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들에게서 답을 찾다

FIM 선교회의 최근 이슬람 선교학교 홍보지

1. 들어가면서

한국 기독교는 1517년에 루터와 같은 말씀의 종들을 세우셔서 거짓되고 부패한 교회를 순수한 말씀으로 새롭게 하신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에 두고 각 교단차원에서 시편찬송을 통한 예배 회복, 학술대회 및 세미나, 교리문답 교재 발행 등 다양한 분과에서 여러 행사 및 기념 사업으로 분주하다. 이에 반해 한국 기독교 안에서 이슬람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이슬람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 이슬람을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네 가지 시각이 있다. 이슬람포비아(무슬림혐오증), 내부자운동(상황화 전략), 다원주의적 관점, 개혁주의적 입장 등이다.

먼저, 이슬람포비아는 이슬람을 사단의 종교라고 생각하며, 무슬림에 대한 공포가 혐오적으로 나타나는 입장이다. 이 단어는 1980-90년대에 만들어졌으나, 실제로는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9.11테러 이후에 많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포비아적 시각으로 무슬림들을 본다면, 한 마디로 막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더 나쁜 말로 하면 ‘없애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둘째, 무슬림 선교를 위한 상황화 전략이 있다. 이른바 내부자운동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슬람과 기독교 가운데 공통적인 부분들을 강조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혼합주의로 갈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셋째, 다원주의적인 입장은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신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목적지가 같다면 어떤 길을 선택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꾸란에 나타난 이슬람의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개혁주의적 입장은 종교개혁자들이 바라 본 이슬람에 대한 시각을 현 시대에 적용하여 그들처럼 이슬람을 바라보고 접근하자는 입장이다. 종교개혁자 불링거는 “이슬람의 성공의 이면에는 기독교인의 악한 삶이 있다.”고 하였다. 중동이나 유럽의 기독교가 성장했다가 내리막길을 걸을 때, 이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성장하였다. 기독교의 타락이 이슬람의 성장을 도와주었기에 이슬람을 통하여 기독교인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오늘날 의미에 대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의해 살고 죽기에, 바른 말씀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며 "온갖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에 물든 교회의 어두운 곳 깊숙이 파묻힌 말씀의 권위를 회복하고 높이 쳐들어야 할 시간과 장소는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지금 이곳'으로, 엄동설한의 세상 한복판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서 뛰고 있는 종교개혁의 심장 소리를 듣고 들려 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한 사람씩 살펴보고 이슬람에 대한 그들의 대답을 통해 우리 시대에 적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Ⅱ. 종교개혁자들의 입장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루터는 이슬람을 종말론적인 적(敵)으로 인식하였다. 1529년 이슬람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Vienna)의 포위소식을 들으면서 임박한 종말을 의식하며, 이슬람을 종말론적인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터키인에 대항하는 군대 설교』(Eine Heerpredigt wider den Turken)에서 루터는 말세에 예언된 두 폭군을 교황과 이슬람으로 해석하고, 다니엘서 7장의 4번째이자 마지막 짐승을 로마제국으로, 열 뿔을 제국 내의 나라들로, 그리고 뿔들 사이에 있는 ‘작은 뿔’을 이슬람으로 이해하였다. 교황은 위선의 가면을 쓰고 성전에 앉아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적그리스도로, 이슬람은 선하고 정결한 덕목을 지닌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계략을 가진 적그리스도로 이해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함마드를 적그리스도로 보지는 않았다.

루터의 이슬람에 대한 최초의 신학적 입장인 하나님은 이슬람이라는 채찍을 통해 회개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죄를 벌하신다는 것은 종교개혁 당시의 기독교인들의 신학과 믿음에 있어서 타락만큼 영적으로 어두워진 현대교회를 향한 징계와 하나님의 채찍으로 이슬람이 사용되고 있다고 사실을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한다. 오늘날 종교에 있어서 이슬람보다 타락한 기독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할 것은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적인 부패와 거짓과의 싸움이 우선되어야 한다.”

2. 하인리히 불링거(Johann Heinrich Bullinger, 1504-1575)

불링거는 이슬람을 이방의 전통이 아닌 기독교 이단으로 보면서, 꾸란의 담겨있는 이단적 요소들에 대해서 지적한다. 그는 “꾸란은 이단 사제의 도움과 타락한 유대인과 가짜 기독교인들의 조언으로 조작되었다”말하면서, 꾸란은 하나님이 아닌 무함마드의 저작으로 여겼고, 무함마드 자신이 선지자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신에게 받았다고 하는 계시와 비전 역시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꾸란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삼위일체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 교리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특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부정할 뿐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고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존재도 부정하는 이단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불링거는 무함마드가 금식, 기도, 선행, 고결한 전투, 성전에서의 죽음 같은 것들을 통해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얻는 길을 만들어냈다고 비난했다. 즉 이슬람은 교황이 만들어낸 면죄부처럼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펠라기안적인 이단이라고 하였다.

3. 장 칼뱅(John Calvin, 1509-1564)

칼뱅은 이슬람에 대한 그의 견해를 많은 곳에서 밝히고 있지는 않는다. 『기독교 강요』 최종판(1559)에서“투르크인(Turks)"이란 단어는 세 번 등장하고, “무슬림”이란 단어와 무함마드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그의 설교집, 주석, 서신서에서는 종종 로마가톨릭과 비교하면서 언급되고 있는데, 필자는 칼뱅의 작품에 표현된 이슬람을 통해 이슬람에 대한 그의 입장과 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참된 진리가 있는 교회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태도

칼뱅은 초기 사역에서 대체적으로 이슬람에 대하여 아주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기독교강요』 어디에서도 칼뱅이 이슬람에 대하여 배타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곳은 없다. 칼뱅은 출교된 사람들과의 교제 나누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나 위로나 가르침으로든지 혹은 자비와 부드러움으로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기도를 드림으로써든지 그들이 보다 덕스러운 삶으로 돌아오고, 교회의 교제와 일치에로 되돌아 오도록 노력”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되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것의 사용을 막는다든지, 그들의 인격을 모독한다든지, 칼과 무기로 윽박지르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많은 청교도들, 개혁주의 선배들의 공통적인 부분들이다. 한 예로, 웨스트민스터 총회 회원이었던 앤서니 버지스는 요한복음 17장 설교 중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요일 5:16). 그러나 또한 이런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쉽지 않고, 유다도 오랫동안 제자로 활동했으니 “죄에 빠져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 회심하고 나아올 수 있도록 악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께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와 주시지 않은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악하다고 할지라도, 특정한 사람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칼뱅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처음과는 달리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을 비롯하여 칼뱅의 설교와 주석을 살펴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이슬람에 대해 강력한 태도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칼뱅의 강경한 태도는 전쟁이나 무력을 통해 맞서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신학적 입장에서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칼뱅이 제네바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수많은 이단과 대적들을 상대하는 과정 속에서 특히 거짓된 진리, 기독교의 신앙을 허무는 세력들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2) 잘못된 신학적 교리에 대해서 비판함

이슬람에 대한 칼뱅의 태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신학적 오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와 그들이 섬기는 알라신과는 전혀 다른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

『기독교 강요』 최종판(1559)에서 칼뱅은 기독론에 관점에서 이슬람의 교리가 잘못되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칼뱅은 이슬람교도에 대해서 “천지의 창조주가 바로 하나님이란 걸 외치고 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들의 교리적 오류를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칼뱅은 그들을 가리켜 “참되신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대신 올려놓고 섬기고” 있는 우상숭배자라고 말한다.
 

Ⅲ. 나가면서

지금까지 이슬람에 대한 종교개혁자 루터, 불링거, 칼뱅의 이해에서 몇 가지 공통적인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이슬람은 기독교이단이다.
둘째, 무함마드는 거짓 선지자이며 꾸란은 지어낸 것이다.
셋째, 이슬람의 공격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았다.
넷째, 무슬림들이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선교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가 발전하고 융성했던 곳들이 이슬람으로 대체된 것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기독교가 변질되고, 골고다 산상의 십자가를 자신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때, 이슬람이 몰려왔고, 그에 대항할 만한 능력을 상실한 채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는 그 주권을 이슬람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중동이 그랬고, 유럽이 그 길을 가고 있다. 한국도 이슬람이 다가오고 있다. 이 중요한 시기에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개혁교회의 모토이며, 칼뱅이 기독교 강요(IV:I.7~8)에서 강조한 내용을 새겨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한국 내에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슬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이슬람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며, 칼뱅처럼 이슬람을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경계하면서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무슬림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며 그들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전도해야 하는 대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FIM 국제선교회 이동훈 목사 / 

이동훈 목사는 안양대학교 기독교문화학과,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졸업하였다. 한국에서 서서히 증가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연구에 많은 힘을 쏟고 있는 목회자이다. 현재 무슬림들에게도 주님의 유업을 물려주기 위해, 한국교회에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와 관련한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FIM국제선교회 한국본부 총무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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