 성화의 원리를 모르셨거나,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못 본다고 했다”,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자는 구원을 못 받는다고 했다”라는 신인협력적 행위구원론 사상에 걸맞는 말들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세윤, 최갑종 교수의 신인협력적 행위구원 사상을 박살내기는커녕 묘하게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던 것입니다.


성화에 대해 한번 더 요약

성화에 대해 한 번 더 요약하겠습니다. 진정으로 구원받는 사람에게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의지와 행위가 나타납니다. 성화를 위해 그 사람이 노력하는 흔적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의 의지와 결단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은 크게 훼손됩니다. 성화는 성령이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적용하여 그 사람의 속성을 변화시키셨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그 사람을 영적으로 재창조하셨으므로 성화가 자동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에게서는 반드시 새 삶을 추구하는 자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그 사람을 재창조하시므로 성화가 일어난다는 복음의 원리를 모르거나 강조하지 않으면서, 단지 사람의 행위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성화를 말하면 행위구원 성화론으로 갑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인들의 '교화'를 기독교의 성화로 변장시키는 이단 사설입니다. 기독교의 성화의 원인과 근본 동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죄인을 하나님 백성으로 재창조하심으로 그 속성이 달라지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밤낮으로 외쳐야 합니다.

성령충만과 성화

그러므로 우리가 성화에 관해 가장 크게 부르짖고 외쳐야 것은 성령으로 더 충만해지는 것이 성화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의 교훈을 받고, 지속적으로 말씀이 나의 삶에서 실천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가 성화의 비결인 것입니다. 행위로 성화를 이루는 것처럼 말하고, 말씀과 기도가 성화의 가장 중심되는 동력원이라는 사실을 외면하는 성화론은 모두 복음을 훼손하는 적그리스도 사상입니다. 단지 인간의 결단과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화를 주장하는 김세윤, 최갑종 교수와 일부 웨슬리안들과 천주교인들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을 허무는 적그리스도 성화론입니다. 은혜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는 갈라디아 이단들의 사상입니다. 박영돈 교수도 그런 오해를 받을 말들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취소하면 박수를 받을 것입니다.

성화에 대해 또 한번 더 요약

성화에 대해 또 다시 한 번 더 요약해 보겠습니다. 구원받은 기독교인의 성화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영적으로 새 사람으로 만드시는 성령의 재창조 사역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가 다시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천지가 백 조각이 나도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령이 우리를 재창조하셨는데, 어떻게 성화가 안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다시 이전의 사람으로 돌아가거나, 이전 사람과 똑 같을 수가 있을까요? 성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적용하여 재창조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화를 바르게 가르치는 훌륭한 사람들: 박영선, 서철원, 정대운

지금부터 소개하는 사람들은 이 복음적인 성화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여 칭의와 성화를 바르게 설명하는 귀한 분들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 유무에 있다. 불신자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외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보는 영적 감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은, 얼마만큼 윤리적인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이 감각이 생성됐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어야 한다.”(박영선 목사, 구원의 확신)

 

 

“우리는 지난 2천년 동안 우리의 힘으로 옛사람을 이기려고 온갖 발버둥을 쳤다. 그 중에 하나가 세상을 피하고 사막이나 산중 깊은 곳으로 들어가 살면 죄의 욕망을 이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271년 경 안토니오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애굽의 사막 가운데로 옮겨가서 적막 가운데 죽음과 마주하는 상황에서 죄의 욕망을 벗고 거룩하게 사는 삶을 시작하였다.

이 방식이 합당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판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안토니오스를 따랐다. 중세에는 많은 수도원이 생겨났고 종교개혁 후 개신교회에도 이 일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수도원을 산속이나 사막 가운데 세워도 육의 욕망은 없어지지 않고 거기서 수도하는 사람들을 따라다녔다. 육의 욕망을 이기는 길은 아들의 피의 권세를 힘입는 것뿐이다. 바울에게도 비슷한 말씀들이 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죄의 욕망이 강하게 일 때 이 말씀을 선언하므로 욕망이 소산되어 죄짓지 않게 된다. 개혁신학에 성경대로 고칠 부분들이 더러 있다.(서철원 박사, 성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복음선포)

 

“회개란 상처난 마음, 시험들었던 마음, 탈진했던 마음에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그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다투는 두 사람 사이에 들어가 양측의 주장을 들어보고 그 중 한 명을 지목하여 ‘당신이 잘못한 것 같으니 당신이 먼저 잘못했다고 하고 손 내밀고 악수를 청하시오’의 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얼마나 감동된단 말이오. 그러니 우세요, 눈물을 흘리세요’라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눈물이 나는 것도 아니고 눈물이 난다고 하여도 그 눈물은 진정한 회개의 눈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회개를 ‘하십시오’,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할 것이 아니다. 회개란 내 속에 있던 죄가 성령의 조명에 의해 심각성을 발견하게 되고, 그 심각한 죄의 문제가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며 계속적으로 모든 인격을 공격하여 급기야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도무지 내게는 평안과 안식이 없다는 것을 느끼며 그리스도에게로 달려 가는 것이 회개이다.

그러므로 회개조차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닌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을 때 비로소 하게 되는 것이다. 회개가 내 힘과 노력으로 되지 않고 성령의 조명하심이 먼저 있어야 함을 알면 ‘회개하시오’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용조 목사의 회개의 개념은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으로 반펠라기우스적이다. 즉, 결단을 회개로 보고 있다.”(정대운 목사, (고)하용조 목사는 세미펠라기안이었다)

성화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또 한번 더 요약

마지막으로 성화에 대해 한 번 더 요약하겠습니다. 휴지 줍고, 바르고 좋은 말하고, 기도하고, 예배에 잘 나오고, 자식에게 온유하고, 아내에게 잘하고, 죄를 싫어하고 ... 성화는 이런 실질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만일 이런 변화들이 단지 그 사람의 노력으로 이룩한 열매들이라면 성화와 ‘인성훈련’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전두환이 삼청교육대를 통해 이루고자 한 것도 성화일까요? 그리고 만일 변화들이 어떤 종교의 계율을 열심히 지켜서 이루어지면 ‘교화’, 또는 ‘순화’입니다. 이런 현상은 타종교에서 넘치도록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성령의 재창조 사역의 결실이라면 틀림없는 성화입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의 속 사람의 속성의 변화가 시작되어 행동과 삶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의 성화맞습니다. 성화를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재창조 사역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변화이어야 성화입니다.

이와 같은 성화를 더 깊이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의 노력과 결단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의 인격과 행위를 더 지배하셔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유지하면 성화는 더 깊어집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성화를 추구하면 수박껍질 정도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충만을 얻고 유지하면, 우리의 속사람은 더욱 더 깊이 변하므로 더 깊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직 믿음과 성령의 은혜을 강조한다고 ‘자동성화론’이라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모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바르게 말하는 진리의 사람을 함부로 자동성화론자라고 말하는 분들은 이 글을 잘 이해하여 다시는 성화에 관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망령된 말을 하지 않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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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