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죄와 죄책감의 문제로 늘 고통받아 왔다. 예수 하나님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죄인을 대신해서 심판받으셨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또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내어 죄와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자. 칼 G. 융무신론자들이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사르트르나 까뮈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인기를 끌고 있을 때 융과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는 "우리가 부르든지 부르지 않든지
임진남 목사 (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WEA 세계복음주의 연맹에 가입해야 마느냐에 대한 합동교단의 공청회가 계속 진행중에 있다. 찬성, 반대를 주장하는 패널들의 신학적 주장에 대하여 날선 공방이 이루어지고 있다.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WEA와 교류를 찬성하는 분들의 주장을 듣고 있다 보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세계 복음주의자들은 로마교회와 활발하게 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WEA 가입 반대를 주장하는 분들의 염려와 걱정을 단지 기우라고 하는 것으로 일축하는 WEA 찬성 지지자들은 복음주의와 로마
들어가는 말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는 일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역된 성경 본문 까닭에 이단적인 교리들이 생산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단적인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오역된 성경 본문 까닭에 그것이 이단적인 위험한 교리임을 모르고 수용하며 가르치는 경우들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물론 번역에는 한계가 있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보여주듯 번역은 결코 원문의 의미를 100% 반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번역만큼은 원문에 가장 가깝도록 정밀하게 번역하려고 애써야 한
아가서는 설교로 듣거나 따로 읽어본 적이 거의 없는 책이다. 성경통독하면서 몇 번 읽어보았고 다양한 해석도 들어보았지만 별로 공감되지 않았다. 계시록과 함께 가장 난해한 책으로 꼽히는만큼 이해가 어려운 이유도 있겠지만, 어쩌면 솔로몬에 대해서 내 마음이 닫혀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솔로몬은 하나님을 친히 경험한 자였고 누구보다도 큰 은혜를 받은 자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를 지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이방여인들을 아내와 첩으로 맞아들여서 그들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며 자기 백성들도 타락시켰다. 화려한 궁전을 지으면서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의 사변적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동적 순종을 통해 율법의 의를 획득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가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율법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거나 구원을 받는 방법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사도 바울이 증거하기 때문이다.이것에 대하여 칼빈도 갈라디아 강해설교에서 자세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약속은 적절하지 않으며 구원을 받는데 부분적인 도움밖에 주지 못한다고 잘못 생각하지 않게
우상숭배한 이스라엘, 종교통합하는 교회전도하다 보면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의 역사가 있는데 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우고 그들의 신을 섬겨야 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민족의 신이 아니고 모든 인류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와 모든 시대에 자신이 누구신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한 나라를 만드시고 그들과 관계하시면서 그것을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셨다.이스라엘의 역사서를 읽으면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우상숭배하는 것임을 보게 된다. 선지서를 읽으면 하나님이 이로
'인간은 희망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생존이란 곧 희망하는 것이다', '사람은 희망의 동물'이라는 표현이 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에게 '당신은 아직도 소생할 수 있는 가망성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이제 당신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그를 살게 하기도 하고 죽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그의 미래가 현재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희망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실존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라고 표현했다.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참 희망의 대
글을 시작하며“능동순종” 주장자들은 예수님이 율법에 대한 “능동순종”으로 의를 획득하여 자신을 의롭게 하고 죄인들에게 그 의를 전가시켰으며, 또한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수동순종”으로 죄인들의 죄책을 면제해 주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정이절 목사가 주장하는 바처럼,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의 방식은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성경 구절은 성경 도처에 널려 있지만(그래서 필자는 ‘십자가’뿐임을 말하는 성경 구절들을 소개하려고 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밤을 새워도 안 될 것 같아서다.), “능동순종”을 뒷받침하는 성경
종교개혁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킨 로마교회는 자신들의 교리를 확증시키기 위해 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리고 상황적으로 적용시켰다. 이에 칼빈은 이들의 가증스러운 행위들을 미친개들, 아니면 협잡꾼들로 비난하였다.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신학의 현장에서 같은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을 능.수동적으로 나눈 것이 마치 성경적이며, 전통적 개혁주의신학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능.수동적인 순종이 (성경에서 말하는) 개혁주의 전통의 가르침인가?최근에 온라인에서 강의한 교수들
죄의 노예 리차드 훼플러(Richrd Hoefler)는 그의 책 '아침이 밝을 것인가(Will Daylight Come)'에서, 할아버지네 농장을 방문하는 남매에 관한 가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쟈니(Jonny)는 새총을 하나 얻었고, 조그만 돌로 나무를 맞추려고 새총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솜씨가 점점 나아졌다. 그런데 어느 날, 곳간에 들어갔을 때 할머니께서 아끼시는 오리를 몰래 훔쳐보게 되었다. 갑작스런 충동에 그만 오리를 겨냥해서 새총을 쏘았는데 오리는 맞아죽고 말았다.소년은 겁이 덜컥 났다. 이제는 어쩔 것인가? 소년은 절망
칼빈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원인에서 그리스도를 담은 질그릇과 같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11.7).성경에는 칭의의 방도인 믿음과 관련하여“오직 믿음만으로”라는 표현이 없고, 단순히“믿음으로”라는 기록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 의는 완전하고 충실한 의일 것이다.또한,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롬 3:21),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3:24),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예수님은 성육신 하실 때부터 부활 하실 때까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 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제사는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의 요구를 100% 만족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시고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성으로 전락시키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종속 시키려는 위험한 사상입니다.1) (김리훈 장로님의 이 말씀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의견이 아래 각주에 있습니다)예수님은 1) 성경대로 부활하셨고(고전 15:3-4), 2) 사망에게 메어
위선, 이 말의 희랍어 '휘포크리시스'는 단순히 연극에서 어떤 배역을 맡는 것 또는 배우가 쓴 가면을 가리켰다. 따라서 이 말은 자기의 얼굴처럼 다른 얼굴을 자기의 것으로서 가장 하는 것, 본래의 마음과 생각을 숨기고 다른 생각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위선적이라는 말은 도덕적, 종교적인 사람에게 사용되는 것이지 범죄자나 죄인들에게는 잘 붙여지지는 않는다.예수께서는 종종 바리새인들에게 위선자라고 공격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단순히 선을 흉내 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리새인들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반인들과
예수회가 추종한다는 예수님은 기독교가 믿는 예수님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압제자 로마에 항거한 정의로운 혁명가일 뿐이다. 그들은 “예수의 정신을 본받아서 약자를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하고 강자들의 탄압에서 약자들을 구원하겠다”는 구호를 외친다. 그리고 “교회는 억압받고 차별받는 자들의 해방을 위해 혁명에 적극 참여하여 민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하나님이시다”고 숭배하는 기독교는 그들에게 이단이며 원수가 된다.예수회는 예수님을 따라 약한 자들의 편에 서며 낮고 검약
정이철 목사님 글과 서철원 박사님 글에 대해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애당초 예수님의 능동순종과 수동순종에 관해서는 문외한 이었습니다. 그러나 에 실린 여러 글들을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저는 요즈음 안식교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6월 달에 제가 안식교에 대해 presentation할 계획이 있습니다. 안식교 교리 중에 ‘조사심판’ 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대속의 죽음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상에서의 대속의 죽음으로 죄는 용서 되었지만 죄가 도말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말(말소)되지
글을 시작하며“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뒤이어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눅10:38-42)를 읽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육적인 일’(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 만드는 일)보다 ‘영적인 일’(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일임을 교훈한다고 생각한다. 또 예수님도 육신적으로 자신을 대접하는 것보다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라고 생각한다. 아래 소개하는 주석이 이런 생각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당연히 음식 준비와 환대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
기독교의 신앙에서 성장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가 일생동안 성숙해 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리고 낙심이 성장의 아픔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낙심하는 시간이 없이는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방법이 없다. 낙심은 신앙생활의 낯선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일부이다.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란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란 관점에서 평가할 때 우리는 낙심하게 된다. 그분으로 하여금 원하시는 일을 원하시는 시간만큼 하시도록 하지를 않고, 우리 스스로 일정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
나는 애송이 신학자 이기 전에 과학자이다. 그래서 나의 논리는 일반인 보다는 앞선다. 만약 아담이 영생으로 창조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애당초 선악과 명령을 주시지 않았어야 했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 명령을 주셨을지라도 아담은 그 명령을 반드시 지켰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명령을 지키지 않있다. 물론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즉 아담은 지, 정, 의를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피조물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이 하나님처럼 영생으로
1890년대 과학자들은 염색체 연구를 통해서 남자 염색체와 여자 염색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염색체의 수는 모두 23쌍인데, 그 중에서 22쌍은 같은 염색체이며 1쌍은 성염색체로서 같은 염색체는 X, 다른 염색체는 남성에게 있어서 Y이다. 이것을 쌍으로 표시하면 여자는 XX이고 남자는 XY이다. 성의 인위적 선택이란 양수 검사 등으로 태아를 진단하고, 이 중에서 남.녀를 원하는 대로 선택하거나, 또는 성의 전환수술을 통해서 여성이 남성으로, 남성이 여성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1955년부터 양수 내 세포를 이용하여 임신 중
글을 시작하며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마6:12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마치 우리가 다른 이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제자들에게 신성모독을 부추기는 가르침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