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는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을 가진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부흥운동가였다. 에드워즈의 칼빈주의 신앙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에드워즈는 예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 전까지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성장했다. 디모데의 지옥의 비참함에 대해 신자들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설교하는 기법, 인간의 참된 회심의 과정과 증거에 대한 강조, 그리고 성찬의 의미와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신앙 조건 등에 대한 신학적 신념은 훗날 에드워즈의 목회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에드워즈가 정통 칼빈주의자로 성장하도록 신앙의 기본 바탕을 제공한 사람은 그의 아버지 디모데 목사였다고 보아야 한다. 

에드워즈가 정통 칼빈주의자로 성장하도록 실질적으로 인도한 사람도 디모데였다. 디모데 자신은 하바드 대학(Harbard University)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나, 에드워즈를 하바드대학에 보내지는 않았다. 에드워즈가 성장할 무렵에 이미 하바드대학의 신학적 변질이 시작되었고, 그래서 신실한 청교도 목사들이 실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1) 디모데는 자신의 모교인 하바드대학이 칼빈주의 신학에서 벗어나 알미니안 신학을 수용하므로 아들을 코넥티컷 식민지에서 새로 시작되는 대학에 보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바드 대학은 1636년 메사츄세츠 식민지의 캐임브리지에서 “모든 사람은 인생의 근본 목적을 고민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라는 설립 비젼으로 출발했다.2) 여기에 칼빈주의라는 문구가 들어있지 않다고 하여 하바드 대학이 칼빈주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1620년에 최초의 청교도 이민자들이 메사츄세츠에 도착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를 만들었고, 10년 후에 또 한 무리의 청교도들이 메사츄세츠에 도착하여 ‘메사츄세츠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이후 플리머스 식민지는 메사츄세츠 식민지로 병합되었다. 

신대륙에 메사츄세츠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하바드 대학을 세운 사람들은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이 성경을 가장 잘 설명하는 신학이라고 여겼던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천주교 요소와 알미니안 신학 요소가 강했던 영국 국교회의 압박에서 벗어나 칼빈의 신학을 따라 철저한 종교개혁 신앙을 추구하고 실천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생명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그 청교도들은 천주교의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했고, 알미니안 신학을 최고로 심각한 이단사상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설립한 하바드 대학의 처음의 신학 노선이 칼빈주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불과 몇 십 년 후에 하바드대학의 신학적 변질로 인해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목사들이 우려했다는 것은 하바드대학에서 칼빈주의가 약화되고 영국 국교회의 알미니안 신학이 유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실한 청교도 목사들이 앞장서서 하바드대학을 대체하기 위해 코넥티컷 식민지에 새로운 대학을 만들었다. 1701년에 시작된 이 대학은 6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하바드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했다. 3개 도시에서 다발적으로 시작되었고, 한때 ‘코넥티컷 대학’이라고 불리 우기도 했으나 공식적으로 인정된 통일된 명칭은 아니었다. 1716년, 디모데는 당시 13세였던 에드워즈를 이 대학의 3개의 캠퍼스 중 하나인 웨더스필드(Wethersfield) 캠퍼스에 입학시켰다. 

1718년, 에드워즈가 학부 3학년 학생이었을 때, 3개 도시에 분산되어 있던 이 대학의 시설들이 현재의 코넥티컷 주 뉴 헤이븐(New Heaven)으로 통합되었다. 이 과정은 학생, 교직원, 학부모, 그리고 관련된 정부기관의 사람들 등 여러 사람들에게 심한 갈등과 아픔을 유발했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이 대학이 이전하여 자리 잡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에드워즈가 출석했던 웨더스필드 캠퍼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가장 강력하게 뉴 헤이븐으로 통합되는 것을 반대했다. 1718년, 뉴 헤이븐에서 이 대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웨더스필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가지 않고 똑 같은 행사를 웨더스필드에서 개최했다. 에드워즈와 그 부모도 뉴 헤이븐에 가지 않고 웨더스필드의 행사에 참석했다. 에드워즈와 디모데는 친한 사람이 웨더스필드의 교수였다는 것 등의 인간관계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3개 도시에서 다발적으로 시작된 이 대학은 1718년에 현재의 코넥티컷 주 뉴 헤이븐으로 모든 시설을 이전하고 하나의 캠퍼스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많은 기부금을 낸 후원회장 엘리후 예일(Elihu Yale)의 이름을 따라 '예일 대학'이라는 명칭을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하여 이후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발전했다.3)

에드워즈를 키운 예일대학의 발전 과정의 진통을 이야기하니 한국의 예장 합동의 총신대학이 생각난다. 총신에서는 김영우 총장과 이사들, 교회갱신협의회 소속 목회자들과 일부 총신교수들, 그리고 제3의 총회 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에드워즈가 졸업한 예일대학의 역사를 보고 한때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든 총신을 보니, 어디에나, 어느 시대에나 항상 갈등과 분쟁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해결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결국 총신대학도 이 진통이 해소되고 난 후 하나님이 다윗처럼 붙드시는 총장님을 중심으로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 존경받는 신학대학으로 더욱 발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누가 칼빈주의 거장 에드워즈를 만들었는가? 예일대학이 에드워즈를 정통 칼빈주의자로 훈련시켰고, 예일 대학에서의 배움으로 인해 에드워즈에게 확실한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의 틀을 형성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훗날 예일대학도 하바드대학의 전철을 따라가고 말았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예일대학의 학생이었을 때에는 정통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을 연구하고 전파하려는 올바른 정신이 투철하게 살아있었다. 하바드대학의 신학적 변질 때문에 실망한 청교도 목사들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 바른 신학을 위해 예일대학을 세웠기 때문이다.  

예일대학은 처음 출발 때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에 대한 뚜렷한 의지를 보였다.  예일대학의 학칙에는 모든 교수들이 “매일 두 번 이상 기도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의 교리를 지지해야 한다.”는 의무 사항이 명시되었고 모든 교수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4)

또한 모든 학생들도 매주 토요일 밤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을 암송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 그리고 모든 학생들이 입학 할 때, 학교에 서약한 내용, “공예배에 참석해야 하고, 공개적으로 설교문을 암송해야 하고 ...” 등이 기술된 <규칙과 약속>(Orders and Appointments)을 베껴 쓴 종이를 항상 소지하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예일대학의 이러한 정책이 에드워즈를 비롯하여 다른 모든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의 교과서이다. 칼빈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이 문서들을 공부해야 하고, 이 문서들을 배우고 중시하지 않고서는 칼빈주의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할 정도의 칼빈주의 신앙의 표준문서들이다. 예일대학은 모든 학생들에게 이런 교육을 시행했던 것이다. 

에드워즈의 신앙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해는 1721년,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 예일대학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을 때이다. 에드워즈는 이 무렵에 자신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 무렵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과 구속 사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적으로는 달고 오묘한 느낌이 내 영혼 속으로 밀려들었습니다. 내 영혼이 큰 기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묵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묵상하고 성경을 읽는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감격스러움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묵상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5)

에드워즈가 남긴 기록을 보면, 정통 칼빈주의 신앙을 교육했던 예일대학에서의 공부가 그의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이때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일대학 시절에 정통 칼빈주의 신학이 에드워즈에게 정확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일대학 대학원 시절에 칼빈주의 신앙의 핵심이 자기의 신앙 안에 분명하게 자리 잡게 되었음을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갑자기 나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따라 인간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는 것이 이해되었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가 없으나, 성령의 특별한 역사하심이 있었던 그 순간, 또는 그 이후 나에게 일어난 일종의 상상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정하시는 행위의 합당하심과 정당하심을 이해하게 되었다.”6)

인간의 어떤 행위, 공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따라 구원이 주어진다는 사상은 칼빈주의 신학의 핵심이다. 오직 하나님의 작정과 선택으로 말미암아 결국 인간이 구원받기도 하고, 계속 불신앙에서 머물다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는 사상은 그 시대의 칼빈주의의 최고의 대적 알미니안 신학의 영향을 받았거나, 알미니안 신학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다.

훗날 에드워즈는 알미니안 신학을 대적하는 전쟁의 최선봉에 서게 된다. 에드워즈의 알미니안 신학을 적대시하는 자세는 훗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예일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정통 칼빈주의 사상가로 무장되고 있었고, 이후 목회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알미니안 신학을 박멸하는 열혈 칼빈주의 수호자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교육을 모든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당연한 의무 사항으로 규정하였던 예일대학의 교육정책이 에드워즈를 칼빈주의자로 만들었다고 보아야만 한다.

에드워즈는 신학 논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설교에서도, 목회자 모임에서도 ... 어디에서나 에드워즈는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신학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1700년대 뉴잉글랜드 교회를 위협하는 최고의 대적은 알미니안 신학이었다. 그러므로 뉴잉글랜드에서 알미니안 신학과 에드워즈의 칼빈주의가 격돌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항상 에드워즈는 이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알미니안 신학을 무너뜨린 칼빈주의 열혈전사 에드워즈는 알미니안 신학으로 기운 하바드대학을 대체하기 위해 시작된 예일대학의 가장 우수한 열매였다. 

 

 

--- 각주 ---
1) Murray, 25.
2) Ibid.
3) Marsden, 35.
4) Murray, 25-26.
5) Ibid., 36.
6) Ibid.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