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구 교수(합동신대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그렇다면, 둘째로, 이 금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 따른 1세기적 정황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주께서 오실 때까지의 상황을 지배하는 것인가? 만일에 1세기 정황에서의 이야기라면 이 말씀은 1세기 성도들에게는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구속력이 없는 말씀인 것이 된다. 어떤 해석자들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 숭배(the Artemis cult)의 중심지의 하나인데 이 종교에서 여성들의 주도권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적 형태의 유대적 기독교가 바울이 이 논의를 하는 역사적 맥락이라고 논의하기도 한다.

그리츠는 이렇게 말한다: “아데미 숭배와 관련된 여성주의적 원리가 온전히 침투되어 있는 종교적 정황 가운데서 여성의 높아짐이나 우위 같은 태도가 있었다. 13절은 그런 강조점을 뒤집으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에서 에베소는 고대 사회 가운데서 이상스럽게 여성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중심지였으므로 그에 대항하는 바울의 강한 권면이 나타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교회 모임과 관련하여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금령이(고전 11:2-16) 1세기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적용되고 오늘 우리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과 같이, 또한 고린도전서 16:20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인사 방법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는 것과 같이 디모데전서의 이 금령도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금령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려는 사람들은 대개 당시 여인들은 잘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이 여인이 교육시키는 것을 금했다고 하든지, 또한 이 교육 문제와 연관시키면서 이 여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디모데전서 5:11-15, 디모데후서 3:1-7에 나타나고 있는) 거짓 교사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페인의 이른바 “에베소의 자유스러우려고 하는 여인들”[Libertarian Women in Ephesus]이라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규정은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매우 의아스럽게도 고든 피가 이런 입장의 강력한 대변인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본문(디모데전서 2:9-15)과 디모데전서 5::11-15의 과부들의 문제 사이의 상당한 유사성을 지적하면서, 이 본문(디모데전서 2:9-15)은 에베소의 어떤 특정한 문제와 관련한 논의라고 한다. 그래서 피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 여인들과 교회를 거짓 교사들의 마수에서 구출해 내는 것이 이 전체의 요점이다. 그 구출은 (여인들이) 입어야 할 적절한 옷은 어떤 것이며, (일체 조용함 가운데서 배우는 것을 포함한) 공동체 안에서의 바른 행동, 그리고 (5:9-10의 빛에서 보았을 때 10절에서 주장된 선한 행위의 하나인) 혼인하고 아이를 키우는 등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비슷한 견해를 취하면서 파제트는 바울은 “어떤 여인”(gunaiki.), 즉 이단에 의해 미혹된 여인이 가르치는 것을 금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키너는 당시 상황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인들이 가르치는 직임을 가지고 있으면 외부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여인들의 가르침을 금했다고 한다.

결국 이런 해석에 의하면 디모데전서 2:9-12의 규정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1세기 에베소라는 독특한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논의로(an ad hoc discussion addressing specific issues in Ephesus)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디모데전서 2장의 본문이 12절로 마쳐지고 있다면 이와 같은 해석의 가능성도 상당히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Moo)가 잘 지적하듯이, 에베소의 여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으며, 또한 사실 그런 경우라도 특정한 상황과 관련하여 주어진 교훈이 원칙적으로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구체적 문제와 관련해서 주어진 가르침도 보편성을 지니고 교회를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보다 더 강한 이유로 이 본문에는 디모데전서 2:13-14이 따라 붙어 있으므로 이 규정이 특정한 문제에 대한 규정이기만 하다고는 결코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본문의 인간 저자인 바울은 (1)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그 뒤에 여자가 창조되었다는 창조의 순서에 근거해서(12절), 그리고 (2) 여자가 먼저 타락하고 그것을 남자가 따랐다는 타락의 순서의 근거해서(14절) 여자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며 주관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논의하는 것이다.

여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창조와 타락의 순서라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바울이 여인의 주도권에 대한 금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세기 2장에 표현된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이해이다.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담에게 여자에 대한 지도적 기능을 주신 것과 같이 교회에서도 남자들에게 어떤 지도적 가능을 주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 남자를 먼저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의 권위를(male authority)를 부여하시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바울은 본 것이다. 마치 고린도전서 11:8에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으므로 남자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하며, 남자에게 머리됨이 주어진 것을 말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창조의 순서에 근거해서 여인들의 교회 공동체에서의 역할의 제한이 있다고 시사(示唆)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의 차이가 창조 질서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창조 질서를 뒤집으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타락의 순서를 말하는 14절에서는 처음 타락의 상황과 같은 상황이 나타날 것을 염려하는 바울의 마음이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창조의 질서와 타락의 문제가 있는 상황 가운데서는 바울의 이 금령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계속 적용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이 논의의 방식을 깨지 않는 한 우리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흥미로우나 전체 문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해석으로 13절의 접속사(ga.r)를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이유를 말하는 접속사”로 보지 않고 앞의 진술에 대한 예증(illustration)이나 모범(example)으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 의하며 바울은 사단에게 속임을 당한 여자의 대표적인 예로서 하와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와는 에베소에서 이단에 속임을 당한 여자들의 좋은 예증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13-14절에도 불구하고 11-12의 규정은 에베소의 이단의 유혹을 받은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될 뿐이고, 이것이 결코 보편적 규정이 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냐하면”이라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를 놓아두고 이와 같이 독특하고 이상한 해석을 시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마운스는 이 접속사의 가장 일반적인 용법은 이유를 진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구나 디모데전서 2:13에서는 이 접속사(ga.r)가 일반적이지 않은 약화된 의미(the unusual weakened force)로 사용된 맥락상의 증거가 없다고 마운스는 잘 논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13절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독법과 사전적으로 가장 지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결론은 여기서 ‘가르’(ga.r)가 예증적인 것이 아니라 12절이 참되다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에 의하면, 창조의 질서가 계속되는 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은 일반적 진리를 진술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어느 교회와 관련해서든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런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기에 이를 명확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우리와 동의하면서,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여인들은 항구적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남자에게 종속하게 되어 있고, 1세기 어떤 여자들이 공식적으로 가르치려고 하고 남자를 주관하려고 하면 이 종속의 원리를 어기는 것이 된다고 말하고는 그러나 오늘 날에는 “종속”의 개념이 달라졌으므로 꼭 여자들이 가르치지 못하거나 남자를 주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의는 정말 교묘하게 바울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Moo)가 잘 말하고 있듯이 어떤 문화 안에서라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식적으로) 남자와 관련하여 가르치고 주관하는 행위에 관여하려는 여성은 종속에 대한 성경적 원칙을 어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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