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김세윤 박사의 영향을 받은 목회자들 가운데 방언, 예언 등의 은사에 대해서 그릇된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은 종종 보았다. 정통신학의 중요한 기초인 ‘계시의 종결’에 대한 이해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을 간혹 보았다. 그런데 다음의 영상을 보고서 김세윤 교수 본인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세윤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을 확신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실제로 박 목사님이 나에게 말할 때 들리듯이 물리적으로 음성이 들리는 때가 있다고 그래요. (그런 일이) 있어요. 이 현상은 유대신학에서도 있습니다. 유대신학은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바트 콜’이라고 그랬어요. 문자 그대로 하면 ‘소리의 아들’이라는 말이야! 그래서 (누가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런 현상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게 유대교가 우리에게 남긴 해석학의 원리이고,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해석학의 원리야! 선지자들의 말을 다 비판하라는 것이야!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고, 주의 말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비판하라는 것이야! 어떻게 비판하라고? 성경과 복음에 비추어서 이에 합당한가? 안한가? ... 이게 아주 중요해! 이걸 가르쳐야 해! 무조건 주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인정하면 안 돼). 어떤 권사가 꿈을 (꾸었는데), 꿈은 신비스러운 것이지!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악령의 오도하는 꿈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권사님이 평소 생각하는 것이 꿈으로 보이는 수도 있는데, (꿈을 꾸고서)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 그런 것을 너무 의존하면 안되요.”
 

김세윤 교수와 하나님의 음성

김세윤 박사는 사람의 말이 귀에 들리듯이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의 귀에 직통으로 들리는 특별계시 현상이 지금도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매우 놀랍고 충격적이다. 이런 사상을 가진 분은 처음부터 총신의 교수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의 완성과 함께 닫히지 않고 여전히 열려있다는 사고는 총신의 개혁신학이 아니다. 

분명히 김세윤 박사가 어떤 사람들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실제로, 물리적으로 들리기도 한다고 했다. 지금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성경을 초월하여 직통으로 메시지(예언)를 주신다는 것이다. 어떤 권사님이 꾼 꿈이 하나님의 계시을 담고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김세윤 교수에게는 기독교 정통신학과 교리의 기초를 구성하는 중요한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어 보인다.

우리의 신앙과 구원을 위해 필요한 하나님이 말씀(계시)은 신.구약 성경(예수 그리스도)으로 완성되었고, 이후 하나님이 주시는 어떠한 형태의 말씀의 계시는 더 이상 없다. 이것이 개혁신학의 계시관의 기초이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신앙을 설명하는 중요한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에서는 하나님의 계시와 계시를 전달하는 이전의 특별한 방법들이 중단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명시한다.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啓示)하시고 그의 교회에게 그의 뜻을 선언하기를 기뻐하셨고, 후에는 그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시기 위해, 또 육신의 죄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의(惡意)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굳게 세우시고 위로하시기 위해 그 계시하신 내용을 온전하게 기록되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이 지금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이란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을 주시기 위해 직접 동원하셨던 꿈, 음성, 환상, 예언, 통변으로 예언과 같아지는 방언 등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얻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 또한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서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이전의 우리 조상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계시의 말씀들을 충분하게 주셨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안전하게 만들고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시대의 우리의 선조들에게 임했던 말씀들 가운데 우리가 꼭 기억하고 배워야 말씀들을 성경으로 기록되게 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구원에 관한 최종적 권위를 가지는 말씀이고, 그 무엇을 빼거나 추가해서는 안 될 완전하고 충분하고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있다거나,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가 내포된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거나,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항간의 주장은 성경과 기독교의 정통신학과 교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단적인 내용이다. 놀랍게도 이 시대의 그런 이단적인 사람들의 배후에 김세윤 박사가 있음을 이번에 알았다.
 

김세윤 교수와 예수를 죽인 유대교의 신비주의

김세윤 교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유대신학에서도 있었던 일이라고 언급했다. 유대신학이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몸담고 있었던 유대교, 즉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구원계시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람한 이단으로 몰아 잔혹하게 죽인 그 사악한 종교의 신학이다. 유대교는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였고,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사탄을 위해 철저하게 악용된 집단이다.

그런데 칭의와 구원에 대핸 이상한 주장을 하는 샌더스, 톰 라이트 등의 새관점 학파들은 그 유대교의 아름다운 신앙을 바울과 루터가 오해하고 왜곡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들과 약간 다른 말을 하면서 비슷하게 성경적 칭의신학을 파괴하는 김세윤 교수도 유대교에 대해 상당히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신천지 안에서 신의 음성을 듣는 일이 있는 것처럼, 당시 유대교 안에서도 신의 음성을 듣는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무슬림에도 그런 유형의 신비주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종자로 몰고 살해한 그 유대교 안에 있었던 거짓 신의 음성을 듣는 신비주의가 지금 우리 신앙의 지침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김세윤 박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탄의 종자로 몰아 살해한 유대교의 저급한 신비주의 현상을 마치 무슨 떳떳하고 선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언급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다.
 

김세윤 교수의 계시감별법

김세윤 교수는 지금 나타나는 계시를 ‘비판’하라고 했다. 김세윤 교수는 우리 성경에 나오는 ‘분별’이라는 말을 ‘비판’으로 바꾸어야 더 옳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타나는 계시들을 무조건 받지 말고 비판하여 수용하라는 김세윤 교수의 주장은 매우 좋아 보인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근본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오류가 들어있다.

첫째, 현재의 직통계시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틀렸다. 김세윤 교수가 한국의 반듯한 교단 신학교에서 최소한 M.Div 과정 정도를 이수했다면 이러한 혼란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개혁신학의 기초문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첫 페이지에서 성경으로 계시가 완성되었고, 계시가 임할 때 나타났던 꿈, 환상, 음성, 예언 등의 하나님의 특별한 수단들이 이미 사라졌다고 선언한다. 한국에서 반듯하게 신학의 기초를 연마하면서 이런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김세윤 교수가 이런 혼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계시를 전하던 수단들이 성경의 완성과 함께 이미 사라졌으므로, 만일 오늘 날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꿈, 환상, 음성, 예언 등이 누구에게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라도 그냥 무시해 버리면 된다. 괜히 그것을 ‘비판’하거나 ‘분별’할 필요가 없다. 요즘 말로 개무시해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아무리 비판과 분별을 잘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일하는 거짓 영의 장난을 다 걸러 낼 수는 없다. 하나의 실제적 사례를 들어보자! 김세윤 교수의 조교였고 제자였던 김요한 목사가 어떤 사람에게 해 주었던 예언기도 속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고 최근에 들었다. 

“아내가 여자임을 느끼게 하라. 아내의 축복기도 속에 자신이 성장하고 치과의 물질이 풀리는 것을 기억하라”

김요한 목사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감동’ 또는 ‘성령의 feel’을 받아서 이러한 말을 삼당자에게 했을 것이다. 그러면 김세윤 교수가 이 내용을 자신의 계시를 감별하는 방법으로 비판하여 보기 바란다. 과연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인지, 거짓 영에게서 나온 말인지, 사람이 한 말인지 분석해 보기를 바란다. 내가 보기에는 다 맞고 유익하고 선한 말이다. 남편이 아내가 여자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창조의 원리이다. 남편이 하는 일이 특별히 못된 것이 아니면, 아내는 남편을 돕고 격려하고 축복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 부부의 모습이고, 세상에서도 기본진리로 통하는 가화만사성의 원리이다.

김세윤 교수가 강조하는 계시 감별법으로 아무리 비판을 잘 해도 이런 유형의 예언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았음을 판단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런 모습의 예언의 은사 또는 예언기도를 통해 성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분이라면 사명대사, 단종, 최영 등의 신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저런 말은 점쟁이 무당집 드나드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족집게 영성에서 당연하게 여기지는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수하여 준 믿음의 조상들은 기독교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정말 하나님이 김요한 목사의 예언기도 등의 방식으로 일하실까? 그러면 성경은 어디에 쓸 것인가? 성경만으로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고 신앙하게 만들어 주는 '성령의 조명'하심은 어디에다 붙일 것인가? 수 천 년 전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말씀의 원래의 뜻을 그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이 가르쳐주심이 성령의 조명이다. 수 천년이 지난 다른 시대를 사는 우리가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도우심이 성령의 조명이다. 그러나 저렇게 족집게 직통영성의 도움을 정말 받을 수 있다면 기도와 성경과 성경에 대한 성령의 조명은 필요가 없다. 

칼빈이 누구에게서 예언기도 받았다고 하던가? 칼빈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의 부인이 신분을 감추고 은밀하게 어디에 가서 예언을 듣고 와서 칼빈에게 알려주자 칼빈이 부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였다고 하던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기도와 성경과 성령의 조명으로 온전하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기도와 성경과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로부터 나온다는 예언기도, 예언상담, 꿈, 환상, 음성 등을 전혀 의지하지 않았다. 오직 성경과 기도와 성령의 조명으로 어려움 없이 하나님을 믿었고 진리를 실천하면서 살았다. 성경과 기도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충분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만일 괴로울 때 꿈, 환상, 예언기도, 하나님의 음성 등을 한번이라도 체험하여 유익을 얻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계속 추구하고 집착하게 된다. 결국 심하게 중독되고, 나중에는 성경은 간데없고 무속주의, 신비주의만 남게 된다. 조금이라도 거짓된 계시현상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당하는 어김없는 저주는 바로 이것이다. 한 번 더 예를 들어보자! 사업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예언기도를 받았다고 하자. 예언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하자.

“기도 가운데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라!”

이 말을 듣고 그 사람은 더 힘을 내고 인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이 예언기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직통으로 주신 말씀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김세윤 교수는 자신의 계시 감별법으로 이 내용을 잘 비판해 보기 바란다. 기도를 강조하고, 인내를 말하고, 하나님의 적합한 때를 기다리라는 예언기도의 내용의 어느 부분이 자신의 계시감정 기준인 '성경과 복음'에 대치되는가?

이런 내용에 대해 아무리 비판(분별)을 잘해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니라고 판단할 근거는 없어 보인다. 귀신들이 이런 간교한 직통계시 장난으로 기독교를 잠식하고 있으나 많은 어리석은 학자들이 김세윤 박사처럼 되지도 않는 ‘계시감별법'이나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짓 예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오도당하고 있다.

성경을 온전하게 해석하고 가르쳤던 우리 선조들의 신앙과 가르침으로 돌아가야만 거짓 영들의 장난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완성된 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계속 나타나는 직통계시 현상들은 모두 거짓이고 악한 영들의 장난질이다. 이런 단호한 가르침이 아니면 앞으로 거짓 영들의 예언 사냥터가 더 넓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둘째, 현재에도 계시가 있고, 계시를 다 믿지 말고 ‘비판’(분별)해야 한다는 김세윤 교수의 주장은 성경오독에 근거한다. 피터 와그너 등의 신사도 운동 신학자들도 김세윤 교수와 같은 말을 한다. 김세윤 교수가 이전에 피터 와그너와 싸웠다고 하던데, 이제 와서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예언을 말한다고 해도 무조건 다 믿지 말고 성경을 기준으로 ‘분별’(비판)해야 한다는 것이 이미 세상 떠난 피터 와그너의 이론이었다. 피터 와그너도 그렇게 똑 같이 말했다.

그러나 예언을 분별(비판)하라는 가르침은 성경에 없다. 이런 유형의 거짓된 예언이론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대표적인 어리석은 학자는 웨인 그루뎀이다. 이전의 어떤 글에서 웨인 그루뎀의 실수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을 다시 그대로 소개하며 마치려고 한다.

“웨인 그루뎀의 예언이론의 상당부분이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 14:29)와 연관되어 전개된다. 웨인 그루뎀은 사람들이 예언으로 인해 오히려 손해와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의 이 구절을 매우 요긴하게 활용하면서 자신의 예언이론을 전개하였다. 예언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이유는 성경의 말씀처럼 예언을 받은 사람들이 예언의 내용을 ‘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분별"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는 내용의 진위를 비판(분석, 분별)하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가 아니고, 사람의 외적인 특징을 구별하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외적인 특징에 대한 구별의 의미로, 야고보서에서 부자 신자와 가난한 신자의 특징을 구별하라는 의미로 쓰였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교회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성숙성을 가진 한 사람을 찾아내라는 의미로 쓰였다.

‘분별’이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이 말하는 내용(예언)의 진위를 분석하고 비판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말씀(예언)을 전하게 하시는 사람들(예언자)이 질서있게 전하도록 순서를 세우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이 사실을 지적한 대표적인 개혁신학자는 팔머 로벗슨인데, 그는 웨인 그루뎀의 예언이론의 상당부분이 ‘분별’이라는 단어를 엉터리로 해석하면서 전개되고 있으므로 그의 예언이론의 상당부분이 자동적으로 허물어지고 만다고 진단했다”(정이철, “웨인 그루뎀의 예언 이론은 피터 와그너의 사상과 거의 동일”)

심지어 팔머 로벗슨은 고전 14:29절의 “분별할 것이요” 부분이 유력한 성경 사본들에는 없는 부분이고, 후대의 성경 번역자들이 문장을 매끄럽게 만들이 위해 추가한 내용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오늘날 누구에게 예언이 임하여 그가 말하더라도, 듣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비판(분별)해야 한다는 김세윤 교수 등의 주장은 성경에 존재하지도 않는 단어에 기초하는 허구적인 이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기록된 성경 말씀 밖에서 현재 나타나는 크고 작은 모든 계시 현상들을 지지하는 이론들은 이렇게 허접하다. 그러므로 그런 내용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완성으로 (공적이건 사적이건)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되었고, 이제는 닫혔다. 예언기도, 방언과 방언통변, 예언, 음성, 환상, 꿈 ... 등의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던 방편들이 신구약 성경의 완성과 함께 이미 종결되었다.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벧후 3: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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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