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박사(LA 풀러신학교 교수)의 신학 내용에 대해서 뜻있는 목사들이 모여서 비평적 연구와 독서를 진행했다. 이미 몇 사람이 협업으로 (CLC, 2017)를 출판하기도 했다. 김세윤 교수의 신학보다 톰 라이트 신학이 훨씬 유명한 것이 지금 상황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김세윤과 톰 라이트의 신학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느껴졌다. 김세윤 신학을 이해 못하고, 톰 라이트의 신학이 유행한다면, 결국 유행을 따르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톰 라이트의 신학보다 더 유행하는 신학이 등장한다면 결국 그곳으로 갈 것이다.김세윤 교수의 칭의 이해를 “유보적 칭의”라고 제시한 것은 최덕성 박사(브니엘 신학교 총장)이다. 김세윤 교수는 그 정의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으
본 글은 고경태 박사가 2012년 “한국장로교회 100년, 회고와 전망”이란 주제로 개최된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 “각 교단 신학지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논의 고찰을 통한 한국장로교회 100년의 성령 이해 고찰”에서 고신 부분만 발췌한 것이다. 2. 1951년 이후 고신 측의 성령 이해1)고신은 1938년 27회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투옥된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가 해방 후 출옥하여 세운 고려신학교(1946년 설립)에서 시작된다. 고려신학교 지위 문제로 1951년 5월 25일에 분리했다.2)허순길 박사는 고신신학을 “한국장로교사의 맥락에서 고려신학교와 고신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으로 정의했다.3) 고신 측의 고신대학 신학대학원은『개혁신학과 교회』
김성로의 에 대한 고찰1)김성로는 교육 교재를 제작하면서 한마음 교회가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땅 끝까지 증거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제시했다(복음시리즈1권, 2쪽). 김성로는 십자가가 아닌 부활만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김성로는 복음과 성령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을 제시했다(복음시리즈1권, 2쪽). ‘삶의 변화’는 영과 육, 두 가지 영역이 있지만 그리스도인 양육 교재이기 때문에 영적 변화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교재 전반에서 삶의 변화는 주인 위치 변경, 죄와 싸워 이김이 전부이다. ‘복음과 성령의 능력’이란 표현은 매우 어설픈 표현이다.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라”이고, 복음으로 부활을
김성로 목사의 저서『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라(1), 동행하라(2)』에 대한 총평 김성로의 두 권의 교재는 “복음시리즈”로 세우고,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1)이라는 제목으로 진행한다. 김성로의 교육 시리즈가 ‘복음’과 ‘부활’이 주요 가치인 것을 알 수 있다. 복음과 부활을 동의어로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명료하지는 않지만, 복음의 핵심을 부활로 파악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복음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복음에서 부활만을 떼어서 복음 전체라고 말할 수 없다. 부활을 강조하고 복음의 다른 항목들을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파괴하는 교묘한 행동이다. 복음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인데, 선으로 선을 이기는 방식은 없다.“
1. 들어가는 말목사가 사상(思想)이 있을까? 일반 목사들은 일반적으로 목회한다. 그런데 목사가 유명하면 그 목사에게는 사상이 있다고 보아야 하고, 사상은 검증이 필요하다. 목사는 사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목사는 사상 검증과 인증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목회가 보장되어야 한다지만, 보편 교회 원리를 이해한다면 사상 검증의 필요성을 거부할 수 없다.한국 교회의 부정적 특징은 ‘권징’이 사라진 것이다. 권징이 사라진 대표적인 현상은 ‘강단금지’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이다. 모든 교단은 ‘강단교류 허용과 금지 단체’를 규정하고 있다. 총회에서 이단, 위험단체, 참여금지 등을 규정하면, 그 단체에 소속한 사역자에게 강단을 허용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장로교 합동 총회는 통합, 기장 등과 강
이단(異端), ‘다를 이(異)’, ‘바르다, 끝 단(端)’이다. 그래서 혹자는 ‘끝이 다른 것’으로 규정해서, ‘시작은 같은데, 끝이 다르면’ 이단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매우 바람직하지 않는 정의이다. 이단은 처음과 끝이 다르다. 알파와 오메가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시작이 같으면 끝이 같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믿는다(롬 8:39).이단(異端, heresy)은 정통(正統, the Orthodoxy)이 세워짐으로 확립된 개념이다. 정통은 구원을 무력하게 하는 공격에 대항해서 형성된 변호적인 체계이다. 변호와 믿음 고백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몸부림하는 것이 정답이다. 정통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동일한 본체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합동 측 목사이다. 1999년도에 안수를 받은 20세기 목사이다. 세기가 바뀌었지만 아직 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1992년, 1999년 등은 밀레니엄 광풍이 불기도 했었다. 1999년 12월 31일의 태양과 2000년 1월 1일의 태양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이단 집회, 이단적 집회, 이단으로 단죄될 가능성이 있는 집회, 위험성이 있는 집회... 공통점이 있는데, 그곳은 ‘열정과 열광’이다. 신학교에 다닐 때 한 교수님은 절로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말씀했고, 신학생들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당황했고 불만이었고 기분 나빴다. 목사 20여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어쩔 수 없이 사는’ 혹은 ‘돈만 위하는 목사를 많이 보셨나보다’ 이렇게
‘칭의(稱義, Justification)’에 대해서 꾸준하게 논의하는데, 논의하면 할수록 합의점에 아닌 미궁(迷宮)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왜 많은 연구자들이 ‘칭의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데, 미궁에 들어가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라는 동일한 책제목으로 몇 종류가 출판된 상태이다(최갑종, 새물결플러스, 2016; 가이 워터스, 신호섭 역, 부흥과개혁사, 2011). 이와 관련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주제는 훨씬 더 많은 출판물과 연구논문이 있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왜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혼란이 증대하는지 원인을 밝히면서 해소 방안을 제안하려고 한다.1. 칭의 카오스(Justification Chaos)‘칭의’를 논하면서
‘설교’는 통상 “목사가 주일에 강단에서 하는 말하는 행위”로 한다. 그러나 다양한 어휘가 있다. ‘말씀강론’, ‘말씀선포’, ‘복음선포’, ‘복음강론’, 등이다. 영어로는 sermon, preaching을 사용한다. ‘설교학’은 ‘homiletics’이다.‘설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설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도들은 다양한 이론을 발표하고 있다. 목사는 설교하는 사람으로 자기 행위에 대해서 명료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목사는 전문적인 연구가 아닌, 오래 동안 반복된 자기 행위에서 설교에 대해서 자기 정립을 할 수 있다. 목사 리더십의 근원은 설교에 있다. 물론 설교와 인격은 분리되지 않는다.‘설교’란 “목사가 주일에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는 행위”이다. ‘설교하는
칼빈파는 교회를 ‘거룩의 정도(精度)’로 구분한다. ‘보다 부패하지 않는 교회’, ‘더 부패한 교회’로 구분하여 ‘한 교회’의 명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칼빈파는 부패를 이유로 교회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더 부패한 교회가 정죄하고 박리(剝離)시킬 때는 주의 말씀대로 가차없이 그 집단에서 퇴출되는 기쁨과 영예를 선택한다.필자는 트렌트 회의에서 이신칭의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내려진 ‘아나떼마’(annathema, 저주)를 기쁘고 영예롭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로마 교회를 이단으로 단정하지 않고, 그들에게 정죄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일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허용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도침례까지 시행한 한국교회 모습을 비극적으로 생각한다. 다시 재발하지 않기 위해
한국 장로교회(합동)에는 수 년전 총회에서 ‘천주교’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정작 천주교의 프로그램 ‘사순절’ 기간이 되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천주교의 사순절을 사모하고 맹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오순절주의에서 천주교에 ‘동일한 방언’ 현상이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평가하듯이, 동일한 사순절을 지키면 동일한 수준이 될 것이다. 합동 교단은 총회 결의로 사순절를 행하지 않도록 규정했다.왜 사순절을 지키지 않아야 하는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 사순절은 무엇인가? ‘사순절(四旬節)’, ‘Lent’는 본래 Anglo Saxon어로 ‘spring(봄)’이란 말이다.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한 것이 3일이지만, 시간은 40시간이
16세기 ‘종교개혁(改革, reformed)’ 뒤, 17-18세기에 ‘부흥(復興, revival)’이 일어났다. 부흥(復興)은 종교개혁이 약화될 때 종교개혁을 강화하기 위해서 일어났다. 종교개혁이 약화된 것은 계몽철학(이성주의), 신비주의(이성주의), 식민주의(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발흥하면서 발생했다.부흥은 종교개혁을 반복하려는 사역자들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종교개혁은 바른신학 운동인데(가르침의 회복), 부흥 시대에는 열정과 세계선교(탈교회주의)를 추구했다. 생명을 건 헌신과 뜨거운 기도를 추구했고, 교회가 아닌 선교회를 중심으로 선교가 진행되었다. 그 부흥에서 헌신과 열기를 뜨겁게 올려야했고, 더 많은 지역에 더 많은 영혼을 구령하는 것을 목표한 것처럼 나타났다. 부흥은 외적인 가치는
‘사도’는 교회에서 유일한 직분이다. 예수께서 직접 세운 특별임시 직분(the extraordinary office)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도’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추구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성경에 근거한 '사도'는' 계시 담지자(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고 '교회 설립의 원형'이다. 교회 설립의 방식과 내용(복음, 바른 교훈)을 사도가 결정했다.사도 요한이 소천된 뒤에 사도의 후계자들을 ‘속사도(續使徒, Post-Apostolic, 100-200)’라고 부른다. 성경에 등장한 마가, 실라, 디도, 디모데 등은 계시 담지자이기도 하고, 사도의 직계 제자이기도 하다. 96년경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문서가 있지만, 성경이 아닌 속사도 문헌으로 구분한다. 사도
인간의 탐욕이 영적 진보와 훈련에 추가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기도는 대표적인 영적 훈련이다. 영적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순수해야 한다. 인간적인 수단을 첨가시키는 것은 육적이고 영적이지 않다. 육적인 수단의 대표는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말과 외형은 매우 경건하지만, 내면은 불신으로 가득 차있어 하나님 앞에 악하고 게으른 유형이다.거룩한 기도에 인간의 탐욕이 침투했는데, 그것은 ‘많은 시간의 기도’를 원하는 것이다. 많은 시간의 기도를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인지하지 않는 인간의 독단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많은 시간을 기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거룩하고 정결하라고 명령하신다.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그리스도인도 ‘많은 기도 시간’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많은 말’이 기도 응답과 관계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중언부언’이라고 제시했다.이방인이 하는 ‘중언부언’(do not keep on babbling like pagans. NIV)에는 ‘기도’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헬라어 ‘βατταλογήσητε’는 1회 등장하는 단어로, KJV는 ‘반복(repetition)’으로 제시했고, NIV는 ‘옹알이(babbling)’로 제시했다. 우리는 쉽게 ‘반복’하는 행동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NIV에서 ‘옹알이’라는 개념으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그리스도인이 형제와 이웃, 그리고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행위가 ‘중보기도’는 아니다. 기독교에서 ‘중보(仲保, mediation)’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신 ‘중보자(仲保者, the Mediator)’,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천상 통치에 적용하는 유일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웃을 위한 기도를 ‘도고(禱告, intercession)’라고 했다. ‘도고’라는 단어는 중국어를 차용한 단어이다. ‘중보’라는 단어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1970년대 미국 신사도 운동가 피터 와그너의 ‘intercession’을 한국 교회가 ‘중보기도’로 정착해서 사용하는 단어이다. ‘중보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는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형성되었다. 오순절주의는 1세기 예루살렘 오순절(사도행전 2장)에 임한 성령의 한 현상인 ‘방언’을 성령 세례의 표로 주장하는 신학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은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는 기능을 했는데, 오순절주의에서는 방언을 개인적인 ‘성령세례의 증표’로 세웠다. 방언은 오순절주의의 기본이고 다른 복음주의 교회와 구분할 수 있는 표식이다. 성도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오순절주의는 방언을 추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성령세례와 방언에서 오순절주의는 ‘방언’ 사모를 추구한다. 방언이 임하지 않으면 성령세례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1898년 칸사스의 토페카(Topeka)에서 감리교 목사 챨스 파함(Charles Parham.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묻는 제자들을 향해서 답하지 않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말씀했다."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18)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이해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제자들(교회)이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를 증인하게 될 것이다. 1) 권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권능을 받는 것이다. 2) 권능을 받아 행하는 것은 예수를 증인하는 것이다.‘증인’을 ‘증거’, ‘증언’으로 이해한다. ‘증인’은 ‘마르투스’인데 ‘순교자’로 의미가 전이 되었다. 예수를 증인(마르투스)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정이철 목사는 미주 인터넷 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고, 이재위 목사는 미주 침례교 목사인 것으로 보인다. 이재위 목사의 글을 페이스북에서 페친이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이하 세이연)의 글을 링크 시킨 것에서 보았다. 이재위 목사의 글 중에 “믿음을 아무 증거를 보지 못하여도 믿어지는 것이 믿음”에 대해서 심각한 오류가 아니고 판단이 불가능한 문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순 해프닝인줄 알았는데, 바른믿음에 “미 남침례교 정이철목사 표적삼아 긴급이대위 결성”이라는 기사를 보면서 상당히 당황했다. 이 사태에 대해서 심히 우려가 크다.첫째
성도는 성령의 충만해야 한다(엡 5:18, 개역/※개역개정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번역했다. 영역으로는 “be filled with the Spirit”이다. 개역개정은 성도를 충만하게 하는 주체가 성령으로 이해되도록 번역했다. 이와 비슷한 형태 번역은 행 2:38이다. the gift of the Holy Ghost(KJV), ‘성령을 선물로’(개역)를 ‘성령의 선물’(개역개정)으로 개정 번역했다) 성령 충만 받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성도 당사자의 선택이나 열정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가 성령 충만을 소유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시도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이 불가능하다.그럼에도 성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 구도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가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