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은 성경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성경 공부를 하다보면 많은 질문을 받는다. 때론 호기심 때문에 성경을 사변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목사)들은 모든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간혹 어떤 교사는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식으로 성도들에게 믿음을 강조한다. 어떻게 보면 의심하는 성도들 보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믿음으로 믿는 성도가 더 훌륭한 신앙인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기독교를 아주 미신적이고 비도덕적인 종교로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사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과 성경은 아주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이성적이다. 또한 논리적이다. 쉐런 키에로
현대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어리석게도 파괴시키고 있다. 특히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킴으로 인해 중보자이시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끝난 것으로 가르친다. 이러한 과오는 이미 로마카톨릭과 이슬람에서 시작한 악의적인 가르침이었다.그런데 현대교회가 어느 순간부터 성령께서 오늘날 교회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며 성도들을 이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뒤로 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영광을 확증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고백해야 한다.특히 오순절주의 교회나 성령운동을 하는 일부 아주 미련한 자들은 로마카톨릭과 마호메트가 주장하고 있는 것을 자신들의 교회에 그대
독일의 신학자 칼 발트는 목회자들에게 “한손에 성경 다른 한손에 신문”이라는 개념을 통해 목사가 시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이 마치 목사가 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칼 발트가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칼 발트의 신학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해도 필자는 그의 신학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가 비록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을 이야기 하지만 정통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진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 발트의 이 말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고 있는지 목사들은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물론 목사는 사회의 일부분에 속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2000년 전 유대사회에서 태어나셨다. 이 때문에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성경을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 또는 유대사회에 대한 문화적 배경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에는 아주 심각한 독소가 숨어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으로 오셨고 그 나라와 그 사회속에서 사역을 하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유대사회를 근거로 해서 사셨던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유대사회를 매개체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 개념에 대한 바른 인식이 어느 정도 가르쳐지느냐에 따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유대사회를 근거로 해서 사역을 하셨다면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성경의 계시는
현대교회에서 가장 크게 왜곡되어 가르쳐 지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방언에 대한 은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목사들과 성도들이 기도의 은사로 알고 방언 받기를 위해 얼마나 사모하는지 그 열풍은 지금도 대단하다. 그렇다면 과연 방언이 기도의 은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여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방언이 기도의 은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목사들과 성도들은 방언이 기도의 은사인 것처럼 그렇게 알고 있는가?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순복음교회의 어리석은 가르침이 마치 성경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방언에 대한 말씀이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누구하나 방언이 기도의 은사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
보통 우리는 “성령 충만하라” 하신 그 말씀 때문에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늘 충만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령 충만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렇지 않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은 유일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그런데 우리들에게 성령 충만 하라고 하신 것은 성도가 혼자 충만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성도 각 사람에게 은혜의 분량을 따라서 성령의 은혜를 주신다. 우리는 형제로서 교제를 갖는다. 다시 말해, 교회를 이루고 그 이룬 교회 안에서 서로 교제한다. 그것은 아무도 스스로 혼자 성령 충만하거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다.그 이유는 성도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나누고, 협력하게 하는 존재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현대교회의 모습 가운데 그야말로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모습들이 상당이 많다. 일일이 다 예를 들 수 없지만 가장 세속적인 한 가지를 든다면 그것은 바로 신학교의 교육이다. 오늘날 신학교 교육은 그야말로 세속적이다. 너무나 세상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신학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신학교에 왔다고 한다.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는 다름 아닌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것이 정당하게 성립되는 것이다.그런데 이들이 신학교에 와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그 광경을 보면 아마도 성도들이 실망할 것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자신들이 목회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그리고 중요하게 여기는 “돈”은 사람들에도 유혹을 가져다 준다. 때문에 가짜 “돈”이라는 위폐도 상당히 많이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위폐를 감별하는 전문가들이 각 나라마다 있다. 그런데 이들이 시대마다 아주 정교하게 발전하는 위폐들을 구별하기 위해 하는 훈련이 따로 있다. 그것은 단지 진짜 돈, 진폐를 항상 만지고, 또 만지고 늘 진폐만을 가지고 훈련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항상 변하는 위폐를 쉽게 감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 기독교가 항상 성도들에게 증거해야 하는 복음은 섞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복음은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다른 것을 섞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사람들은 순수한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현대교회에서 간혹 오해하는 것이 있다.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들은 종교개혁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개신교의 산물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생겨난 것인가? 예를 들어 죄인이 의롭게 되는 (칭의)것은 믿음으로 된다고 하는 것을 루터와 칼빈, 그리고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이신칭의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거룩한 삶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알고 있고, 그렇게 배웠다면 잘못된 지식과 무지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개혁교회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거룩하게 된다”고 하는 이 말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종교개혁자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신앙만을 주장하고 가르쳤는가? 전혀 아니다. 종교개혁시대와 이후 시대에 등장한 믿음의 선진들은 한 결 같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후 유월절을 제정하시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날을 기념하면서 그들의 자손들에게 유월절의 의미를 가르쳐 대대로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이 유월절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모형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 있을까? 어쩌면 하나님의 교회(안상홍증인회)가 기존의 교회성도들을 미혹하여 자신들의 모임에 데리고 가는 것을 보면 유월절과 성찬에 대한 바른 신앙교육을 시키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이단들의 왜곡된 교리보다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을 쉽게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고 본다.개혁파 교회는 성도가 은혜 받는 방편을 합당한 말씀의 선포와 세례와 성찬, 그리고 기도로 규정하고 있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교회에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이나 가르침을 종종 배우게 된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 성도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은 그렇게 많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흐르고 있다.대부분의 교회에서 부흥회나 유명한 강사를 모시고 집회를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거나 집회를 하는 이유는 어떤 목적을 두고 있다. 그 목적이란 거의 돈과 관련이 있다.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교육관을 세우기 위해, 교회 주차장을 넓히거나 아니면 교회 빚을 갚아 나가기 위해서 자주 외부 강사들을 모신다. 아니면 선교지에 보내는 돈을 모으기 위해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이단들이 상당히 많이 있고, 그들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단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요한계시록을 자의적으로 해석이다. 한국교회가 요한계시록에 대한 통일된 해석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많은 상징적인 의미와 문자적인 의미를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오류에서 이단들이 계시록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이 왜 통일성을 가지고 해석되지 못한 것일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기록 시점에 대한 차이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언제 이 계시록을 기록하였는지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기록시점과 이단들의 발생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시
개혁교회가 목사, 장로, 집사를 세워 교회를 섬기게 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목사만 교회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위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의 말 한마디에 성도들은 그저 순종하면 복을 받는 다는 기복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목사의 말에 순종하여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위해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세우셨다. 이것은 목사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는 장로와 집사라는 말씀이 아니다. 교회를 위해 목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장로와 집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간혹 교회가 갈등이 있을 때, 거기에는 자신
우리는 칼빈의 나 그의 주석을 읽으면 자주 들을 수 있는 단어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미친 개' '협잡꾼' 이라고 하는 말들이다. 칼빈은 이런 과격한 말을 (사실 칼빈에게 있어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고 할 수 있다) 진리를 왜곡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한정지어 사용한다.삼위일체를 부인하거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선택을 부인하는 자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동정녀 탄생을 거부하고 성경 66권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아주 단호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칼빈은 진리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성경해석을 완고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성경의 난해한 부분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면
우리는 주변에서 다양한 교파와 교단을 통해 세우진 교회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교파와 교단은 신학과 정치에 의해 규정된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가장 많은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교파가 장로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장로교의 정치에 대한 목회적 측면에서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 장로교가 장로교의 독특성을 잘 발휘하고 있는지 언급하고자 한다.세계 교회에서 가장 큰 교회와 큰 교단이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이런 대형교회의 특징은 바로 목사 중심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도 유행처럼 이루어진다. 미국에서 커뮤니티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자 한국에서도 이러한 커뮤니티 교회를 이루기 위해 목회자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교회가 부흥하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유행병이다. 그런데 커뮤니티
요즘 우리는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 이라고 말하는 이런 말을 아주 쉽게 들을 수 있다. 신학에 대한 가르침과 개혁교회의 전통교육이라고 하는 캐터키즘을 가르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물론 현대교회가 도덕적으로 바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해서 지탄을 받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교묘한 사탄의 선전문구이다. 기독교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는 “모두 다”의 문제이다.만약 우리 주변에서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리가 삶을 대적하며 삶이 교리를 대적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팽배해 있는 교리를 혐오하는 사상이 지
2002년도 월드컵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뜨거웠던 그 날이 생각난다. 신학대원 3학년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다. 총신대학원 3학년 4반 반장이었던 나는 서울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정현 목사는 총회의 헌법대로 편목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상식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오정현 목사가 3학년에 편목하였다는 말은 있었지만 그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1학기 시험을 앞두고 오정현 목사를 복도에서 한 번 보았다. 그런데 총신신학대학원 교수들은 오정현 목사를 과잉보호하듯이 그가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듯이 그를 자신의 연구실로 맞이 하여주었다. 그리고 오정현 목사는 편목 수업을 거치지 않고 강도사 시험도 보지 않았
개혁교회와 현대교회의 설교의 내용은 다르다. 목사는 신학교에서 신학과 그 밖에 다양한 학문을 배운다. 배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여기에 해당하는 답은 헬라어, 히브리어로 기록된 원어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음으로 그 원어 성경을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강단에서 목사가 설교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의를 놓고 보면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다.이러한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어 주는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한 책’ 이라고 말한 존 맥아더의 말은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루터는 “구원하는 믿음은 오직 살아 있고 의의 열매를 맺는 생명이 있는 믿음”이라고 하였다. 죄인이 의롭다고 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2항은 루터의 가르침대로 “믿음은 다른 모든 구원의 은혜들과 함께 있으며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 라고 가르친다.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믿음으로 칭의를 받고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가? 세대주의자들 가운데 반율법주의적 견해를 가진 자들은 이 질문에 충분히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의롭다고 하는 것
그렇다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경은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24:44).정확하게 번역하면 “모세의 글들과 선지자들의 글들과 시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선지자들의 글이란 모세 오경과 시가서를 제외하고 모든 구약 성경을 선지서로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구약 성경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마귀는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성경으로 이끌지만 성령은 그리스도가 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