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근의 <알이랑 민족> 비판(3)


시작하며

필자는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에서 매월 시행하는 7월 세미나의 강의를 위해, 유석근 목사의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이후 ‘알이랑 민족’)을 또 다시 뒤적였다. 그러나 이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동안 다른 강의에서 준비해 왔던 ppt 작업이 이번에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은 페이지마다 문장마다 예외 없이 헛소리들로 넘쳐난다. 또 그 헛소리들마저도 갈지(之)자여서, 서로 최소한의 논리적인 연결도 없이, 또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 이 책에서 유석근 목사는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얻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불쑥 어떤 것을 정의해 놓고, 그 정의를 바탕으로 쓴 소설<알이랑 민족>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헛소리를 해대고 있다. 따라서 필자의 능력으로는 이렇게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갈겨놓은 엉터리 넋두리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ppt 작업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알이랑 민족>의 책의 내용 전문을 될 수 있는 대로 그대로 소개하면서, 그 사이사이에서 비판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아래 글에서 파란색의 문장들은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의 책 내용이며, 사이사이의 검은색의 문장들은 필자의 비판 글이다).

 “<여는 말>성경에는 한국에 대한 특별한 계시가 있다”(유석근, 알이랑 민족, p.18-21)

유석근 목사는 거짓 넋두리 <알이랑 민족>을 진리처럼 위장하기 위해 수많은 헛소리들을 용감하게 내뱉고 있다. 특히 성경을 이용하여 내뱉은 헛소리들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역겨웠다. 그는 <여는 말> “성경에는 한국에 대한 특별한 계시가 있다”에서부터 합동 소속 목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상식 밖의 헛소리들을 늘어놓는다. 아래는 <여는 말>의 후반부이다(전반부의 상당부분은 필자가 이미 이전 글에서 비판했다).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기록된 계시인 성경에 의하면 한국인은 천손민족, 즉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민(選民)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인의 참모습이며, 우리 겨레가 회복해야 할 본연의 모습이다. 선뜻 믿기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성경에 그것이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유석근)

한민족이 천손민족이며,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제2의 선민이라는 계시가 우리가 가지고 성경 어디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가? ‘분명히’는 고사하고 ‘희미한 암시’라도 하고 있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는가?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구약 66권에는 유석근 목사가 분명히 있다고 하는 그런 계시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유석근 목사는 놀랍게도 우리와 다른 성경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필자가 지난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유석근 목사는 허접한 사탄의 하수인들(빌 헤몬과 같은 신사도주의자들)의 예언에 근거하여, 자신이 쓴 <알이랑 민족>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인 양 큰소리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알이랑 민족>은 성령이 자신의 가슴에 주신 묵시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기록한 또 하나의 성경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암시조차 없는, ‘한민족이 천손민족이며,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제2의 선민’이라는 계시는 아마도 유석근 목사의 성경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경에는 말세의 한국교회가 재발견하고, 취하며, 주장해야 할 우리나라를 향한 놀라운 계시들이 확실히 있다. ‘지혜와 계시의 영’(엡1:17)을 구하며 성경을 상고하는 자, 그리고 주께 부르짖는 자는 그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유석근 목사는 위의 진술을 통해서 자신을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자로 소개하며, 그래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아 [알이랑 민족]이라는 책을 기록했다고 주장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계시의 영’, 즉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성령’은 유석근 목사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열심히 구한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대로 ‘계시의 영’을 인간에게 주실 때만이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분이시다. 유석근 목사가 제시한 엡1:17을 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1:17)

위 본문에서 ‘계시의 영’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내주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며, 또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의 영’을 주시는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유석근 목사가 인용한 엡1:17은 자신이 열심히 ‘계시의 영’을 구해서 ‘한민족이 천손민족이며,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제2의 선민’이라는 비밀을 깨달은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성경 본문이다. 그럼에도 유석근 목사는 엡1:17을 엉터리로 인용해서 [알이랑 민족]이 마치 하나님이 주신 계시(묵시)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알이랑 민족>에는 이렇게 성경을 얼토당토않게 인용해서 하나님의 진리인양 위장한 ‘알이랑’ 쓰레기들이 페이지 페이지마다 넘쳐나고 있다.

"그리하여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농부처럼 그는 큰 기쁨과 소망을 얻게 될 것이다"(마13:44)

유석근 목사는 밭에 감추인 보화가 마치 자신이 발견한 [알이랑 민족]인 것처럼 마13:44을 인용한다. 그러나 감추인 보화(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우리에게 발견되어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유석근 목사가 새롭게 발견했다는 [알이랑 민족]이라는 보화는 주님이 말씀하신 보화(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영이 주는 다른 보화(사탄의 나라)임에 틀림없다.

"성경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한국인은 하느님께서 마지막 때에 당신의 특별하신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고자 일찍이 택하시고 감추어 놓으신 또 하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겉사람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있듯이, 하느님께 택함 받은 선민도 겉으로 드러난 선민이 있고 속으로 감추인 선민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선민이 아시아 서쪽의 유대 민족이요, 속으로 감춰진 선민이 아시아 동쪽의 한민족이다."(유석근)

유석근 목사는 “성경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한민족이 하나님이 감추어 놓으신 또 하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해 놓고, 실제로는 성경이 아니라 오래 전에 이단으로 규정된 나운몽 장로의 말을 인용해서 그 사실을 입증하려고 한다. 유석근 목사가 한민족이 숨겨진 선민임을 입증하기 위해 언급한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겉사람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있듯이, 하느님께 택함 받은 선민도 겉으로 드러난 선민이 있고 속으로 감추인 선민이 있다”는 말은 오래 전에 이단 나운몽 장로가 내뱉은 헛소리들 중 하나를 표절한 것이다. 아래는 유석근 목사가 표절한 나운몽 장로의 헛소리이다.

"즉 에벨의 두 아들 벨렉과 욕단이 서로 갈라진 후 형 벨렉은 아브라함의 조상으로 성경에 드러난 계통이지만 동생 욕단은 감추인 속사람같이 계대가 이어졌다. 마치 형 에서는 아버지의 집에서 드러난 처지였지만 동생 야곱은 동방 하란 땅 어머니의 친정에 가서 숨겨져 살고 있던 처지와 같은 처지다. 이는 곧 유형은 드러나고 신령은 감추이는 이치와 같은 일이다. 이렇게 에서는 겉사람을 상징했고 야곱은 속사람을 상징했다."(나운몽, <2000년 전통교리 이상 있다>, 복음신문출판국, 1993년, 107~108페이지)

유석근 목사는 어디서 이상한 헛소리들만 주워 모으는 것을 보면, 아마도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 신구약 66권은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왕 주워 모으려면 제대로 된 것을 주워 모을 것이지 이단들이 내뱉은 쓰레기들만 주워 모으고 있으니 기막히기 짝이 없다. 잠깐 나운몽 장로와 유석근 목사의 논리를 살펴보자.

“보이는 겉사람과 안 보이는 속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민도 보이는 이스라엘과 숨겨진 한민족이 있다”(유석근)

위에서 보듯이 보이는 겉사람과 안 보이는 속사람의 관계로, ‘드러난 제1의 선민과 감추어진 제2의 선민이 있다’고 유추하는 것은 궤변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겉사람과 보이지 않는 속사람과 그리고 보이는 이스라엘과 숨겨진 한민족과는 서로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엉터리 유비이기 때문이다.

"유대민족은 복음의 첫 번째 주자로 사용되었다. 우리 한민족은 복음의 마지막 주자로 쓰임 받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에게 부여된 구원사적 사명이다. 이 귀한 진리는 밭에 숨겨진 보물처럼 오랜 세월 동안 덮여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 때가 차므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유석근)

유석근 목사는 자칭 오랜 세월 덮여져 있던 이 귀한 진리, 즉 <알이랑 민족>이라는 묵시를 발견한 자이다. 그러나 <알이랑 민족>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심각한 반 복음이며, 이단적인 헛소리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위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당시 제자들을 비롯해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땅 끝까지의 마지막 선교의 사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한민족이든 간에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예수의 제자들은 시대를 초월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선민이며, 땅 끝까지의 마지막 선교의 주자들이다.

"이제 기록된 계시인 성경으로 달려가서 한국인이 또 하나의 선민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해 보자. 그리하여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민족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자! 나아가 수천 년 동안 우리를 속여 온 자기비하의 거짓된 자화상을 벗어 던지고, 천손민족 한국인에게 부여된 시대적, 역사적 사명을 능히 감당하자!"(유석근)

유석근 목사는 역사적으로 열등감에 젖어있는 한국인들에게 [알이랑 민족]으로 애국심을 부추겨 교묘하게 우월감을 갖게 해서, 애국심, 민족주의를 뛰어넘게 하는 복음의 능력에서 떠나게 만든다. 그러므로 [알이랑 민족]으로 한민족이 제2의 선민이라고 믿는 자들은 내가 한민족이라는 우월감으로 인해 잠시 행복할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원한 구원의 은혜는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 나라 사랑(애국심)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천국 시민답게 십자가로 시작된 전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를 사랑한다.
 

제1장 알이랑의 비밀(유석근, 알이랑 민족, p.25-50)

창조주 유일신의 이름 ‘ᄋᆞᆯ’

본 단락에서 유석근 목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성경에서 찾지 않고, 동양의 전통적인 신관에서 찾은 ‘알’을 가지고 와서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알’과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이름 ‘엘’이 한 통속인 것처럼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유석근 목사의 말과는 달리 성경이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유일하신 이름은 ‘알’이 아니라 ‘야훼’(여호와/I am who I am)이다. 물론 우리는 ‘야훼’의 히브리어 자음 넉자만 알고 있기 때문에 ‘야훼’의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다.

유석근 목사의 주장대로, 그러나 절대로 그럴 리 없지만, 설령 ‘알’에서 ‘엘’이 왔다할지라도 ‘엘’은 ‘야훼’의 능력을 묘사한 별명에 불과한 이름이므로, 그의 주장처럼 ‘알’이 창조주 유일신을 대표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는 없다(필자는 ‘강함’ 또는 ‘능력’을 뜻하는 히브리어 ‘울’에서 ‘엘’이 파생되었다는 주장이 가장 신뢰할만한 설이라고 생각한다).

"왜 ‘ᄋᆞᆯ’이 유일신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 되었을까? ‘ᄋᆞᆯ’이 수많은 생명을 낳았기 때문이다. 쌀도 볏알(볍씨)에서,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ᄋᆞᆯ’은 ‘모체(母體)’요, ‘근원(根源)’이요, ‘시작(始作)’과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도 ‘ᄋᆞᆯ’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만물의 모체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한국인은 그 ‘알’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커다란 시원(始源)’이시기에 ‘ᄋᆞᆯ’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였다. 또 그 ‘ᄋᆞᆯ’이 인격적인 존재이심으로 ‘ᄋᆞᆯ’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였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ᄋᆞᆯ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한ᄋᆞᆯ님’이 한ᄋᆞᆯ님->하ᄂᆞᆯ님->하늘님->하느님으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ᄋᆞᆯ’은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다. 더욱이 ‘하늘’은 둥굴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알’, 즉 ‘큰 알(大卵)’이었다. 한ᄋᆞᆯ->하ᄂᆞᆯ->하늘로 변한 것이다. 만물을 내신 한ᄋᆞᆯ님(하느님)은 한ᄋᆞᆯ(하늘)에 계신다. ‘큰 알(大卵)’, ‘큰 모체(母體)’, ‘큰 근원(根源)’과 같은 뜻으로서의 ‘한ᄋᆞᆯ’에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는 것이다."(유석근)

위의 내용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내뱉어진 유석근 목사의 헛소리들이다. 그는 ‘아라랑’의 유래들 중 하나인 ‘알영 왕비설’에 대하여 “용이 갈비뼈 밑으로 여자 아이를 낳았다는 허무맹랑한 기록(삼국유사 1권)을 밑바탕으로 한데다가, 설령 ‘알영’이라는 여자가 있었다고 해도 그 ‘알영’이라는 말이 ‘아리랑’으로 음전했다는 것은 어설픈 비약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영’이라는 말이 ‘아리랑’으로 변할 수 있는가?”(알이랑 민족, p.29)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알영 왕비설’과 [알이랑 민족]은 오십보백조이기 때문이다. 유석근 목사는 ‘알영 왕비설’의 비판으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기막힌 사자성어(?)를 외치고 있다.

"지난날의 우리 신화-전설에서, 한 시조(始祖)의 탄생이 난생(卵生)으로 이어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ᄇᆞᆰ불거뉘)는 망아지가 알을 품고 있다가 뛰쳐나간 그 알에서 태어났다."(유석근)

유석근 목사는 다른 개국 신화들은 다 그냥 두고, 왜 박혁거세 신화에 집착할까? 그것은 그 신화에 ‘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석근 목사의 주장대로 ‘알’이 하나님이라면 ‘알’(하나님)을 품고 있던 망아지는 누구일까? 혹시 그 ‘알’(하나님)은 망아지가 낳은 망아지 새끼는 아닐까? 어쨌든 유석근 목사는 ‘알’이 ‘하나님’이라는 자신의 거짓말을 위해, ‘허탄한 신화’에 불과한 ‘박혁거세’까지 동원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피아노 건반 ‘미’를 지나치게 많이 두드린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미’ 건반을 많이 두드린 자가 말하고 찬양하는 ‘알’이라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구속주 하나님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유석근 목사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과는 명백히 다른, 박혁거세 신화에서도 쉽게 찾아 볼 을 수 있는 우상에 불과한 ‘알’님이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4:7)

"‘ᄋᆞᆯ’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事物)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원(始源)’으로서의 ‘ᄋᆞᆯ’이 곧 한ᄋᆞᆯ->하ᄂᆞᆯ->하늘로 된 것이다. 그러한 하늘이었기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다. 홍수 전의 사람들이 창조주 유일신을 ‘알’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유석근)

유석근 목사는 무엇을 근거로 “홍수 전의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이라고 불렀다”라고 단정하는 것일까? 성경 어디에 이런 말이 있는가? 그는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성경(창세기)을 근거로 하나님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허탄한 인간의 신화를 근거로 하나님이 하늘, 즉 ‘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삼라만상의 주인이며, 창조자이며, 섭리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가 아니라 “당신(알)이 삼라만상을 낳으시고”라는 표현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하느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이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진 신명(神名)으로 셈어(Shemitic/Semitic: 책의 스펠링이 틀려서 필자가 수정함)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느님’ 또는 ‘신성(Divinity)’에 관한 호칭이다. 이 ‘엘’은 바로 ‘알’의 변음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ᄋᆞᆯ’이라고 불렀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느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형 언어로서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 세대로 전승되었다."(유석근)

발음이 같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는,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식의 추측도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진리를 다루는 신학에서는 객관적인 확실한 근거도 없이 발음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무리한 추측을 하는 것은 아예 금기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석근 목사는 다른 근거는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하느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이다‘라고 ‘단정’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유석근 목사는 <알이랑 민족>에서 어떤 객관적인 근거와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만들어낸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따라서 [알이랑 민족]은 유석근 목사가 계시하고 유석근 목사가 기록하고. 유석근 목사가 전파한 1인 3역의 또 다른 성경이다. 그는 한국교회가 낳은 성경 저자임과 동시에 한국교회를 구원할 이 시대의 메시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아마 유석근 목사 자신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노아는 홍수 후 방주가 머무른 산의 이름을 ‘하느님의 산’이라는 뜻으로 ‘알뫼’(알산)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방주가 안착한 지역인 ‘알뫼니아’(아르메니아)라는 지명이 나왔으며, 그 산은 오늘날까지 ‘알산’, 곧 ‘아르 산’이라고 불리어진다."(유석근)

위의 내용은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도 없는, 유석근 목사의 일방적인 넋두리이다. 그러나 그는 뒤이어 객관적인 사실들을 진술함으로써, 독자들이 앞의 넋두리가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착시현상’을 유발시킨다. 그는 이런 사기 수법을 책 도처에서 사용하고 있다. 다음은 위의 소설과 이어지는 유석근 목사의 사실 진술이다.

"창세기에는 방주가 아라랏 산에 정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창8:4). 아라랏 산은 터키 동부 고원 지대에 위치한 산인데, 터키 어로 ‘아르 다으’, 즉 ‘아르 산’이라고 불린다. 이 ‘아르’는 원래 ‘알’에서 나온 말이다. 아라랏 산은 터키에서 가장 높은 해발 5137m의 ‘대 아르’와 해발 3985m의 ‘소 아르’로 구성돼 있다. ‘대 아르’는 일년 내내 흰 눈으로 덮여 있는데, 만년설을 쓰고 있는 이 ‘대 아르’가 창세기의 아라랏 산으로 추정되고 있다."(유석근)

위의 밑줄 친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유석근 목사는 여기서는 겸손하게 ‘추정한다’로 진술함으로써, 자신이 진리에 대해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를 갖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부각시킨다. 그리고 이런 객관적인 진술들 사이에 아무런 근거도 없는 자신의 거짓말을 단정적으로 말함으로써, 독자들이 자신의 거짓말도 객관성이 있는 진리로 착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은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글쓰기(말하기) 수법들 중 하나이다.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 ‘얼’(유석근, 알이랑 민족, p.41-42)

"‘얼’이라는 토박이말도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로서 역시 ‘신’(), ‘넋’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정신 나간 사람’을 두고 ‘얼간이’(얼이 나간 사람) 혹은 ‘얼 빠진 사람’이라고 하고, ‘어떨떨함’이나 ‘얼이둥절’(어리둥절)은 ‘정신을 가다듬지 못한 상태’이며, ‘얼뜨기’는 ‘다부지지 못하며 겁이 많은 사람’을 뜻하며, ‘얼버무림’은 ‘제대로 버무리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얼’은 ‘정신’을 뜻하는 우리의 훌륭한 토박이 말이다. 이 ‘얼’이라는 말의 시작이 바로 ‘ᄋᆞᆯ’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대 수메르어에서도 인가의 정신(Human spirit)을 뜻하는 단어가 ‘A-LA’였다는 것이 뒷받침 해준다. 이 ‘얼’을 드러내는 곳이 인체에 있어서 는 ‘얼골’(얼골->얼굴)이다. ‘얼골’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 즉 ‘얼’이 어떤 것인가를 대충 알 수 있다. ‘얼골’에 그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 안에서 ‘얼’이 사라지면 송장이 되고 나중에는 뼈만 남는데, 그것은 더 이상 ‘얼골’이 아니므로 ‘해골’이라고 한다."(유석근)

위 글에 대한 비판은 아래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한국어 <얼>은 ​르완다어 era {르완다어 era는 익다(to mature, be ready for harvest, ripe)의 뜻이다}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성숙한 것> 즉, <완성된 개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얼>은 추상명사로서, 개체의 <성숙한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고로, <(물이) 얼다>는 르완다어 era (to mature)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물이) 성숙한 것> 즉, <굳어져서 개체로서 얼음이 된 것>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어른>은 ​<르완다어 era (to mature) + 치체와어 na (현재시제)>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성숙한 것> 즉, <성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굴 (고어는 얼골)은 르완다어 <era (to mature) + goro (palace)>​로서, <얼의 궁궐> 즉, 성숙한 개체의 통치 중심부를 의미하는 것이다."(얼의 어원 / 작성자 세건)
 

한국인의 무덤이 동그란 까닭(유석근, 알이랑 민족, p.43)

"한국인의 무덤은 동그란 모양의 봉분인데, 그것은 ‘큰 알’을 뜻한다. 셈의 후손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삶을 영위했던 한국인의 선조들은 스스로 천손민족, 즉 ‘한알님’의 백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죽음이란 ‘한알’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덤이 동그란 모양의 ‘알’인 것이다. 그들은 ‘한알님’의 백성으로서 ‘알’에서 왔으니 ‘알’로 돌아가자고 했다.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 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 민족’이 아닐 수 없다."(유석근)

지석묘(支石墓)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가운데 하나로, 고인돌 또는 돌멘(Dolmen)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모양의 무덤은 한반도 전역은 물론, 중국 동북 지방과 일본 큐슈〔九州〕지방에도 분포하고 있다. 또 같은 ‘한알님’의 선민인 ‘히브리인’들의 무덤은 동굴이다. 그러므로 동그란 봉분 모양이 한민족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제2의 선민이라는 증거라는 유석근 목사의 주장은 객관성이 전혀 없는 그저 어처구니없는 넋두리에 불과하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봉분 모양이 둥근 것은 봉분을 모양 그대로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과학적인 방법(표면장력’의 법칙)이 둥근 모양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둥근 봉분 모양에 대해서는 수많은 유래와 전설들이 있다. 필자는 이들 중에서 ‘무덤의 봉분이 동그란 이유는 어머니의 임신한 배의 모양이 그 유래로, 죽는다는 것은 다시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의미’가 가장 타당한 설명 같아 보인다.
 

고개를 넘어 간다(유석근, 알이랑 민족, p.19-21)

"그러면 ‘고개를 넘어 간다’는 무슨 뜻일까? 그것은 고대 한민족이 이란 고원을 지나 파미르 고원을 넘어, 천산 산맥과 알타이 산맥을 넘어갔다는 말이다. 실로 많은 고개를 넘은 것이다. ‘파미르 고원’을 지나 사람들은 총령(蔥/葱/嶺)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필자 주: 먹는 채소 ‘파’는 한자로 ‘葱’이다) 마루(嶺)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 고원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 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嶺)이기에 파마루(파머루) 고원인 것이다. ‘파미르’는 한국어 ‘파마루’에서 전음된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인 연관성은 고대 한국인이 팜으로 ‘파미르 고원’을 지나 천산 산맥을 넘고 알타이 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이다."(유석근)

‘파미르’(Pamir)는 페르시아의 고어(古語)로 ‘평평한 지붕’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먹는 ‘파’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파’ 발음의 ‘파미르’이다. 중국에서는 이 고원을 ‘총령(葱嶺)’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수경주(水經注)』 「하수이(河水二)」에 ‘총령은 둔황 서쪽 팔천 리 거리에 있는 높은 산인데, 산상에서 파(총葱)가 나므로 옛날에 총령이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에서 유래하였다.

‘파’는 통일신라시대(AD 676년 이후)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한국에 전래된 ‘파’와 파미르 고원은 우연히 같은 발음의 ‘파’가 있기는 해도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파미르’의 ‘파’와 ‘파’(총 葱)도 단지 발음만 같을 뿐이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유석근 목사의 이러 식의 터무니없는 이상한 이야기는 차라리 필자가 지어낸 다음 이야기가 조금은 덜 터무니없는 이상한 이야기일 것이다.

‘알프스’는 하나님이 국(스프)를 잡수시다가 쏟은 곳이다. 그래서 ‘스프’가 뒤집어졌다고 해서 ‘스프’->‘프스’, 즉 ‘알스프’가 아니라 ‘알프스’가 된 것이다.

“'알이랑 알이랑 알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간다.' 따라서 이 노래 가사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간다.(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accompany with God, I will take over the mountains.)

‘아리랑’은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던 고대 한국인이 이 땅에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으면서 부른 ‘찬송가’였던 것이다. ‘아리랑’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그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겨레의 역사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온 민족의 숨결이며 약사의 맥락이기 때문이다."(유석근, 알이랑 민족, p.44)

유석근 목사의 말대로 ‘아리랑’이 정말 인류 최초의 찬송가였을까? 그러나 아리랑 민요의 가사를 살펴보면 ‘아리랑’은 결코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왜냐하면 ‘아리랑’이 진짜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가라면 그 가사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거나, 하나님의 위대함을 높인다거나 하는 내용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리랑’에는 나를 버리신 님에 대한 퇴폐적인 ‘한’(恨)은 있어도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은 없다. 그러므로 붕어가 없는 붕어빵은 진짜 붕어가 아닌 것처럼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이 없는 ‘아리랑’은 진짜 ‘찬송가’가 아니다. ‘아리랑’ 민요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님을 한탄하면서 그리워하는 유치한 애정 노름의 민요일 따름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유석근, 알이랑 민족, p.44)

"그렇다면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란 누구를 뜻할까? 문맥상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이 된다. 왜냐하면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바로 앞의 가사는 “하느님과 함께(with God)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으로서,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의 찬송이며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느님을 불신, 배척하는 무리들을 의미한다."(유석근)

위에서 [문맥상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이 된다......따라서 그들은 하느님을 불신, 배척하는 무리들을 의미한다.]는 유석근 목사의 설명은 초등학생의 국어 실력에도 모자라는 저급한 독해력에서 나온 넋두리이다. 그는 지금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문맥상”이라는 말을 유식한 척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래 유석근 목사가 해석한 ‘아리랑’ 민요의 가사를 보라.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유석근)

여기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전후문맥상 다른 의견을 전혀 제기할 수 없을 만큼, 바로 앞 가사에서 아리랑을 노래하는 자가 불렀던 “하느님”이며, 함께 고개를 넘어가며 동행했던 “하느님”이 명백하다. 또 의미상으로도 하느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믿었던 자들이 하느님을 불신하고 배척하는 무리들을 “님”으로 높여서 불렀다는 것은 언어도단의 억지 상상에 불과하다.
 

알이랑 민족 한국인의 성경상의 기원(유석근, 알이랑 민족, p.46-48)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창10:30). 여기에서 ‘산’이란 히브리어로 ‘하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산맥’, 혹은 ‘일전한 지역의 산들’ 곧 ‘산지’를 가리킨다. 동양에는 큰 산들이 많이 있다. 즉 욕단은 동쪽 산악 지대를 넘어서-파미르 고원->천산 산맥->알타이 산맥-아시아로 천동했던 것이다."(유석근)

‘산’을 히브리어로 ‘하르’라고 하는 유석근 목사의 설명은 옳다. 그러나 이것은 창10:30을 이해하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설명이다. 그런데 그는 왜 이런 쓸데없는 설명을 여기서 하고 있는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실을 진술하고 뒤이어 언급하는 엉터리 진술을, 독자들이 사실로 착각하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의 가장 중요한 성경적인 근거인 창10:30은 “욕단은 동쪽 산악 지대를 넘어서-파미르 고원->천산 산맥->알타이 산맥-아시아로 천동했던 것이다”는 그의 설명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다는 성경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미 필자가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은 fact 없는 fiction 이다!”/유석근의 [알이랑 민족] 비판(1)]에서 밝혔듯이 창10:30의 “동쪽”은 “앞쪽” 또는 “위쪽”의 오역이며, 또 설령 “동쪽”이 맞는다할지라도 본문은 욕단족이 동쪽의 산악 지대로 갔다고 결코 말하고 있지 않다. 창10:30을 다시 보라. 본문은 그들(욕단 족속)이 “거주한 곳”이 “~ 동쪽 산”이었다고만 말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유석근 목사는 창10:30이 말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욕단은 동쪽 산악 지대를 넘어서-파미르 고원->천산 산맥->알타이 산맥-아시아로 천동했던 것이다”라고 자기마음대로 단정해 버린다. 그리고 그는 그것으로 [알이랑 민족]이라는 황당한 소설을 쓴 것이다.
 

밝은 땅의 임금 욕단(유석근, 알이랑 민족, p.48)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공경하던 욕단 족속은 빛이 시작되는 땅, 곧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뜨는 해를 따라 알이랑 고개를 넘어 쉬지 않고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마침내 동해에 해 떠오르는 ‘ᄇᆞᆰ의 땅’, 동방의 땅 끝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백두산과 그 변두리를 근거지로 배달나라를 세운 우리 ᄇᆞᆰᄃᆞᆯ겨레(배달겨레)의 조상이 되었다."(유석근)

유석근 목사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어쩌면 하나님도 모르실 것 같은, 욕단 족속의 꿈(욕단 족속은 빛이 시작되는 땅, 곧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가는 것이 꿈이었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에게는 정말 점쟁이 성령이라도 계시는 것일까? 어쨌든 유석근 목사는 하나님도 모르는(?) 욕단 족속의 꿈을 어찌어찌 알고서는 그것을 근거로 상상의 나래를 펴며 황당한 소설을 쓰고 있다. 그리고 유석근 목사는 급기야 “욕단이 단군이다”라는 미친 소설을 쓰는 데까지 나아간다. 유석근 목사가 피아노 건반 “미”를 치는 것을 아무리 좋아한다 할지라도 “욕단이 단군이다”라는 소설을 쓴 것은 ‘미’ 건반을 너무 많이 쳐버렸기 때문에 생긴 비극 같아 보인다.

"‘ᄇᆞᆰᄃᆞᆯ’의 ‘달’은 ‘아사달’의 ‘달’로서 ‘땅’이라는 말이다. 그 때 사람들은 욕단을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물론 ‘ᄇᆞᆰᄃᆞᆯ 임금’이라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욕단은 사람들을 ‘ᄇᆞᆰ의 땅’으로 이끌고 온 ‘ᄇᆞᆰᄃᆞᆯ족’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군’이 ‘욕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단군’이라는 칭호는 ‘ᄇᆞᆰᄃᆞᆯ 임금’의 이두식 표현이기 때문이다. ‘단군’은 ‘ᄇᆞᆰᄃᆞᆯ 임금’ 또는 ‘배달 임금’ 등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우리 동방(조선)의 고유의 호칭을 후세에 한자로 의역하여 ‘ (박달)’ ‘ (임금)’이라고 표기하여 놓았기 때문에 비로소 ‘단군’이라는 칭호와 발음이 생겨난 것이다."(유석근)

그는 ‘욕단이 단군이다’라는 미친 소설을 쓰기 위해, 사전에 ‘한반도에 도착한 욕단을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불렀을까?’라고 질문을 점잖게 한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그 답으로 “물론 ‘ᄇᆞᆰᄃᆞᆯ 임금’이라고 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한다. 이상하다. 지금까지 그는 근거도 없는 황당무계한 것들도 자신 있게 자기마음대로 단정을 잘도 하던 자가 여기서는 ‘~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겸손하게 추측성 진술을 하고 있으니 매우 이상해 보인다. 지금까지의 그의 행태를 미루어 보면 여기서도 다음과 같이 황당한 소설을 쓰는 것이 어울릴 텐데 말이다. 아래는 필자가 유석근 목사로 빙의(?)해서 쓴 소설이다. 훨씬 유석근 목사답지 않는가?

욕단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욕단은 공처가였으며, 또 말끝마다 욕을 하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성격은 좀 고약했지만 욕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욕단이 욕을 할 때마다 박달나무로 욕단을 두들겨 팼다. 불행하게도 욕단은 날이면 날마다 아내에게 박달나무로 두들겨 맞았고,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욕단을 ’박달나무 임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박달나무 임금‘을 좀 줄여서 ’박달 임금‘으로 부르다가 나중에 한자로 바꾸어서 ’단군‘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욕단은 단군이 틀림없다!

"한민족의 직계 조상 욕단은 배달나라를 세울 때 먼저 백두산에 올라 창조주 하느님께 천제를 드렸다. 그것은 노아 할아버지의 아라랏 산정의 천제를 답습한 것으로서, 이렇게 ‘평지’가 아닌 ‘산정’에서 제사하는 관습은 셈족의 종가(宗家)인 욕단 족속에게는 아주 당연한 제사 방식이었다."(유석근)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단군의 천제와 같은 제사란 말인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의 천제는 기껏해야 과일들, 곡식들, 돼지 머리 정도 올려놓은 기우제 수준의 제사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을 제물로 쓰기도 했겠지만, 그냥 죽여서 제단 위에 올려놓거나 심청전에서처럼 산채로 바다에 빠뜨리는 정도였다. 창8:20을 보라!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창8:20)

노아가 하나님께 한 제사는 짐승을 태워서 드리는 ‘번제’였다. ‘번제’는 히브리 민족의 독특한 희생 제사 양식으로서, 동양 어디에서도 짐승을 완전히 태우는 제사 풍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단군의 천제와 노아의 제사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한민족의 전형적인 천신 제사는 오히려 한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일 뿐이다.

또 성경에 노아가 평지가 아닌 아라랏 산정에서 하나님께 제사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물론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서 바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면, 그곳이 아라랏산 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가 평지에 내려와서 제사를 드렸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설령 노아가 아라랏산 산정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할지라도, 그것은 산정에서 제사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법(관습) 때문이 아니라 방주에서 나와서 하나님께 제사한 장소가 단지 산정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제사 관습이 꼭 산정에서 하는 것이 맞는다면, 오히려 이것은 한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끝내며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 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 민족’이 아닐 수 없다”(유석근, 알이랑 민족, p.43)는 유석근 목사의 말대로, 정말 한민족이 욕단의 후손으로, 동으로 이동하면서부터 하나님과 함께 한 ‘선민’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제1의 선민인 히브리 민족에게 오랜 기간에 걸쳐 기록된 계시를 주신 것처럼, 동편 산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한반도까지 하나님과 함께 오는 오랜 세월동안 제2의 선민인 한민족에게도 기록된 계시를 주셨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제1의 선민인 이스라엘은 특별히 편애하시고, 제2의 선민인 한민족은 특별히 무관심하게 방치하신 것이 아니시라면, 자기의 백성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과 마찬가지로 한민족에게도 기록된 계시를 주시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민족에게는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 없다. 또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여기에 대한 어떤 암시나 증거도 없다. 유석근 목사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의 선민인 한민족에게, 그것도 “하나님과 함께”의 신앙으로 죽고 살았던 한민족에게 기껏해야 하나님을 높이거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고백은 전혀 없는, 단지 님을 탓하는 내용만 있는 아리랑 찬송가 하나 달랑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어째서 지금까지 자기의 백성인 한민족에게 아무런 계시의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수천 년 동안 우상을 섬기는 자리에 그냥 방치해 두셨는가?

또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민족에게 무책임하게 침묵하시다가 왜 이제 와서 유석근 목사를 통해 새삼스럽게 이 중요한 사실을 계시하시고, [알이랑 민족]이라는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는가? 혹시 하나님은 유석근 목사를 제2의 예수로 선택하신 것은 아닐까?
 

<참고도서>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유석근, 도서출판 예루살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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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