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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물결 플러스 대표 김요한 목사는 직통계시를 즐기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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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물결 플러스 대표 김요한 목사는 직통계시를 즐기는 사람인가?
  • 정이철
  • 승인 2017.11.30 11:08
  •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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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처럼 2017-12-05 16:58:53
5. "정경이 완성되었기에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명확하다면 왜 신자들 사이에 해석이 다른 것입니까?"
=> 가장 큰 원인은 언어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고대언어입니다.
우리는 몇 십년전에 사용하던 어르신들의 지방언어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물며 중동의 자그마한 나라에서 사용하던 언어의 뜻과 용례,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의미도 점차 변하는데 그것을 제대로 번역하는 작업이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16세기 인문학의 발달로 고대언어에 대한 연구작업이 활발했던 덕에 중세의 묻혀있던 진리가 재발견되었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점...
만약 종교개혁시대에 은사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들었다면 그들 중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종교개혁자들 중에는 그러한 은사자들이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개혁은 성공해서 하나님의 진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영어성경에 기록 된 'tongues'(타언어, 외국어)와 'language'(언어)라는 단어가 중국어 성경에 '방언'(方言)으로 번역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중국어 성경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방언'을 원래의 의미를 살려서 '타국어'나 '외국어', 혹은 '언어' 등으로 세밀하게 구분하여 번역하지 않고 '방언'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왔는데 당시는 우리나라가 중화문화권에 속했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분명 타국어, 외국어, 언어 등이 분명한데 오늘날 우리는 방언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이렇듯 고대어를 아는 것만으로도 힘겨운데 그나마 성경이 번역에 번역을 거치면서 그 의미가 변합니다. 그래서 깊은 공부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온전한 것’을 ‘정경의 완성’으로 보는 것은 ‘석의’가 아니라 ‘끼워 맞추기’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그게 그거 아닌가요? 앞에 제가 퍼즐이라는 단어를 인용하지 않았던가요?
우리는 지금 퍼즐 맞추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 하면 퍼즐조각이 깨진다는 전제 하에 조심스러운 작업을 해야겠지요.

"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데, 어떻게 소망이 필요 없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믿음은 어떻습니까? 정말 믿음(pistis)이 천국에는 없을까요? 천국에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충성하는 것이 없습니까?"
=> 롬 8:24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님께서는 이미 천국에 계신 상태에서 천국을 소망하시나요?
그리고 이미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데 "나는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영원히 믿을 꼬아..." 이렇게 말씀하시나요?
이미 이루어진 소망은 더 이상 바랄 필요가 없으며 이미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은 사실(fact)이라고 하지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 이래도 천국에서 믿음과 소망이 필요한가요?
믿음과 소망은 이 땅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이 땅에서와 같이 천국에서도 유지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 로마서 8:24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전 13:13의 사랑 뿐 아니라 믿음과 소망도 함께 있을 곳이 어디인지는 충분히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남은 문제는, 그러면 이 땅의 어느 시기가 '온전한 것'이 오는 때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까지 굳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바울처럼 2017-12-05 16:22:35
1. "그렇다면 비신자에게 ‘감추어져 있던’ 진리를 성령님의 역사로 ‘보게 되는 것’ 또한 ‘계시’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문장이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습니다. 비신자에겐 영원한 비밀일 뿐입니다.

2. "...이런 원리를 바탕으로 은사를 ‘분별’해야겠지만, 원천적으로 정죄하고 차단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 그럼 결과론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파훼하는 것이 이단뿐일까요? 전국의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다른복음은 어떻습니까? 주중에 교회밖에서 벌어지는 각종 은사집회들... 그런 곳을 찾는 사람들이 담임목사님께 허락받고 그런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 봤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용한 점쟁이를 찾듯 찾아다니며 자신의 지인들도 꾀어 데려감으로써 점쟁이에게 칭찬받는 것을 자랑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시국에 뻔히 모든 것이 보이는데 소잃고 외양간 고칠 일 있습니까?
원천적으로 정죄하고 차단하는 것이 맞습니다.

3.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이 어제와 다른 말씀이라고 단정 지으시는 것 같네요."
=> 단정짓는 것이 아니라 은사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이 같다면 뭐하러 그렇게 쫓아다니냐는 것입니다. 과연 그 사람들이 고리타분하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자 은사자들을 쫓아 다닐까요? 너무 순진하신건지 아니면 그들을 옹호하시고 싶으신건지...ㅡ,.ㅡ

"제가 볼 때엔 '온전한 것'이 ‘정경의 완성’을 가리키기보다는 ‘구원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같은 개념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 사실 그것은 사전적(절대적) 의미를 말할 때는 '천국의 상태'가 맞습니다.
그러나 말이나 글에는 용법상 그 절대적 개념과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이해하고 알아듣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면, 초등학생 아이에게 "오, 철수 이제 다 컸네."라고 했다면 철수가 성인이 되었다는 뜻일까요? 누가봐도 이것은 문맥 상 철수가 아직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의젓해졌다는 의미임을 알지요.
제가 이런 예를 든 이유는, 언어란 그 용법에 있어서 단어의 절대적 의미만을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시대적 상황과 문맥의 앞뒤 상황, 그리고 저자의 의도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 시대적 상황: 은사자인 사도 바울이 은사가 급격히 쇠하여 진 시기.
*. 문맥의 앞뒤 상황: 8절에서 "폐하리라", 13절에서 "항상 있을 것인데" 등등.
*. 저자의 의도: 은사의 남용(어린아이의 행동)에 대한 질책과 권면.

"오늘날의 은사 = 누룩, 위험한 것, 귀신적인 것”이라고 단정 지으시기엔 아직 설득력 있는 근거를 보여주신 게 없습니다."
=> 제가 남을 설득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반대로 이번엔 베드로님께서 오늘날의 은사가 매우 성경적이라는 근거를 찾아 저를 이해시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베드로 2017-12-05 13:40:44
답변 감사드립니다^^ 제기하신 부분에 맞춰 답변을 하겠습니다.

1. 개혁주의에서는 ‘계시 = 성경’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첫 댓글에서 계시를 이렇게 정의해주셨습니다. “'계시'란 가려지고 덮어져서 감추어진 것을 벗기거나 열어서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 그렇다면 비신자에게 ‘감추어져 있던’ 진리를 성령님의 역사로 ‘보게 되는 것’ 또한 ‘계시’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시'로 표현하든, '조명하심'으로 표현하든, '깨닫게 하심'으로 표현하든, 골자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여러 의미가 담긴 ‘계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혼란이 가중된 것 같습니다.

2. 은사가 몇 가지가 있는지 몰라서 은사의 한계를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은사 분별은 공동체가 “성경에 비추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전 12장에는 그리스도의 몸을 유익하게 함, 하나됨, 돌봄을 강조하고, 고전 14장에서는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나와 있네요. 이런 원리를 바탕으로 은사를 ‘분별’해야겠지만, 원천적으로 정죄하고 차단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3.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제와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시지요.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이 어제와 다른 말씀이라고 단정 지으시는 것 같네요. 지금까지 언급하신 증거 구절은 고전 13장뿐이고, 그것도 그나마 의견이 갈리며, 제가 볼 때엔 '온전한 것'이 ‘정경의 완성’을 가리키기보다는 ‘구원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같은 개념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은사 = 누룩, 위험한 것, 귀신적인 것”이라고 단정 지으시기엔 아직 설득력 있는 근거를 보여주신 게 없습니다.

4. 인정합니다. 요한이 과장법을 사용한 것 같네요.

5. ‘총괄적’이라는 표현을 ‘모든’이라는 표현으로 제가 오해해서, 성경만으론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 수 없다는 의미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은 인간이 구원받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충분한’ 내용만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은지요”라고 덧붙였고요. 그런데 칼빈을 인용하시며 하나님의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고전 13장 해석에 대한 제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사님의 견해가 옳다고 가정해도, 12절 말씀과 상충되지 않느냐는 의미로 질문을 드렸습니다. 다시 여쭙지만, 정경이 완성되었기에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명확하다면 왜 신자들 사이에 해석이 다른 것입니까? 단지 이 본문에 국한해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정작 이 본문 해석에 있어서도 ‘온전한 것’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지 않다고 하시는데, 다양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단지 ‘중의적이냐 단편적이냐’라고 표현할 만큼 적은 차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온전한 것’을 ‘정경의 완성’으로 보는 것은 ‘석의’가 아니라 ‘끼워 맞추기’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고전 13:13을 인용하셨는데, 혼란을 더 가중시키는 것 같습니다. 롬 8.24에 대한 목사님의 해석을 전제로 ‘믿음, 소망, 사랑’에서 소망을 제외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롬 8.24에선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소망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고 있지, 일반적인 의미의 소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도 않고, 소망이 천국에서는 필요 없을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데, 어떻게 소망이 필요 없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믿음은 어떻습니까? 정말 믿음(pistis)이 천국에는 없을까요? 천국에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충성하는 것이 없습니까?

바울처럼 2017-12-04 16:05:03
안녕하세요, 베드로님...^^

1. '계시'에 관한 개혁주의적 글이나 책은 많이 있으니 개인적으로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시의 적용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성령님의 '적용'은 '깨닫게 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시는 크게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음을 아실겁니다.
일반계시는 자연 삼라만상에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작품임을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일하심 때문입니다.
한 예로, 성령님의 은혜가 없는 비신자들은 창조된 삼라만상을 그냥 '자연적'이란 말로 표현하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성경의 말씀을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없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겠습니까?
그들은 성경을 신화나 설화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그들보다 똑똑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을까요?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에 대한 성령님의 일하심(적용)입니다.

2. 저는 흑백논리로 말씀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베드로님께서 은사를 허용하신다면 그 한계를 어떻게 정하고 허용하실건가요?
명심하셔야 하실 것은, 누룩은 단 한 점만으로도 순식간에 온 빵을 뒤덮는다는 것입니다.

3.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어제의 말씀과 다른 말씀을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성경의 말씀과 다른 말씀을 하신다면 성경을 주신 의미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4.총괄적 (總括的) : [관형사·명사] 개별적인 여러 가지를 한데 모아서 묶은. 또는 그런 것.
제가 쓴 총괄적이란 문자의 의미를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ㅠ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을 다 적으려면 왜 못 적겠습니까? 불과 3년입니다. 365일 X 3년이면 1095일입니다. 충분히 적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제가 즐겨 읽는 필립 샤프의 교회사 전집(8권) 중 5권 한 권만 하더라도 내용만 794 페이지이며,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파 교의학(단권 축약본)은 내용만 1410 페이지입니다.
사람은 하나를 알면 그와 비슷한 여러 상황을 그 하나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예수님의 사역을 낱낱히 기록하지 않고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만 적더라도 그 분의 인성과 신성, 사역의 목적 등을 알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즉 저는 사도 요한의 그 표현을 알레고리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5. 그렇다면 반대로 베드로님께 묻겠습니다.
성경 한 권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누차 말하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은 것은 알 필요가 없기에 알려주시지 않은 것이라면서 그러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헛된 것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에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에 집중하라고 했지요.
종국에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여러 서간문을 보면, 우리의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은 질병 속에서 천국을 고대하며 살았지 능력있는(?) 은사자들을 불러서 안수받지 않았습니다.

(p.s. '온전한 것'의 해석이 다양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중의적으로 볼 것이냐 단편적으로 천국의 때로만 한정할 것이냐의 차이입니다.
제가 12절의 '그 때를' 천국의 때로만 보지 않고 이 땅에서의 때 즉, 정경의 완성의 시간을 보는 이유 중 하나는 13절에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세 가지는 이 땅에 존재할까요? 아니면 천국에 존재할까요?
제 생각에 천국에서는 사랑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은 오직 이 땅에서만 성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롬 8:24 참고)
누구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도 바울이 13절에서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존재하는 곳은 천국이 아닌 이 땅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저는 (중의적으로 볼 때 천국의 때가 당연히 (절대적)온전함을 인정하지만)정경의 완성시기 즉, 천국이 아닌 이 땅에서의 때를 지지합니다.)

바울처럼 2017-12-04 14:01:00
이창모 목사님의 답변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견해에 대부분 수긍합니다만 부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적어봅니다.

1. '온전한 것'이 천국에서의 시간이나 상태를 의미한다면 '것'을 사용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생각한다면 조나단 에즈워드의 중의적 해석도 용납된다고 봅니다. 저도 그러한 차원에서 '정경의 완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구요.

2. 맞습니다. 당시 사도들이 로마 제국의 핍박시대를 말세로 보았기에 낱권인 두루마기 성경이 훗날 정경으로 엮어져 나오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3. '장성한'의 때가 반드시 천국에서의 때로 한정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입니다. 바울도 13:11에서 자신의 상태를 '장성한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14:20에서도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앞서 표현했듯이 상대적 장성함이며 목사님의 설명은 절대적 장성함입니다.
둘 다를 함의하는 중의적 표현으로 볼 수 있으나 그러나 문맥을 보면 이 두 문장은 상대적 장성함으로 보입니다. 즉, 이 땅에서의 (상대적)장성함이지요.

4. 은사가 사라졌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기록 속에서의 판단이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모르는 어떤 교부들의 글에서 은사를 옹호하는 기록이 있었다면 재고해야겠지요.
그리고 은사가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용납하는 순간 정통 교리는 훼손되며 모든 교회는 순식간에 고린도교회화 될 것입니다.

5. 약5:14 이외에도 다른 곳에서 다른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면 이해되나 본문에서만 환자에게 단지 의료용 지침으로 사용되었기에 일부러 폭넓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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