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웨슬리의 관점으로 보는 신사도 은사 운동 평가 1


필자는 요한 웨슬리의 관점으로 신사도 운동을 평가하는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현재 신사도 운동의 영향은 한국 감리교회도 비껴가지 않는다. 한국 감리교회 내에서 일부 목회자가 신사도 운동의 영향권 아래 있거나 그 때문에 교회에 분란을 초래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고, 감리교 밖에서는 신사도 운동의 신학적 근원이 웨슬리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도 있다. 따라서 웨슬리의 눈을 빌려 신사도 운동을 평가해 보는 것은 감리교 자체 내의 입장을 한번 정리해 볼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근거 없는 공격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필요한 작업이라고 본다.

이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신사도 운동에 관해서는 다양한 선행 연구가 있었기에 장황하게 반복하지 않고 요점만 정리한다. 다음으로 그에 대응하는 웨슬리의 관점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신사도 운동과 연결하여 웨슬리에게 쏟아지는 부당한 비판을 비판하겠다.

 

I. 신사도 운동 이해

신사도 운동 또는 “신사도 개혁운동 (The New Apostolic Reformation)"은 풀러 신학교 교수였던 피터 와그너 (1930-2016)가 만든 용어이다 (와그너 2000:23; 2007:24). 이 용어는 신약시대 사도의 직임과 초자연적 은사가 현재에 재현되고 있다는 주장을 압축하고 있다 (see 와그너 2000:23, 25, 32). 와그너의 과감한 주장에 따르면, "새로운 사도 개혁 (운동)"은 전통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목회와 선교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16세기 종교 개혁보다 새롭고 (와그너 2000:23),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마치 초대교회 12사도와 같은 위치를 갖는다 (와그너 2000:27).

역사적으로 보면, "독립적인 은사주의 교회," "전통적인 오순절운동"과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 (1906년)을 통해 나타났던 성령의 역사가 점차 심화되어, 1970년대에 기도 운동으로 1980년대에는 선지자 출현으로 1990년대 들어 사도들의 등장으로 연결되고 드디어 2001년 경부터 “제 2의 사도시대”가 열렸다 (와그너 2007:27, 28). “신사도” 지도자들이 이끄는 교회들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은사들은 “방언,” “치유, 귀신 축출, 영적 전투, 예언, 성령의 역사로 쓰러짐” 등이다 (와그너 2000:29, 32).

와그너는 이처럼 미국과 캐나다에서 일어난 빈야드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성령 은사 운동을 “신사도 운동”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와그너는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에 대한 이해가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그룹 내의 성령 은사 운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로 말미암아 미국 교회의 신학과 동향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 교회에 목회적 혼란을 주고 있다. 심지어 금이빨과 금가루 이적 (헤너그라프 2010:25; 박영돈 2014:60, 61; 정이철 2012:55, 57)과 같은 정체불명의 현상이 신사도운동의 이름으로 확산되고 있다. 금이빨과 금가루 이적은 성령의 은사인가 아닌가? 성령이 원하시면 무엇이든 가능한 것인가? 이것을 판단할 기준은 무엇인가?

필자가 보기에 이 운동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상호 연결된 세 가지 질문을 피해 나갈 수 없다. 첫째, 현재에도 사도직은 계승되는 것인가? 둘째, 지금도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식의 계시가 가능한가? 셋째, 신사도 운동에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들이 성령의 은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웨슬리 (1703-1791)에게서 찾아보려 한다. 감리교도인 필자가 목회적 현안에 대한 지혜를 감리교 창시자에게 찾아보려 하는 시도는 자연스럽다. 더구나 웨슬리는 이 문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18세기 영국 감리교 집회 도중에 다양한 영적 현상들이 일어났고, 웨슬리가 그 현상에 대해 분석과 지도를 했다. 복음적 신학자이자 열정적인 현장 목회자였던 웨슬리의 균형 잡힌 은사 이해는 현 한국교회에 문제가 되는 신사도 은사 운동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력을 제시하리라고 본다. 이런 이해를 전제한 채, 필자는 웨슬리의 사도직과 계시에 대한 이해를 간략히 살펴본 후 이 글의 초점을 그의 은사 이해에 맞추려 한다.

 

II. 웨슬리의 사도직 이해

사도 (使徒, apostle, ἀπόστολος)는 ‘보내진 자’ (“the one who is sent”)라는 의미를 갖는다 (Shuler 1996:44). 사도는 예수님께 선택되어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12제자를 가리키거나, 최소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까지만 한정 된다 (Marshall 1988:40).

그러므로 사도전승 (사도계승, apostolic succession)이란 말이 사도의 연속성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도는 초대 교회에 한정되고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교회 지도자를 사도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지만,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최초의 증인 (“original witnesses")이었다는 점에서 잘못된 적용이다 (Marshall 198:40).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교황을 12 사도 중의 한명인 베드로의 후계자로 간주하는 방식으로 사도전승을 주장하고 있으나 (see Fahey 1991:50),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교황의 수위성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see Calvin 1960:1102; Kerr 1966:137), 초대교회 사도들과의 직제 (office)에 관한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Hefner 1984:230).

다만 현재 교회 신앙과 실천이 사도들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도적 (apostolic)이란 말을 쓰는 것은 가능하고 또 교회는 사도적이어야만 한다 (Marshall 1988:40; Pannenberg 1998:402, 403). 이런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위르겐 몰트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계속해서 그리고 온전하게 선포하는 복음적 전승”이 사도전승이라고 주장한다 (Moltmann 1977:359). 감독이 안수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사도전승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어받는 것이 사도전승이다 (Griffiss 2007:62).

요한 웨슬리가 속해 있던 영국 국교회 (성공회)는 종교개혁 사상, 특히 칼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González 1987:193, 195). 따라서 영국 국교회가 소중히 생각한 것은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있느냐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복음과 그리스도가 사역과 성례에 타당성을 주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Avis 2002:222). 목사 안수에 대해서, 웨슬리는 처음에 감독에게 안수 받지 않는 경우를 반대 했지만, 점차로 신축적인 태도를 가졌다 (Campbell 1991:90-92).

웨슬리의 깨달음에 의하면 감독에게 안수 받는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탁월한 목회자가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목회자의 여부는 어느 감독에게 안수 받았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많은 이를 [하나님의] 의”로 인도하느냐에 달려 있다 (Lawson 1963:82, 83). 즉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은 족보가 아니고, 그 마음과 실천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느냐다. 알버트 아우틀러 (Albert C. Outler)는 결국 웨슬리가 중시하는 것은 사도적 사람이 아니고 사도적 가르침이라고 본다 (Outler 1964:307). 사도전승이란 안수를 통해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의 지속성을 의미한다.

가톨릭교회는 현대적 이슈와 왕성한 대화를 시도했던 제 2 바티칸 공의회 (1962-1964) 이후에도 가톨릭 교인들이 개신교회에서 성례를 받는 것을 공식적인 문서를 통해 금지하고 있다. 개신교회의 사도전승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Dulles 1978:161, 162). 그러나 루터교 종교 개혁자들에 의하면 가톨릭교회를 개혁한 교회는 새로운 교회가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 가톨릭 (보편적) 교회이다 (푈만 2000:384). 웨슬리의 이해도 같은 논리선상에 있다. 웨슬리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진정한 교회는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어야 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런 점에서 가톨릭교회에 포함되지 못한다. 거기에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지도 “바르게 집행되는” 성례전도 없기 때문이다 (Outler 1964:313).

지금까지 논의를 신사도 운동의 사도직 재현 주장에 적용해 보자. 신사도 운동 주창자들이 초대교회 사도들의 신앙과 실천을 이어받는다고 하지 않고 사도직 자체가 재현된다고 주장하는 한, 그들은 전혀 종교개혁자 그리고 웨슬리의 사상에 맞닿아 있지 않다. 자신들을 사도로 부르는 어떤 성경적/신학적 근거도 없거니와 자신들을 사도로 호칭한다고 해서 권위나 지도력이 자동적으로 강화되는 것도 아니다. 

 

Ⅲ. 웨슬리의 계시 이해

계시란 감추어져있던 것이 드러남을 뜻한다 (Pinnock 1988:585).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있다해도 희미할 뿐이고),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셔야만 비로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본다 (see Barth 1928:198). 인간과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세 가지 방식, 즉 예수 그리스도, 성경, 그리고 설교를 통해 말씀 하신다 (Morgan 2010:54-58).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성서는 정경화 작업이 끝난 이후 더 이상 사사로이 추가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더 이상의 예언적 또는 사도적 대변인은 없다. 이러한 특별한 은사와 능력을 가진 이들은 이미 사라졌다” (Lightner 1991:22).

이제 신자는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 뜻을 분별하고 성령께서 인간의 부족한 이해력을 돕는다 (Erickson 1985:246-247).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영적 거인들이 남긴 서적들을 참고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성경을 대체할 수 없다.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노력은 이미 성경이 충분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다는 점에 무의미하고, 자신의 상상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기 쉽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와 같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정통적인 계시/성경 이해를 배경으로 한 채 웨슬리의 관점에 대해 논구해 보자. 웨슬리에게 있어, 계시란 “하나님이 신적 메시지를 소통”하시는 것이다 (Jones 1995:18).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고 (Jones 1995:19), 영감으로 기록되었기에 (Thorsen 1990:131), 어떤 오류도 없는 (Avis 2014:302), 정경이다 (Whaling 1981:147). 따라서 성경은 “권위를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Wesley 1987:220),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이다 (Jones 1995:17). 웨슬리는 자칭 ‘한 책의 사람’ (homo unius libri)으로서 모든 감리교인들이 자기처럼 되길 바랬다 (Jones 1995, 31). 본인이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성경을 따르듯이 (김영선 2002:37), 감리교인들이 성경적 기독교인 (Scriptural Christian)으로 살기를 소원했다. 감리교 부흥 운동의 목적은 땅위에 “성경적 기독교” ("biblical Christianity")를 세우는 것이었다 (Cannon 1946: 20).

웨슬리는 이처럼 종교개혁의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강령에 철저했지만, 스탠리 J. 그렌츠는 그 후예들 가운데 자유주의자들은 성경보다 이성이나 경험을 더 중시 한다고 비판한다 (그렌츠 2013:132, 133). 필자가 보기에 현대에 와서 이런 경향이 심화되는 것은 웨슬리 사변형 ("the Wesleyan quadrilateral")란 용어를 만들어낸 아우틀러의 책임이 크다. 그는 웨슬리에게 신앙과 신학함에는 4가지 요소-성경, 전통, 이성, 경험-가 가이드라인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아우틀러가 성경의 우선성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웨슬리 사변형이라는 용어는 사람들을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그 뒤 신학적 훈련이 미숙한 이들과 자유주의 경향의 학자들은 마치 그 용어가 웨슬리 자신의 용어이거나, 또는 웨슬리의 입장을 정확히 대변하는 것으로 오해하거나 왜곡해 왔다. 계속적으로 혼란이 야기되는 것에 대해 아우틀러는 애초 그 용어는 하나의 은유적 (“metaphor”) 표현이었을 따름이라며, 자기 의도와 다르게 웨슬리를 오해하도록 했다고 후회하는 마음 (“regrettable”)을 전한다 (Outler 1985:11,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캅 (John B. Cobb, Jr.)은 웨슬리 4변형에서 어느 한 요소가 다른 요소들에 비해 더 권위를 가질 수 없고 4요소는 다 그 나름대로 “결정적” (decisive)이라고 주장한다 (Cobb 1993:62). 즉 성경, 전통, 이성, 경험 4요소가 공히 같은 무게의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캅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웨슬리의 뜻인 듯이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필자는 지금까지 자유주의자들과 아우틀러의 영향으로 웨슬리 성경관에 오해가 있어왔음을 밝혔다. 웨슬리에게는 성경이 궁극적인 권위다. 전통, 이성, 경험 등은 성경을 해석하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김진두 2009:25). 그리고 그것들도 성경에 의해 판단을 받고 지도되어야 한다 (see Campbell 1999:39).

이런 이해를 가지고 신사도 운동에서 직접 계시를 받는다느니 직접 음성을 듣는다든지 하는 주장을 점검해 보자. 와그너는 그의 책 『Dominion』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사도적인 귀”를 가지고 있는 자신도 “성령의 음성”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주장한다 (와그너 2007:29, 41). 즉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주로 이단들이 성경을 대체하는 교리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교주의 권위 강화를 위해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듣는다는 소위 직통계시를 주장하는데 신사도 운동도 비슷한 유혹에 빠져 있다.

웨슬리는 그런 직통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의 상상에서 나온다 (see Wesley 1952:91). 감리교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직통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읽으며 깨달음을 얻는다. 웨슬리에게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길은 성경을 읽는 길 뿐이다 (이후정 2001:107).

 

 임성모 박사 / 옥스퍼드대학 박사, 감리교신학대학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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