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김요한의 지렁이 잡기(2)

시작하며

[지렁이의 기도]에서 김요한 목사는 파스칼의 이야기로 ‘프롤로그’의 문을 연다. 파스칼은 수학, 물리학 등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기적인 천재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상록>과 <팡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위대한 신앙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요한 목사가 [지렁이의 기도] 서두에 이렇게 ‘파스칼’을 들고 나온 까닭은 아마도 독자들에게 자신의 ‘불 체험’으로 시작된 예언, 방언 등을, 위대한 ‘파스칼’의 신앙 색깔과 같은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 때문인 것 같다. 그는 파스칼의 어떤 경험을 이야기하고 난 뒤에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는 말로, 자신의 체험이 파스칼의 체험과 같은 종류인 것처럼 말한다.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날은 1999년 6월 8일 저녁 9시 무렵이었다. 이날이 내가 생애 처음으로 “불의 밤”을 경험한 나이었다. 그때의 체험이 너무 강렬하고 생생하여 18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 (중략) 그러나 1999년 6월 8일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그날, 나는 평상시처럼 저녁 기도를 하기 위해 서재에 들어가 무릎을 꿇자마자 곧장 불을 체험했다. --- (중략) 그날은 워낙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어서 달리 어떻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의 불 체험은 시작되었다."(지렁이의 기도, p.29)

그렇다면 김요한 목사의 “불 체험”은, 자신의 주장대로 파스칼이 마차 시고로 죽음 직전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보낸 2시간 동안의 체험과 정말 비슷한 체험이었을까?
 

지렁이, 파스칼을 농락하다

파스칼은 마차 사고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보낸 2시간 동안의 자신의 체험을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단지 파스칼 사후에 그의 코트 안쪽에서 발견된 메모로 인해, 파스칼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보낸 2시간 동안을 통해 그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알 수 있을 따름이다. 김요한 목사도 “우리는 파스칼이 그날 두 시간 동안 실제로 어떤 종류의 경험을 했는지 자세히 알 길은 없다”(지렁이의 기도, p.28)라고 솔직히 말한다. 그럼에도 김요한 목사는 자신이 한 ‘불 체험’과 동일하게, 파스칼도 2시간 동안 “놀라운 신비 체험”을 했다고 단정한다(지렁이의 기도, p.27). 그는 “약 600자로 이루어진 기쁨에 찬 감격과 확신에 찬 고백을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그날 일어났던 일들을 짐작해볼 수 있다”(지렁이의 기도, p.28)고 말하므로, 파스칼의 메모의 내용이 자신의 ‘불 체험’과 같은 것인 양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스칼의 메모에는 김요한 목사가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는 ‘불 체험’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그의 메모에는 성경을 능멸하는 김요한 목사의 ‘직통계시’를 나무라기라도 하는 듯, 구약 성경에 계시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외치며, 또 “그 분은 오직 복음서에서 가르치는 길로만 발견될 뿐”이라고 고백하면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으로 인한 확신과 기쁨으로 넘치고 있었다(지렁이의 기도, p.28). 아마도 파스칼은 2시간여 동안 죽음을 넘나든 경험을 통해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실체를 생생히 깨닫고, 그로 인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성경 말씀에 더욱 주목하려고 다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김요한 목사는 파스칼의 2시간 동안의 무의식 상태의 체험을 ‘놀라운 신비 체험’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단정해 놓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마음대로 단정한 ‘놀라운 신비 체험’이라는 말 뒤에, 괄호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파스칼의) 전기 작가들은 이 체험을 ‘불의 밤’(Night of Fire)이라 부른다”(지렁이의 기도, p.27)

김요한 목사는 파스칼의 전기 작가들이 2시간 동안의 파스칼의 체험을 “불의 밤”이라고 표현한 것을 근거로, 자신이 한 뜨거운 ‘불 체험’을 파스칼도 그날 밤에 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전기 작가들의 “불의 밤”이라는 표현은 파스칼의 뜨거운 불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파스칼은 그날 2시간 동안의 체험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기 작가들은 그날 밤 파스칼이 2시간의 코마 상태에서 무엇을 경험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전기 작가들은 두 시간 동안의 파스칼의 체험을 ‘불의 밤’이라고 묘사한 것에 대한 합리적인 추측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전기 작가들의 ‘불의 밤’이란 묘사를 합리적으로 추측해 본다면, 전기 작가들은 그날 밤 죽음 직전까지 갔던 파스칼의 무의식의 2시간 동안에 뜨거운 고열로 시달렸음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이런 코마 상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열로 시달린다). 그럼에도 김요한 목사는 파스칼이 말하지도 않은, 전기 작가들의 추측성 표현인 “불”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마치 파스칼도 그날 밤에 자신과 같이 뜨거운 불의 체험을 한 것처럼 말해서, 독자들에게 파스칼이 자신과 같은 신비주의자인 것처럼 오해하도록 파스칼을 농락했으며, 동시에 [지렁이의 기도]의 독자들마저 기만했다. 김요한 목사의 교묘한 속임수를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하나 든다면 다음과 같다.

파스칼은 루뷔똥 가방에 누런 금덩이를 가득 넣고 들고 다녔다. 김요한 목사도 파스칼과 똑같은 루뷔똥 가방을 들고 다닌다. 김요한 목사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파스칼의 가방과 내 가방은 똑같이 루뷔똥 가방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김요한 목사의 가방 속에는 누런 똥이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그가 파스칼의 루뷔똥 가방을 들먹이는 까닭은 누런 똥이 든 자신의 루뷔똥 가방을, 누런 금이 든 파스칼의 루뷔똥 가방과 같은 것으로 믿도록 사람들을 속이기 위함이다.

김요한 목사의 파스칼과 독자들에 대한 농락과 기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파스칼의 메모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불 체험’ 합리화에 불리한 메모의 뒷부분을 슬쩍 빼버렸다(지렁이의 기도, p.28). 김요한 목사가 슬쩍 빼버린 파스칼의 메모 뒷부분의 내용을 요약,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파스칼은 메모 후반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목하며, 다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으로 파스칼은 자신의 메모를 마친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요한 목사는 파스칼의 메모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을 빼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파스칼이 두 시간 동안의 무의식 속에서, 자신과 같이 불의 체험을 한 것처럼 독자들을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속임수는 일반적으로 협잡꾼들이 쓰는 흔한 수법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거짓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이, 신자들을 미혹하기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요한 목사도 동일한 수법으로 죽은 파스칼을 농락하고, 살아있는 독자들을 기만한 것은, 그가 성령이 아닌 다른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다른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대표적인 증거는 그가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불의 체험’(p.29,31,33,34)과 ‘진동’(p.33), ‘유체 이탈’(p.33), ‘가까운 미래를 알아맞히는 예언’(지렁이의 기도 전체에서), 그리고 ‘방언기도’(p.33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일 것이다.

김요한 새물결 플러스 대표

김요한 목사는 다른 영의 지배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단은 자신의 수족 삼을 자를 속이기 위해 주로 뜨거운 '불'(행2:3)과 '진동'(행4:9), 그리고 가까운 미래를 알게 하는 '점치는 능력'(행21:10ff), '방언기도'(고전14:2), 또 드물기는 하지만 '유체이탈'과 같은 체험을 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런 현상들은 위 안에 적시한 것처럼 마치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런 체험을 하면, 대부분 성령의 역사라고 믿고 쉽게 사단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주게 된다.

사단은 이런 방식으로 하수인들을 성령의 사람인 것처럼 이용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거짓 교회와 자신의 하수인들을 통해 성령에 관한 성경 말씀들을 왜곡시켜 왔다. 그래서 김요한 목사와 같은 사람들은 왜곡된 성경을 이용한 사단의 미혹을 성령의 역사인 줄 알고,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지면 관계상 위의 사단의 속임수들 중에 ‘불 체험’만 다루겠다).

왜곡된 성경을 이용한 사단의 역사들 중, 사단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대표적인 것이 김요한 목사가 체험했다는 ‘불 체험’일 것이다. 이 ‘불 체험’은 김요한 목사뿐 아니라,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체험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자들은 자신의 체험이 성경에 있는, 그래서 성령이 주시는 체험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면 이들이 자신의 ‘불 체험’을 성령이 주시는 것으로 믿고 있는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일까?(‘진동’도 ‘불 체험’과 동일하다) 성경에서 ‘성령’과 ‘불’이 함께 등장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마3:11(눅3:16)과 행2:3일 것이다.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3:11)

위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성령의 불”이 아니라 “성령과 불”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엄연히 다른 것으로서, 둘 다 예수님의 사역을 일컫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대속제물이 되심으로써, 오순절 이후에 죄인들에게 ‘성령세례’로 영생을 주실 것이다. 또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재림하셔서,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에게 ‘불세례’로 심판하실 것이다(무엇보다도 이 견해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구약성경에서 ‘불’은 예외 없이 일관되게 ‘심판’의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견해들도 있다. ‘불’은 성령이 임하실 때, 죄를 소멸시키시고 정화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해석도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본문의 ‘불’은 불의 태우는 속성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성령의 역사(일하심)를 설명한 것이지, 성령이 불과 같이 뜨거운 체온이 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다. 즉, 위 본문의 ‘불’은 ‘성령’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 단어일 뿐이다.

성령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뜨거운 열이 있을 리 만무하다. 또 설령 열이 있다할지라도(절대로 없다) 성령이 임할 때 인간이 그 열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성령 하나님은 허술하지 않으시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최초로 성령이 임하실 때는, 예수님의 보혜사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제자들이 알 수 있게 하시려고, 특별히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오셨지만, 그 뒤 성령의 일하심은 피조물인 인간들이 절대로 감지할 수 없었다. 단 성령의 역사로 인한 변화 등의 결과를 보고, 피조물인 인간은 성령이 역사하셨음을 인지할 뿐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령의 일하심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그럼에도 김요한 목사의 ‘불 체험’이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 맞는다면, 그때 김요한 목사에게 역사한 성령은 피조물에게도 쉽게 들키는, 허술하기 그지없는 성령임에 틀림없다. 사단이 ‘불의 체험’을 이용하여, 자신을 성령인 것처럼 위장하여, 자신의 하수인으로 삼으려는 자들을 제압하는데 주로 동원되는 성경은 아마도 행2:3일 것이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2:3)

여기서도 성령이 ‘뜨거운 불의 혀’로 임한 것이 아니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임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왜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각 사람 위에 임했을까? 제자들은 바람(루아흐)같은 소리로 인해, 성령(루아흐)이 약속대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을 지라도, 하나님이신 성령이 자기 속에 들어와 거하신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신관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이 그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은 그들 속에 들어가실 때, 그들이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모양)으로 각자에게 임하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불 체험’ 같은 것은 없었다. 만약 그때 제자들이 김요한 목사가 했다는 그 뜨거운 ‘불 체험’을 했다면, 그것은 최초로 인간에게 주어진 성령의 놀라운 체험이었기 때문에 누가(Luke)가 반드시 그때의 ‘불 체험’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왜냐하면 성령 받은 자들 중에 아무도 ‘불 체험’을 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바울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다메섹 체험을 세 번이나 언급하면서도, 또 다른 어떤 곳에서도 ‘불 체험’을 언급하기는커녕 암시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울도 결코 ‘불의 체험’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어떤 인물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불 체험’이나 ‘진동 체험’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요한 목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성령을 받았을 때, 또는 다른 어떤 때 성령의 역사로 견딜 수 없이 뜨거운 ‘불 체험’(또는 ‘진동’)을 했다고 말한다(아마도 ‘불 체험’이 성령의 역사라고 쉽게 단정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잘못된 찬송가 가사로 인한 최면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성경적이지 않은, 잘못된 찬송가 가사는 “불길 같은 성령이여,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서 오늘도 충만케 하소서” 등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불 체험’과 ‘진동’은 과거 박태선을 비롯한 이단들에게, 그리고 신사도주의의 불건전한 성령 사역자들에게 거의 예외 없이 했다고 자랑하는 체험들이다(물론 일부 성령의 거장들도 이런 말을 했다. 지면 때문에 여기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얼마든지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지 않는, 그래서 바울이나 베드로는 전혀 체험하지 못한, 그럼에도 김요한 목사를 비롯하여 박태선과 같은 이단들과 불건전한 성령 사역자들이 하나같이 체험했다고 자랑하는 뜨거운 ‘불 체험’은 과연 어떤 영이 준 체험일까? 앞에서 성경을 통해 살폈듯이 결코 성령이 주시는 체험은 아니다.
 

‘불 체험’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체험이 아니라 악한 영의 역사로 인한 체험이다!

혹시 뜨거운 불을 체험한 자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어쩌면 성령이 당신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불 체험’의 경험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체험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에 비추어 다시 조심스럽게 돌아보라. 성령이 도와주신다면, 자신이 체험한 ‘불 체험’이 거짓 영의 역사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만약 말씀을 들을 귀가 없다면, 거짓 영이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다 헛소리야’라고 속삭이는 직통계시를 듣게 될 것이다.
 

나쁜 나무의 가지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김요한 목사의 신앙의 뿌리격인 할아버지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를 언급한 그의 글을 보면, 그가 왜 거짓 영의 하수인이 되었는지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법률가였던 할아버지는 평소 술과 굿에 취해 살던 사람이었는데, 인생 말년에 느닷없이 소위 임사체험 비슷한 것을 했고, 죽은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깨어나 입 밖에 낸 첫 마디가 “이제부터 모든 식구가 다 교회에 나가자”여서 할머니와 자식들이 무척 놀랐다고 한다."(지렁이의 기도, p.29)

김요한 목사의 할아버지는 죽음 직전 상태에서 깨어나, 복음을 듣고서가 아니라 죽음이 두려워서 동네에 있는 교회에 식구들을 데리고 나갔던 것 같다(아마 집 가까이 절이 있었으면 절에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후에 할아버지와 식구들이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믿으므로, 얼마든지 성령으로 거듭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김요한 목사가 이어서 말한 내용만을 참고한다면, 불행하게도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만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집안은 시초부터 희한한 방식으로 신앙을 갖게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부모님을 위시한 여러 친척들이 방언, 통변, 환상, 예언, 신유, 축귀 사역 등을 곧잘 행했고 나 역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과정을 보냈다. 성령의 은사가 눈앞에서 일상다반사로 펼쳐지는 현상은 내게 있어 마치 공기 속의 산소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지렁이의 기도, p.29)

김요한 목사가 스스로 실토하듯이 그의 ”집안은 시초부터 희한한 방식으로 신앙을 갖게”되었다. 여기서 “희한한 방식”이란 결국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예수를 믿은 자들은, 각자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십자가를 의지하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한다. 다시 말하면, ‘정상적인 방식’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결코 김요한 목사가 말한 ‘비정상적인 희한한 방식’으로 신앙을 갖지 않는다. 어쨌든 김 목사의 가정에는 희한한 기적 같은 것들은 넘쳤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는 없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지 김요한 목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다. [지렁이의 기도]에서 ‘십자가’는 p.69(1), p.80(1), p.104(1), p.105(3), p.137(3), p.202(1), p.261(1), p.334(1) 등에서 12회 정도 언급된다(괄호 안의 숫자는 ‘십자가’ 횟수이다). 그런데 ‘십자가’는 삼위일체 설명과 같이 성경으로 무엇을 설명할 때 언급되었다. 물론 이때도 ‘십자가’가 상식 이하로 희박하게 언급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기적, 점치기 등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할 때는 십자가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렁이의 기도]에서 김요한 목사가 언급한 십자가는 신학교에서 배운 십자가이며, 그의 체험 속에서 십자가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까닭은 그가 자신의 삶 속에서는 십자가를 만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만난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는데, 김요한 목사는 십자가가 아닌 희한한 것들만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김요한 목사에게 십자가가 없다는, 다시 말하면 그가 한 체험이 성령의 체험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그의 실토 속에 또 있다.

"나는 청소년기 시절부터 혼자 기도하다가 몸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듯하면-가령 혀가 꼬이는 듯하면-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곤 했다. 심지어 신학생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혼자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 있었다. “하나님, 왜 이러세요? 됐다니까요. (그딴 거) 필요 없다니까요.” 정말 그랬다."(지렁이의 기도, p.30)

김요한 목사는 어떤 ‘영’이 자신에게 역사하려고 할 때, 그 ‘영’을 책망까지 하면서 거부했으며, 나중에 그 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그가 받은 ‘영’이 성령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는 어떤 ‘영’의 역사를 책망까지 하면서 거부했고, 그 책망과 거부가 그 ‘영’에게 통했다. 만약 그 ‘영’이 성령이라면, 그는 성령을 책망했으며, 성령의 역사를 멈추게 한 것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요한 목사는 성령을 책망하고, 성령의 역사를 멈추게 한 최초의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피조물이 성령 하나님을 책망해서 쫓아 보낼 수 있으며,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있겠는가? 결단코 없다. 그러므로 김요한 목사에게 ‘불 체험’을 주고 그의 안에 들어간 ‘영’은 결단코 성령 하나님일 수 없다!
 

마치며

필자는 [지렁이의 기도]를 읽으면서, 김요한 목사의 탁월한 성경 실력에 존경심이 생길 정도로 놀랐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의 첫 번째 책인 [상식적이 통하는 목사]를 구입해서 또 단숨에 읽었다. 역시 놀라웠다. 물론 어떤 것은 동의할 수 없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필자가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고민하며, 주장해 왔던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서로 의논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를 비판한다는 것이 불편할 만큼 인간적으로 그에게 진한 애착이 간다. 이런 이유로 김요한 목사는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비호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계속될 필자의 [지렁이 비판] 작업은 어쩌면 다수의 엄청난 저항으로 인해 힘들고 고독한 일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냉정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탁월한 성경 실력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가능한 일이며, 비상식적인 목사를 비판하는 그의 날카로운 지성은 거듭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소유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문제는 그가 진짜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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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