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주의자들의 거짓방언 통역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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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주의자들의 거짓방언 통역 비판
  • 이창모
  • 승인 2017.08.2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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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31회)

들어가며

오순절주의의 방언은 고린도교회의 방언과 맥을 같이 하는 거짓 방언이다. 이 거짓 방언은 소통이 불가능한 그저 꽹과리 같은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의 거짓 방언은 당연히 통역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오순절주의의 거짓 방언을 통역한다면, 그 통역 역시 가증스러운 거짓 통역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통역이 가장 난처한 문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통역에서 거짓이 들통나버리면, 그 동안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둔갑시킨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순절주의자들 중에는 방언에 대해 말하는 자들은 많은데, 통역에 대해 말하는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오순절주의자들의 세계에서는 통역을 해야 진정한 고수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통역에 대해 말하는 자들도 방언에 대해 말할 때보다는 훨씬 더 어려워하는 것 같다. 아마 거짓 방언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것이므로 고린도전서 14장 2절, 4절 등으로 설명하면 비교적 쉽다. 이에 비해 거짓 통역은 고린도교회에도 없던 것이어서 100% 창작에 의존해야 하니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이들에게는 거짓 통역이라도 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거짓 통역은 거짓 방언을 참 방언으로 믿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유명한 인물이 자신의 방언을 통역해 주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자신의 거짓 방언을 참 방언으로 확신하고 방언에 미쳐 버린다. 이토록 거짓 통역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런데 몇몇 오순절주의자들은 자신의 방언 통역을 제법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방언기도가 그렇듯이 이들이 말하는 방언 통역도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은사라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면 방언 통역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설명을 살피기 전에 먼저 성경이 방언 통역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자.
 

성경이 말하는 통역의 의미

바울이 통역의 은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통역의 은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 “방언들 통역함”이라고 언급된 것으로 보아 ‘통역의 은사’는 ‘방언들’을 통역하는 은사임에는 틀림없다.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서 “통역함”으로 번역한 헬라어 ‘에르메네이아’(e`rmhnei,a)는 일반적으로 ‘통역, 해석’(interpretation), ‘번역’(translation)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다. 그러므로 “방언들 통역함”은 방언이라고 하는 언어를 통역하거나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1) 따라서 어떤 소리를 통역할 수 있다는 것은 통역의 대상이 되는 그 소리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소리가 일관성 있는 문법, 어휘 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언어가 아니라면(예를 들면 꽹과리 소리 같은), 그 소리를 설명할 때 ‘통역’이나 ‘번역’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며, ‘느낌’, ‘감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특히 고린도전서 14장 27절에서 명령법으로 표기된 “통역할 것이요”의 헬라어 ‘디에르메뉴에토’(diermhneue,tw)는 ‘두루 또는 샅샅이’를 뜻하는 ‘디아’(dia.)와 ‘해석하다’를 뜻하는 ‘에르메뉴토’(ermhneue,tw)의 합성어로서 완전한 해석을 강조하는 말이다.2) 즉, 방언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모두 다, 현장에 있는 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전달하라는 명령이 헬라어 ‘디에르메뉴에토’의 의미다.3)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통역’이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방언을 번역해서 방언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역자는 통역할 때 방언의 내용 중에 어느 한 개의 단어도 빼거나 더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느낌이나 감상, 또는 생각을 말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왜냐하면 통역의 생명은 방언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그대로 다른 언어로 바꾸어 전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배운 적이 없는 언어를 구사하는 초자연적인 언어 능력이라면, 통역의 은사는 배운 적이 없는 언어를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번역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4) 따라서 통역의 은사는 일반적인 통역 능력과는 다른,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그러므로 일반 통역자는 통역할 때 실수할 가능성이 있지만, 통역의 은사자는 실수 없이 방언을 완벽하게 통역할 수 있다. 이렇게 통역의 은사는 방언을 완벽하게 통역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통역의 은사로 거짓 방언을 가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고전14:28).

그러므로 통역의 은사도 다른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은사자에 의해 사용될 때 모자라거나 실패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순절주의자들은 자신이 하는 통역의 불완전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적당하게 변명해 합리화 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통역이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인위적인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통역은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방언을 통역하는 성령의 은사이므로 통역할 때 조금도 모자람 없이 완벽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통역의 의미

오순절주의자들은 통역의 은사로 방언을 통역하는 것은 어떤 외국어를 다른 언어로 통역하는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한다.5) 방언 통역에 대한 이들의 설명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방언 통역은 양쪽 언어를 다 아는 사람이 한쪽 언어를 다른 언어로 통역하는 일반 외국어 통역과는 매우 다르다. 외국어 통역은 단어 및 문장을 그대로 옮기는 번역이지만, 방언 통역은 문자적 해석과는 다르다. 방언이 지구상의 언어처럼 일정한 문법과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인 언어를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방언 통역의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방언을 듣는데 그 의미가 마음속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고, 타자를 치는 것처럼 한 자씩 보이기도 하고, 한국말로 들리기도 한다. 통역을 한다 해서 일반 외국어 통역처럼 모든 방언을 다 통역하지는 않는다. 방언으로 아무리 길게 기도하더라도 통역자는 몇 마디 요점만을 말할 수도 있고, 방언으로 짧게 기도하더라도 긴 말로 통역될 수도 있다."6)

"즉 방언 한 마디가 우리말 열 마디로 통변될 수도 있고, 반대로 방언 열 마디가 우리말 한마디로 통변될 수도 있다. ‘다다다다’ 하는 짧은 혀의 떨림 한마디에 시편 전체가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방언으로 30분간을 기도한다 하더라도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한마디 고백일 수 있다."7)

"조용기 목사나 존 바샴 목사의 주장을 빌리자면 통역은 방언을 듣고 깨달아지는 전체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며 일일이 각 단어 하나하나를 번역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8)

조용기 목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어떤 이가 방언의 메시지를 전할 때 전체적인 의미만이 마음에 깨달아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그 메시지에 담겨 있는 개개의 단어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때 통역을 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평소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말들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9)

김동수 교수는 방언 통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방언 통역은 방언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방언 통역은 방언의 내용을 모국어로 옮기는 것이다."10)

여기서 김동수 교수는 다른 오순절주의자들과는 달리 방언 통역도 일반적인 언어 통역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곧 “통역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리는 말을 담대하게 말하는 것이다.”11)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결국 다른 오순절주의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 통역에 대한 설명을 요약하면, “외국어 번역이 매 단어를 각각 다른 언어의 단어로 대치시켜내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방언 통역은 이와는 달리 전체적인 의미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것”12)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설명은, 자신의 방언 통역에 대해 방언의(언어와는 다른 영음이라는) 성격상 통역 내용이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다고 애써 변명하는 것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방언 통역이 언어를 번역하는 일반 통역과 다르다는 설명과 또 전체의 의미를 마음으로 깨달아 전달하는 것이라는 설명은 사실상 자신들의 방언 통역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방언 통역의 애매모호함을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어떤 이가 방언을 말할 때 때로는 그 메시지 중의 일부만 깨달아질 경우가 있습니다. 한 부분이 말로 표현될 때 그 부분이 깨달아지는 것처럼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이 풀린 만큼만 통역도 이루어집니다."13)

"당신의 방언이나 방언 통역이 조금 틀린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나는 당신의 방언이나 방언 통역이 온전해지도록 도울 것이다."14)

왜 이들은 방언 통역이 완전하지도 못하며, 또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말하면서 자신의 방언 통역에 대해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설명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방언 통역이 사실은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애매모호함을 미리 말하므로, 방언 통역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과 공격을 사전에 잠재우고, 자신들의 거짓 통역을 성령의 은사인양 위장하려는 속셈이다. 다음은 방언 통역에 대한 존 바샴의 말이다.

"집회가 끝난 후 그 모임에 참석했던 한 성도가 저에게 다가와 '원래의 방언 메시지는 짧고 반복적인 형태의 것이었는데 방언 통역의 내용에는 반복적인 것도 없고 방언 메시지 자체보다도 몇 배나 길므로 이것이 제대로 된 방언 통역이라고 받아들이기는 힘들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15)

존 바샴은 방언 통역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에 대해 다른 오순절주의자들과 똑같이, “방언 통역은 번역이 아니기 때문”16)이라는 변명으로 일축해 버린다. 존 바샴은 이런 거짓 통역의 허점을 합리화시키려고 다음과 같이 교묘하게 방언 통역을 설명한다.

"그는 한때 상업적 화가였는데 이때 얻은 경험을 통해 방언 통역이란 그림을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보고 '이 그림에는 멋진 풍경이 있네요. 흰 눈이 덮여 있는 높은 산봉우리와 푸른 호수, 넓은 대지 그리고 푸른 나무들과 햇살이 물 위에 반사되고 있네요.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이 풍경의 평화로움에 푹 빠져들었나 봐요. 나도 이곳에 가서 살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똑같은 그림을 놓고도 다른 식으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즉 색감이나 디자인에 대해 훈련받은 사람은 그림 안의 요소들을 통하여 화가가 사람의 관심을 어느 곳으로 어떻게 이동시켜가며 감동시키려고 했는가를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또 화가의 붓 터치나 색깔의 조화 부분에 대해서, 그리고 이 화가가 과거 다른 이들의 그림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동일한 그림에 대한 이러한 설명들은 둘 다 맞지만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17)

존 바샴이 방언의 메시지를 한 폭의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의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은 그림 같은 것이 아니라 계시를 담고 있는 편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언어가 아니라 그림 같은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방언(言)의 은사 대신에 방화(畵)의 은사, 즉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은사를 주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존 바샴이 자신의 방언 통역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자신의 거짓 방언을 통역해야 하는 거짓 통역의 애매모호함을 손쉽게 합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 통역에 대한 설명은 자신의 방언 통역이 거짓 은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부정확함, 애매모호함, 사람마다 통역이 달라지는 것 등의 허점을 합리화시키려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 각 주 --

1) 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참고.

2) 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11[2]), p.64.

3) 바울과 동시대의 유대인인 요세푸스와 필로의 연구에 따르면, 동사 ‘디에르메뉴에토’는 흔히 단순하게 “언어로 표현하는 것”, “상세히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루크 티모시 존슨, 초기기독교 신앙체험, 손혜숙 옮김(서울: CLC, 2010), p.117.

4) 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 이용중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136.

5)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p.86-87.

6) 앞의 책, pp.86-87. 조용기 목사도 같은 설명을 한다.

7) 김신호, 성령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p.128-129.

8)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89.

9) 앞의 책, p.91.

10)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66.

11) 앞의 책, p.67.

12)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p.86-87.

13) 앞의 책, p.91. 이 말은 조용기 목사의 설명이다.

14) 로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123.

15)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p.87-88.

16) 앞의 책, p.88.

17) 앞의 책, pp.88-89.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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