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운 목사. 삼송제일교회 담임

하용조 목사가 말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도 역시 반펠라기우스적이다. 그가 말하는 성령 충만할 수 있는 단계를 살펴보자.

<회복의 첫 단계: 회개>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주님께 다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아들로 대접해 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아버지 집의 종이 되더라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런 회복의 마음을 가질 때 부흥이 시작됩니다. 상처난 마음, 시험들었던 마음, 탈진했던 마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그 모습으로 회복하십시오.”(하용조, 바람처럼 불처럼, 81)

회개란 상처난 마음, 시험들었던 마음, 탈진했던 마음에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그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다투는 두 사람 사이에 들어가 양측의 주장을 들어보고 그 중 한 명을 지목하여 “당신이 잘못한 것 같으니 당신이 먼저 잘못했다고 하고 손 내밀고 악수를 청하시오”의 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얼마나 감동된단 말이오. 그러니 우세요, 눈물을 흘리세요”라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눈물이 나는 것도 아니고 눈물이 난다고 하여도 그 눈물은 진정한 회개의 눈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회개를 “하십시오”,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할 것이 아니다. 회개란 내 속에 있던 죄가 성령의 조명에 의해 심각성을 발견하게 되고, 그 심각한 죄의 문제가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며 계속적으로 모든 인격을 공격하여 급기야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도무지 내게는 평안과 안식이 없다는 것을 느끼며 그리스도에게로 달려 가는 것이 회개이다.

그러므로 회개조차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닌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을 때 비로소 하게 되는 것이다. 회개가 내 힘과 노력으로 되지 않고 성령의 조명하심이 먼저 있어야 함을 알면 “회개하시오”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용조 목사의 회개의 개념은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으로 반펠라기우스적이다. 즉, 결단을 회개로 보고 있다.
 

<둘째 단계: 정결>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더러운 것에서 정결해지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몸과 영 안에 더러운 것이 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 하나님은 더러운 그릇에 복을 주지 않습니다. 먼저 더러운 것을 제거하십시오. 더러운 생각,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 사람들은 모를 지라도 하나님은 아시는 더러운 것을 제거하십시오. 그리고 우상을 제거하십시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 돈, 권력, 건강, 성공 등을 제거하십시오.”(하용조, 바람처럼 불처럼, 83)

사람들은 대부분 추하고 나쁜 성품을 제거하고 싶은 소원을 가진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일 또한 우리의 힘과 노력과 관련이 없다. 사람들은 다짐하여도 곧 무너지고 만다. 더러운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제거되는 것이다. 먼저 더러운 것을 제거하고, 더러운 생각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우상을 제거한 이후에, 즉, 정결된 이후에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에서 놓임 받고 싶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이러한 것에서 탈출 할 수 없다. 인간은 온통 부패했으므로 선한 곳으로 추진하여 갈 힘도 없을 뿐 아니라 선한 것에 대한 생각조차 없다.

역시 여기서도 하용조 목사는 반펠라기안과 같이 이야기 한다. 다시 한번 뱐펠라기안들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반펠라기안들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지 않는다. 즉, 인간은 타락했지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약화된 인간의 의지를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은혜는 인간의 공격에 선행한 것이 아니라 동행한다고 하였으며, 은혜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동행한다고 하였다. 은혜는 율법을 통하여 주어진 계발이라 하였으며, 그러한 계발을 통해서 영적 이해력이 주어진다고 하였다.

반펠라기안은 어거스틴과 같이 펠라기우스주의가 목소리 높였던 “인간의 자연적 능력으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라는 ‘원죄 부정’을 공격하였다. 단지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죽어 버렸다고 하였지만 반펠라기안은 바로 이 부분에서 “자유 의지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매우 약화되어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즉, “인간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과 세미펠라기안의 결정적 차이는 구원에 있어서 선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냐, 즉, 오직 은혜냐, 아니면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냐 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앞선다고 말하면서도 실천적인 부분에서 “더러운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마음의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우상을 제거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입술로는 어거스틴을 이야기 하지만 마음으로는 반펠라기안이라 할 수 있다. 반펠라기안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계속 추구하라고 하는 것이고 결국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미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회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 3:1-2)

하용조 목사는 뿌리 깊은 반펠라기안이다. 하용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에 박힌 돌멩이들을 모두 캐내어 버리십시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새 마음을 가지십시오.”(하용조, 바람처럼 불처럼, 84)

반펠라기안의 핵심은 인간 중심이다. 신앙도, 믿븜음도, 성령 충만도 결국은 인간이 느끼고, 만족하고, 안심하고, 기분 좋게 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 끝은 인간의 기쁨으로 끝나고 만다. 믿음 이후에 두 번째 축복으로 성령 세례를 추구하는 결과는 인간중심주의, 인간의 노력으로 성령의 감화를 받으려는 헛된 망상, 사도들과 정통 기독교가 그렇게 반대했던 인간 중심의 반펠라기우스, 알미니안주의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동시에 성령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신학과, 이차적인 방법으로 성령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신학은 매우 중요한 차이를 지닌다. 자신도 모르게 개신교 강단에서 종교개혁 이전 1,000년간 중세를 지배했고 지금도 통용되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설교했던 것에 불과하다. 하용조 목사와 로마 가톨릭 신부의 설교에는 별 차이가 없다. 이는 교리를 무시하고, 교리에 대한 무지를 방치하여 생긴 자연적인 결과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소망이 있길 원합니다. 건강, 사업, 인간관계, 사역의 절망 가운데 있습니까?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바람, 성령의 바람이 불어 생기가 우리 가운데 들어오기만 하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하용조, 바람처럼 불처럼, 95)

성령 안에서 누리고 사는 것은 건강과 사업과 인간관계, 사역의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용조 목사는 간판은 장로교이며, 신학은 반펠라기안과 알미니안적이며, 신앙은 오순절적 은사중심주의이고, 주로 하는 것은 성령의 불꽃놀이 정도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양심이 있는 사역자들은 하기 힘든 온갖 것을 섞어 놓았다.
 

김희권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


“전체적으로 하용조 목사는 융합적인 신앙 노선의 소유자였다. 온누리(교회)에서는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이, 장로교와 오순절운동이 만났다.”(김희권, 고인에 대한 객관적 평가 기도, 크리스천투데이, 2011.9.14)

김희권 교수는 이와 같이 하용조 목사의 신앙이 혼잡했다고 평가하였다. 하용조 목사의 신학이 순결하지 못하고 어수선하고 난잡한 이유는 그의 신학적 소양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럼에도 그(하용조)의 많은 책들 중 어떤 책도 이런 진지한 사회 선교적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 그가(하용조) 정치적 논쟁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조심했을 수도 있었고 또 그런 것들을 다룰 신학적 훈련이나 소양이 모자랐을 수도 있다.”(김희권의 앞의 글)

김회권 교수는 하용조 목사에게 사회 선교적인 관점에서 신학적 훈련이나 소양이 모자랐을 수 있다고 하였지만, 사실 하용조 목사는 대부분에서 신학적 훈련과 소양이 부족하였다. 성경적, 신학적 역량이 부족한 목사가 한국교회 대표적 대형교회를 만들어 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교회의 재앙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 성령사역이라는 이름으로 감각적인 목회를 하였던 것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더욱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또한 반펠라기우스 이단 사상이 교회 속으로 유입되었다.

하용조 목사를 지배했던 세미펠라기안적 신학 요소를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당신은 사탄을 택하겠습니까? 성령님을 택하겠습니까?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2) 하나님은 더러운 그릇에 복을 주지 않습니다. 먼저 더러운 것을 제거하십시오. 더러운 생각,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 사람들은 모를 지라도 하나님은 아시는 더러운 것을 제거하십시오. 그리고 우상을 제거하십시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 돈, 권리, 건강, 성공 등을 제거하십시오.

3) 회개하고, 정결해졌다면, 다음은 성령으로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용조 목사는 오직 성령께서 은혜로 역사하시는 인간의 선택과 결단의 대상으로 여기는 세미펠라기안주의자였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