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 목사님은 순수한 복음의 정수로 한국 교회의 올바른 방향을 선도하고 있다. 박영돈 교수님은 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로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교계에서 정평난 신학자이다. 두 위인이 격돌하는 상황에서 나의 모습은 고래 싸움에 새우 같다.

박영돈 교수의 명성과 많은 지지자들의 '좋아요' 응원이 정이철 목사를 압도하는 것 같아 한 편의 글로 무게를 맞추어보려고 한다. 정이철 목사님의 행동을 ‘순수한 의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정이철 목사의 한국 교회를 위한 올바른 가르침을 사모하는 마음의 행동은 박영돈 교수님께는 당돌한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페이스북에 박영돈 교수님께서 짧은 글로 견해를 피력하셨다. 이에 대해서 박영돈 교수님을 간략하게 비평하며 균형을 시도하고자 한다.
 

하나>
정이철 목사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순수하게 계승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박영돈 교수님께서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순수하게 계승하려는 자세인지, 아니면 16세기 종교개혁의 교리를 수정해서 발전할 것을 제안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정이철 목사는 1세기(4-5세기 교부신학) 기독교 진리와 16세기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순수하게 계승하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박영돈 교수님께서도 같은 신학적 입장인데도 정이철 목사와 격돌이 있다면, 둘 중 하나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격돌은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 박영돈 교수님께서 16세기 이신칭의 교리를 수호하고 계승하겠다는 견해를 확인하고 싶다.
 

둘>
박영돈 교수님께서는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중 은혜이다”(duplex gratia, 기독교강요, 3.11.1)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중은혜가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만, 칭의와 성화가 모두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칭의에 성화를 동일하게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 3권에서 성화를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화 뒤에는 이중예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중예정(견인)은 구원받은 신자가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칼빈은 구원의 탈락 가능성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택자의 구원의 효력에 대해서 주장한 것이다. 기독교강요 3권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 성화에서 유효하게 하는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중은혜는 칭의와 성화가 모두 은혜로 이루어지는 구속의 은혜이고 구속의 효과라는 것이 더 적당한 이해이다. 칼빈은 칭의를 '힌지'(hinge)라며 절대 뗄 수 없는 서정(ordo salutis)으로 제시했다. 필자는 칼빈이 기독교강요 3권에서 칭의와 성화 개념의 불가분리성을 가르치거나 강조하는 것이 아닌 중생 개념(죽임과 살림)으로 전개한다고 생각한다.
 

셋>
정이철 목사는 벤자민 오가 박영돈 교수님의 가르침을 동영상으로 편집해서 교육하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하고 있다. 박영돈 교수님은 이에 대해서 큰 반향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번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셨다.

“마지막으로 벤자민 오 라는 목사가 내 글을 자신의 목적으로 위해 인용했다고 나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니 어이가 없다. 사이비와 이단들이 주로 성경을 인용하는데, 그들이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인용하면 야고보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박영돈 교수)

박영돈 교수님은 정이철 목사가 자기에게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보이신 문장인데, 야고보서에 대한 박영돈 교수님의 태도는 공손한 것일까? 신천지가 요한계시록을 오용한다면 사도 요한에게 잘못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누가 있을까? 첫째, 사자(死者)의 글에 대한 오용과 생자(生者)의 글에 대한 오용을 동일하게 평가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둘째, 성경 기록자에게는 성령의 감동을 부여한 특별한 수준으로 간주해야 한다. 박영돈 교수님께서 야고보와 비교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아쉬움이 있다.

필자는 박영돈 교수님께서 벤자민 오가 자신의 말을 이용하여 행위구원 사상을 교육하는 행위에 대해서 명확하게 자기 입장을 밝혀주시면 좋겠다. 정이철 목사와 박영돈 교수의 논쟁은 나쁘지 않으며 많은 관객들에게 유익과 기쁨을 줄 것이다. 그래서 정이철 목사의 지적이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나쁘지 않았다. 물론 박영돈 교수님은 많은 불편이 있을 것이다. 박 교수님의 대응과 가르침이 많은 후학들에게 좋은 가르침과 영향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이철 목사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가르침과 주장에 대해서 참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 자기 견해를 조건 없이 순수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준 것에 대해서는 개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번 문제의 발단일 것이다.

정이철 목사가 무례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겠지만, 틀렸다면 그 틀림에 대한 증명은 박영돈 교수님의 몫이다. 반틸의 질문에 대해서 무시한 바르트처럼, 박영돈 교수님께서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페북에 답글을 하셨기에 관객의 한 사람으로 정이철의 편에서 글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첫째, 박영돈 교수님은 첫째, 16세기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순수하게 계승하려는가? 수정하려는가?

둘째, 벤자민 오가 자신의 글을 대대적으로 이용하면서 자신의 행위구원 사상을 가르치는 행위에 대해서 “금지하라”는 멘트를 하실 수는 없는가?

전자는 페이스북의 글을 읽으면서 든 필자의 생각이고, 후자는 정이철 목사가 박영돈 교수님에게 요구하는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정이철 목사가 대 선배이시고 큰 선생이신 박영돈 교수님께 지적한 것은 무례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정이철 목사가 바르게 지적하지 못했을지라도, 박영돈 교수님은 돌아보아야 할 자신의 약점을 보시면 좋겠다. 큰 나무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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