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4 11:09 (토)
새물결 플러스 대표 김요한 목사는 직통계시를 즐기는 사람인가?
상태바
새물결 플러스 대표 김요한 목사는 직통계시를 즐기는 사람인가?
  • 정이철
  • 승인 2017.11.30 11:08
  • 댓글 1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9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요한 싸가지없는 놈 2017-12-04 10:36:55
정이철 목사님, 김요한 박수무당의 예언기도에 대해서 직격탄을 날려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김요한이 요즘에넌 안수기도까지 함부로 한다고 합니다. 정말 앞으로 걱정이 많이되는 불건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최근의 글에서는 가당치 않게 목사라는 놈이 유교의 몇 글자를 나부렁거리면서 감기 목사님에게 싸가지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야 말로 정말 싸가지가 없는 호로자식이 아니겠습니까? 정이철 목사님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위해 신학으로 논하는데, 이 새끼는 감히 공자의 유교를 들먹이면서 합부로 목사님에게 싸가지가 없다고 하였는데, 대충 나이로 보아서 지 놈의 새끼보다는 목사님이 연장자이신 것 같은데, 감히 싸가지지 없다니요. 싸가지 없는 호로상놈의 새끼가 아니겠습니까? 예언기도라도 제대로 하면서 싸가지 없이 굴면 그래도 낫겠습니다. 사람의 심리를 다 눈치채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 것처럼 행세를 하니, 사기꾼 무당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 싸가지 없는 놈은 예언기도 한다고 할 째비도 안되는 놈입니다. 김요한이는 정말 싸가지기 없는 놈입니다.

베드로 2017-12-04 09:57:58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가지 더 여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기독교에서 '계시'라고 하는 것은 영존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어 보이시는 섭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성령님의 사역은 여기서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요? 흔히 말하는 대로 말씀을 ‘적용’하는 것도 성령님의 사역이라면, 저는 그렇게 적용하는 작업 자체도 일종의 “계시”라고 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적용하시는 “계시적 사역”이 없이 어떻게 주님을 믿을 수 있는지요?

# 그리고 "계시"를 논할 때 흑백논리처럼 정경적 계시가 아니면 아무런 "계시"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은사지속주의자가 말하는 "계시"는 당연히 정경적 계시가 아니지요. 하지만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계시”이지 성경의 권위를 가진 “계시”라는 의미의 계시는 아닙니다.

#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 ‘총괄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 20:30에는 예수님의 지상사역에 대해서만도 다 적지 못했다고 기록하는데, ‘총괄절’이라는 표현은 과하다고 생각됩니다. 성경은 인간이 구원받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충분한’ 내용만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은지요.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 분의 사역을 어떻게 한 권의 책이 다 담을 수 있을까요?

# 고전 13:12 후반부에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온전한 것”이 정경의 완성을 가리킨다면, 신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정경이 완성되었기에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명확하다면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 다른 해석이란 같은 뿌리의 다양한 표현이 아니라, 정말 다른 해석입니다.)

이창모 2017-12-04 08:56:57
고전13:10에서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재림 주’가 아니라 ‘재림의 때에 있을 완전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분’보다 ‘것’이라는 단어 선택이 오히려 더 어울릴 것입니다.

또 초대교회 당시의 바울과 고린도교회에서 ‘정경의 완성’은 개념조차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당시의 바울(물론 바울은 나중에 파루시아의 때를 바르게 수정했습니다)과 초대교회는 ‘파루시아’가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있을 것이라는 재림 대망의 기대로 충만했었습니다.

특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에서 ‘장성한 사람’은 더 이상 성장이 필요 없는, 즉 성장이 완성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이 완성될 때는 ‘파루시아’의 시점일 것이며, 교회가 완성된 그때에는 미성숙한 교회에서나 필요한 성령의 은사(어린아이의 일)들은 당연히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후반에 은사들이 눈에 띄게 사라져 간 것은 성경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회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의 교회가 완성된 교회(성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 나오는 ‘기름’을, 헬라어 단어의 뜻만 가지고 초대교회 당시의 기름이 ‘치료의 목적’으로만 쓰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름’은 초대교회 후반까지도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는 종교적인 의미(상징)로 교회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2017-12-04 01:36:23
안녕하세요, 행복한 사람님...^^

1. 고전13:10의 '온전한 것'이 '정경의 완성'인지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의미하는지는 학자마다 견해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명확하게 "정경이 완성될 때"라고 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라고 분명하게 말했다면 이런 소동이 없겠지요...ㅠ

일단 몇 명의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먼저 님께서 거명하신 칼빈의 성경주석 원서를 번역한 글에 의하면 '온전한 것'을 성도의 결승점 즉, 성도의 죽음으로 보았습니다.
성도는 죽음으로 인해 육체와 함께 많은 연약한 것들을 벗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9절의 '부분적'이라는 것을 "불완전함'으로 보았고 그것을 10절의 '부분적'에 와서는 '연약함'으로 보았습니다.(지금 우리의 논의와 전혀 다른 각도의 해석을 합니다...ㅡ,.ㅡ;;)

매튜 헨리의 주석에 의하면, 그는 '온전한 것'을 천국에서의 '상황'으로 서술합니다.
천국이 도래하려면 응당 주님의 재림이 있어야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재림에 대한 언급은 전혀없이 오직 천국에서의 상태를 설명하며 그러한 상태가 '온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서문강 역)이라는 단편집에 의하면, 그는 8절의 강해에서 사도 요한의 계시록의 완성을 마지막으로 이적적인 은사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말하면서 은사의 종결을 예측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경의 충족성때문입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은사자가 죽으면 그 은사도 소멸되기 때문에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지속적인 은사자의 출현이 필요했으나 성경의 완성으로 이젠 교회가 은사자에게 기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뒷부분에서 은사의 불필요성을 마지막 때로 확장하여 또 다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들을 가진 사람이 죽으면 그 은사들도 다 중단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총체적으로 생각해 볼 때도 그러한 은사들은 멈추게 될 것입니다. 심판 날이 오게 된 이후에는 그런 은사들이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10절의 '온전한 것이 올 때'의 설명인데, 에즈워드는 '온전한 것'을 '교회가 온전한 상태에 이르게 될 때'로 해석하면서 중의적 해석을 합니다.
즉, 상대적 온전함과 절대적 온전함입니다.
상대적 온전함이란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의 교회로서 은사자들의 은사가 필요한 시기를 '불완전한 교회의 (어린아이와 같은)상태'로 말하며, 성경이 완성된 이후의 교회를 '완전한(장성한) 상태의 교회'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절대적 온전함은 '천국에서의 교회'를 말함으로써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정경의 완성된 시기의 교회'와 '천국에서의 교회' 둘 다를 함의합니다.


2. 은사의 지속 여부는 치유의 은사를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의 여러 서신서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는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형제요, 동역자요, 동료 군사인 에바브라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빌2:25-27).
바울은 선교 여행 때 자기와 동행한 드로비모를 고치지 못하고 아픈 채로 밀레도에 남겨 두었습니다(딤후4:20).
바울은 자기의 애제자 디모데를 고칠 수 없었고 대신 민간요법을 디모데에게 권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의 병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고후12:7-10).
이미 바울 말년에 치유의 은사가 빠르게 폐하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서도 아픈 그리스도인이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부탁하고 처방으로 기름을 부을 것을 가르칩니다.
중요한 건, 기름을 바르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의학적인 처방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기름을 바른다는 의미로 쓰인 그리스어가 ‘크리오’(chrio;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 받은 자’에서 나온 단어로 거룩한 기름 부음)가 아니라 ‘알레이파오’(aleipho; 몸을 문지르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서신서 어디에도 치유의 은사를 바라야 한다고 나와 있지 않으며 특히 예언의 은사는 사도 요한이 못을 박았습니다.(계 22: 18)

바울처럼 2017-12-03 02:18:44
이창모 목사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논 할 수 있으나, 우선 10절에 사용 된 '것'이라는 의존명사의 사용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이 문장에 사용된 '것'은 '부분적으로 하던 것'의 댓구로서 '온전한 것'입니다.
9절에서 사용된 문장의 구조도 같은 댓구 형식을 취하고 있구요.
그리고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일부분 즉, '희미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온전한 것'이란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것은 완성된 정경 안에 담겨 있습니다.

제 생각엔... 만약 사도 바울이 '온전한 것'의 의미를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식하고 글을 썼다면 '것'이라는 (비인격)의존명사 대신 '분'이라는 (인격)의존명사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니면... 사도 바울의 예언 역시 흐릿한(부분적인) 것이라 그런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은사가 분명 소멸되긴 소멸되는데 그 때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다른건 모르겠지만 제가 만약 사도 바울의 입장이었다면, 그리고 그 때가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면, 저는 '온전한 것' 대신 '온전하신 분'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ㅠ

(p.s. 그러나 '것'이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의미한다면 '것'의 사용도 이해되긴 합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