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동 교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6

예수원 설립자 (고)대천덕 신부

박영돈 교수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4장의 마지막 여섯번째 서평이다.

박영돈 교수의 방언주장 6>
현대 방언과 타협하여 교회에 성령의 미풍을 일으키라

박영돈 교수는 110년 전의 미국 이단들이 일으킨 아주사 거짓부흥을 통해 본격적으로 가동된 현대의 방언 기도의 은사를 적대시하지 말라고 자신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에서 시종일관 주장한다. 이것이 박영돈 교수가 방언에 관하여 한국교회에 미치는 가장 심각한 악영향이다. 박영돈 교수는 이단들이 시작한 거짓된 기도의 은사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활용하고, 한국교회가 그것과 화합하면 사탄의 역사는 물러가고 성령의 미풍이 일어나 한국 교회를 살릴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돌아와 서로 화합할 때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더 이상 갈등의 요인이 아니라 축복의 방편이 될 것이다. 방언 열풍을 통하여 한국 교회를 뒤흔드는 사탄의 역사는 물러가고 화평하게 하는 성령의 미풍이 한국 교회를 부드럽게 감싸안을 것이다.”(박영돈, <일그러지 성령의 얼굴>, 186 페이지)

박영돈 교수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혼잡하게 만드는 이런 심각한 주장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방언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리고 현대의 방언기도 은사의 역사적인 기원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현대의 방언기도 은사를 본격적으로 가동한 110년 전의 미국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이단이었는지 알았다면, 박영돈 교수는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언 기도를 금지하지 말라?

“바울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라고 했다. 방언의 은사 자체를 멸시하고 평가절하하거나 방언하는 이들을 광신자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박영돈, <일그러지 성령의 얼굴>, 186 페이지)

박영돈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니 그가 이 책을 쓸 때 성경의 방언의 기능을 몰랐던 것 같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는 공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으나 예배 중에 설교할 수 있는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예배 중에 읽고 선포할 신약의 복음이 기록된 성경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교회에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부득이 특별한 방식을 동원하셔야 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신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직접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는 설교를 주시기도 했다.

얼마나 자주 하나님이 방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는 설교를 고린도 교회에 주셨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다음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적어도 복수의 사람들이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

바울이 방언을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 내용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몇 사람에게 방언을 주시면, 그들은 순서를 따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방언을 말해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이 그 내용을 통역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이 주시는 설교 말씀이 공급되었던 것이다.

바울이 방언 말하는 사람을 막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방언을 통해 주시는 설교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결코 현대의 거짓된 방언기도를 막지 말라고 적용할 내용이 아니었다. 당시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많은 신생 교회들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설교 말씀으로 기독교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즉, 구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또는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의 신앙의 원리에 대한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방언 설교를 통해 신앙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방언 외에도 예언하는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의 직접적인 설교와 회람되는 사도들의 편지들이 당시 교회의 신앙을 자라게하는 중요한 것들이었다. 

예언은 청중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는 은사였고, 방언은 청중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방인들의 언어로 복음을 설명하는 은사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역하는 유대인들은 버려지고 대신 복음에 순종하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시기 위해 구약 시대와 달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언어로 말씀하시지 않고 이방인들의 언어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박영돈 교수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는 말씀을 현대의 방언기도에다 그대로 적용하였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방언에 대해서 잘 몰라서 했는 말이다. 그리고 왜 초대교회의 방언이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했던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경 66권으로 완성되고, 그것을 가르치면서도 목양하는 초대교회의 장로들이 등장하면서 하나님이 직접 설교하시는 방언은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성경의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방언기도하며 황홀경 속으로?

“오늘날 방언하는 이들 중에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중에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황홀경을 체험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까지 이른 이들은 실제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자신에게 실제로 무슨 유익이 있는지 잘 모르며 시간만 많이 소비하는 것 같아 방언을 그렇게 즐겨 하지 않는다. 방언 집회에서 방언과 같은 현상을 처음 체험했을 때는 열광했던 이들도 별 효력이 없으니 차츰 열심이 식어지고 방언 말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박영돈, <일그러지 성령의 얼굴>, 185 페이지)

박영돈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도 성경의 방언의 기능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박영돈 교수가 방언을 통해 황홀경을 맛보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했으므로 심각한 문제가 된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중에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황홀경을 체험하는 이들도 있다.”(박영돈 교수)

그러나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황홀경을 체험한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내용이다. 그런 일은 정통 기독교의 역사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위대한 신앙의 조상들과 선배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방언 기도라는 것이 기독교에는 없는데, 하물며 그것을 하면서 황홀경에 빠진다는 것은 더욱 더 인정받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방언 기도를 하면서 황홀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단이다. 이단들의 무속적이고 거짓된 영성의 세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까지 이른 이들은 실제로는 많지 않은 것 같다.”(박영돈 교수)

박영돈 교수의 방언 기도를 하면서 황홀해지는 경지에 도달하기도 한다는 말도 위험스러운데, 마치 우리가 그것을 사모해야 할 최고의 은혜이기나 한 것처럼 오도하는 말을 더 위험스럽다. 박영돈 교수의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서 황홀경에 도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지가 않다는 모호한 표현은 독자들을 심각하게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처음 체험했을 때는 열광했던 이들도 별 효력이 없으니 차츰 열심이 식어지고 방언 말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박영돈 교수)

현대의 거짓 방언기도를 뒤 늦게라도 포기하면 경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박영돈 교수는 마치 중요한 일을 단념하는 사람을 보고서 심히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처럼 말했다. 지금 박영돈 교수는 현대의 거짓 방언에 대한 어마어마한 미혹을 한국교회에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박영돈 교수의 저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와 방언

“대천덕 신부의 글에 의하면 한 청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몇 개 국어로 유창하게 외국인과 대화를 했다고 한다. 어떤 목사의 부인은 집회에서 자신이 전혀 배우지 않은 헬라어로 말할 수 있게 되어 거기에 참석했던 그리스 여성 두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다고 증언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서 습득하지 않은 토착어가 갑자기 입에서 터져 나와 설교했다는 말을 간혹 듣게 된다.”(박영돈, <일그러지 성령의 얼굴>, 174 페이지)

박영돈 교수가 예수원을 설립한 대천덕 신부에 대해 이렇게 미화하고 존경하는 듯이 말하는 내용은 심히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대천덕 신부는 너무나 귀한 믿음의 사람이고, 특히 한국교회에 너무나 많이 고마운 일을 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천덕 신부의 신앙의 노선은 지극히 위험스러웠고 상당히 무속적이었으므로 한국교회에 미친 악영향이 실로 막대하다. 대천덕 신부 같은 사람이 아무 비판을 받지 않고 무조건적인 존경을 받았으므로 지금 한국교회가 지금 이 지경으로 추락하였다. 박영돈 교수는 이 사실을 전혀 인식하고 못하고 있다.

대천덕 신부는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불건전한 내용을 예수원의 홈페이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홍보하면서 한국교회에 큰 미혹을 밀어넣었다. 

“20년이 지난 후 제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했을 때 저의 아내 역시 성령세례를 구하는 기도를 하였고, 그때 그녀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아내가 제게 자신의 경험에 대해 얘기해 주었을 때 저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만일 제가 받은 것이 성령세례가 아니었다면 지금 제게 성령세례를 주시고, 만일 제가 받은 것이 성령세례가 맞다면 제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그렇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일이 있은 직후 성령세례를 위해 오순절 교단의 목사님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안수기도를 받았지만 방언의 은사는 없었습니다. 그때 오순절 교회의 한 목사님이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너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았으니 가서 목회에 전념하라. 적합한 때에 방언의 은사도 주리라.’”(예수원 홈페이지)


성령세례 사상은 이단사상

성령세례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신 후 친히 임재하시어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자기의 성전되게 하심이다.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 곧 성령이 우리 속으로 임재하시는 순간인데, 이것을 '성령 세례', 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통한 신학인데, 100년 전에 미국에서 등장한 이단들이 다른 주장을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을 받기도 하고, 못 받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후 신앙생활을 하다가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별도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때 현대의 방언 기도의 은사가 핵심적으로 나타나고, 예언, 신유, 성령춤, 방언찬양, 진동, 광란 등도 그 징조로 나타난다고 했다.

아주사 거짓부흥을 통해 등장한 이런 이단사상을 오순절 운동이 그대로 계승하였고, 이후의 은사운동, 빈야드 운동, 신사도 운동이 그대로 이어받았다. 신사도 운동은 '성령세례'라 부르지 않고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명칭을 바꾸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이단적인 성령세례 사상은 이제 교파의 구별없이 어디에나 침투하여 하나님을 교회를 죽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세례 사상은 이단사상이다. 성경은 믿음을 가지는 순간에 성령이 임하시는 것 외에 다른 성령의 세례를 말하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네 번 임재하시는 성령은 성령이 아니고 성령을 가장한 거짓 영이고, 그런 성령세례는 곧 귀신과의 접신이다. 특히 그때 거짓 방언, 예언, 환상, 쓰러짐, 떨림, 방언찬양, 방언통변, 성려춤, 미친 개 같은 광란 등의 현상이 동반되고 있으니, 이것을 접신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것을 경계하기 위해 분명하게 성령세례 주장은 이단사상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교회는 보존될 수가 없다.

대천덕 신부는 이러한 사상을 한국교회에 전파한 사람이고, 나중에는 현대의 거짓 방언을 통변한다는 거짓 은사까지 선보인 사람이다. 어찌 박영돈 교수가 이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존경하는 것일까? 대천덕 신부의 부인 현재인 여사가 남긴 책 <예수원 이야기>를 보니, 대천덕 신부의 신앙이 대단히 위험스러웠고 심각한 은사주의로 기울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박영돈 교수는 성령세례 사상은 기독교 내의 다른 교단의 ‘조금 다른 신학’이 아니고 기독교는 허무는 ‘이단사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령이 하시지 않는 일을 성령이 하셨다고 하고, 두 번째로 오시는 성령이 예언, 환상, 진동, 계시, 방언, 방언통변, 방언찬양, 영서 등을 달고 오기 때문에 더욱 더 이단사상이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이단사상을 찾기가 어렵다. 박영돈 교수가 대천덕 신부를 이단으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박영돈 교수의 조직신학이 무디고 둔탁하여 교회를 보호할 수가 없다는 증거이다.


대천덕 신부는 이단영성

“하루는 아처(대천덕)가 서울에 다녀오면서 서울에 다녀오면서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선교사 친구인 미리암 크누타스가 주말에 가톨릭 친구들을 위해 열리는 수양회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을 통해 한국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령사역을 하라고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 (중략) 2000년 전의 오순절날처럼 급한 바람이 불거나 불길이 일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이곳에 임하셔서 그 분의 자녀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다. 그들은 한 사람씩 성령님을 마음속에 받아 들였고, 이내 성령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현재인, <예수원 이야기>, 147-150 페이지)

“그 모임의 힘은 해마다 쌓여 나가 1977년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미 8군 수양관에서 프란시트 맥너트 신부와 만나게 되었으며, 명동 성당에서 함께 성령 사역과 치유 사역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연합하여 한 일이었다.”(현재인, <예수원 이야기>, 151 페이지)

현재인 여사의 책에서 발견한 이와 같은 내용은 한국 천주교의 방언 은사주의 운동의 초기에 대천덕 신부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가장 심각한 이단운동은 천주교와 연합하려는 움직임이다. 한국의 기독교와 한국의 천주교의 거지된 연합의 기폭제로 은사운동이 이용되었는데, 그 시작단계에 대천덕 신부가 연관되어 있었다. 이것은 대천덕 신부가 영적으로 매우 수상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그런데 아처(대천덕) 말고는 한국어와 영어로 나오는 기도와 예언과 가르침들을 맥이 끊기지 않게 통역할 사람이 없었다.”(현재인, <예수원 이야기>, 170 페이지)

“저녁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가 전에 보지 못했던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리라는 말씀이 나왔다. 매번 모일 때마다 하나님은 예언을 통해 말씀하셨다.”(현재인, <예수원 이야기>, 172 페이지)

“성령님은 우리의 필요에 민감하셨다. 몇몇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저하자 성령님은 ‘모두가 한 번씩 이야기하기 전에는 누구도 두 번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증거와 가르침과 예언으로 주어지는 성경 말씀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현재인, <예수원 이야기>, 173 페이지)

이러한 내용은 대천덕 신부가 거짓 하나님의 속이는 예언이 남발되는 집회도 인도했음을 보여준다. 거짓 하나님이 직통으로 말하는 예언집회는 대단히 불건전하고, 그것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올바른 신앙의 길로 매진하기 어려워진다. 대천적 신부는 이 정도로 불건전했고 위험스러운 은사주의 거짓 영성가였다. 그를 통해 거짓 영들이 많이 일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박영돈 교수가 이런 사람의 책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방언에 대한 이론을 보충하였다는 것은 그 자신에게 분별력과 방언과 예언을 정리하는 개혁신학 관점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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