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29회)

이 밖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의 능력과 유익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 중 일반적이면서도 대단히 위험한 것들 몇 가지만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방언으로 기도하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떤 오순절주의자는 방언기도를 하다가 공중으로 부양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다가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우리 사모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하고 인간적인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언-저자 삽입)기도를 중단했습니다.”1) 그러면 바울은 방언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삼층 천까지 올라간 것일까? 아무튼 이 정도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수준인 것 같다.2)

손기철 장로는 귀신은 방언기도를 가장 무서워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어느 집회에서 귀신들린 자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귀신이 꿈쩍도 하지 않아 방언으로 기도했더니 귀신이 방언기도의 능력을 알고는 “방언으로 기도하지 마!” 하면서 나갔다고 한다.3) 아마 손기철 장로가 상대한 귀신이 방언기도를 무서워한 것을 보면, 그 귀신은 아주 영리한 귀신이었던가 보다. 마귀의 졸개에 불과한 귀신이 마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기도의 내용을 알아들었으니 말이다. 또 그 귀신은 예수의 이름보다 방언기도를 더 무서워하는 것으로 미루어 성경이 말하는 귀신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외계에서 온 귀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방언기도를 하지 못하는 자들은 아예 귀신에게 붙들려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이왕이면 빨리 방언기도를 배우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듯하다. 왜냐하면 손기철 장로를 보면, 생각보다 주변에 귀신이 꽤 많은 것 같으니까 말이다.

이와 같이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에 대한 자신의 거짓 체험과 상상을 말함으로 피방언자에게 방언이 주는 대단한 능력을 믿게 만든다. 이들이 말하는 방언기도의 체험 중 단골 메뉴 한 가지를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방언자들 중에 이와 유사한 간증을 하는 자들은 부지기수다).

마헤시 차브다는 어느 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엇을 기도하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세 시간 동안 아주 간절히 방언으로 기도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방언으로 간절히 기도하던 그 시간에 자신의 딸이 교통사고로 사망할 뻔 했지만 무사했다고 한다. 마헤시 차브다는 이 사건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날 아침이 되어서야 제가 왜 어제 밤에 몇 시간 동안이나 기도의 부담을 느끼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위험을 미리 아시고 그 위험이 제거될 때까지 저에게 방언으로 기도하도록 시키셨던 것입니다.”4)

마헤시 차브다의 논리대로라면, 성령은 위험에 처해 있는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에게 세 시간 동안 방언기도를 하게 하셨고, 자신은 거기에 순종해 세 시간 동안 방언기도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딸을 살려주셨다는 것이 된다. 이 말은 결국 그때 자신이 세 시간 동안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딸을 살려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그의 방언기도의 능력은 대단하다! 하나님이 교통사고를 통해 자신의 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려던 계획을 자신의 방언기도로 막았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피로 사신 바 된 그분의 자녀를, 방언기도를 했다고 살려주시고 안 했다고 죽이시는 그런 분이신가? 아니다. 마헤시 차브다의 하나님은 그럴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만약 우리의 자녀가 교통사고로 죽어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방언기도를 했든지 안 했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우리의 자녀를 살려 주기로 작정하셨다면, 설령 우리가 딸의 위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서 아무런 기도를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의 생명을 지켜주실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원활한 소통을 위해 성령이 주신 외국어 은사다. 그러나 소통하는 양자 중 어느 한편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양자 사이에 원활한 소통을 위한 특별한 수단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불완전한 인간의 어떤 말도 다 알아들으시며,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떤 말도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자 사이의 소통에 어떤 특별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은 양자 모두가 특별한 수단이 필요할 만큼 전능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인간이 전능자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도에서, 더 나은 소통을 위한 특별한 수단, 즉 더 성능이 좋은 기도(방언기도, 왕의 기도, 화살 기도 등)가 따로 있다는 오순절주의자들의 생각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청력을 걱정하는 중증의 망상이다.

빌 해몬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망상을 피력한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마음과 언어로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소리의 속도로 나타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영의 언어로 기도할 때에는 빛의 속도로 기도하며 대화하게 된다. 이것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능력의 새로운 계시와 이해를 가져온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의 영 또한 빛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빛 가운데 걸으며 살고 있다. 우리가 영의 언어로 기도할 때, 하나님과 빛의 차원에서 연결되어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제한적이고 상식적인 지식과 능력으로 많은 시간 기도하는 것보다 영적으로 몇 분 기도할 때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선물을 사용하는 수많은 장점과 유익들 중 단지 일부이다.”5) 김동찬 목사의 망상은 다음과 같다. “방언은 성도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무전기와 같다.”, “방언이란 무전기를 통해 간절히 부르짖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폭격기들이 수없이 구름 너머로 날아오는 것을 봅니다.”6)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방언기도가 하나님이 더 잘 들으실 수 있는 특별한 성능의 기도라면,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이 얼마나 망령된 신성모독인가? 방옹자들은 자신의 방언기도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떠벌이는 것이 전능자 하나님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무전기로 말하지 않아도, 빛의 속도로 간다는 방언기도가 아니라 평범한 기도를 통해서도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자기 자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으신다. 왜냐하면 방옹자들의 하나님은 이들에게서 너무 멀리 계셔서 무전기가 필요하고, 빛의 속도의 방언기도가 필요할지 몰라도,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조용히 속삭이는 기도 소리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4).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특별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의 아들의 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단 한 가지 조건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가 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언제든지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히4:16). 따라서 기도 응답의 특별한 조건을 굳이 따진다면,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함께 오직 그의 아들의 이름밖에 없다(요15:16).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의 자녀로서, 그리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따름이다.

둘째, 오순절주의자들의 또 다른 방언기도 자랑은 평범한 기도로는 채 삼십 분도 기도할 수 없지만 방언으로는 밤새도록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7) 필자가 만난 방옹자들 중 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밤새도록 방언으로 기도하기 전에 먼저 밤새도록 성경을 읽는 것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러면 마태복음을 펼치자마자 곧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7-8).

필자도 기도원에서 밤새도록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특히 동역자들과 함께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언제 날이 새는지 모를 정도로 힘이 들지 않았다. 그때는 이런 현상이 성령의 충만한 능력인 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할 때는 서로 방언기도를 주고받으며, 때로는 목소리를 더 높여가며, 서로 경쟁하듯 기도했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도록 신나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방언으로 밤새도록 기도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이보다 더 힘든 일은 밤새도록 기도의 내용을 마음에 새기며 내가 아는 말로 기도하는 것이었고, 이보다 더욱 더 힘든 일은 밤새도록 성경을 읽으며 주의 뜻을 묵상하는 것이었다. 왜 그럴까? 방언기도는 하나님과 대면 없이 할 수 있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하나님과 대면해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필자가 밤새도록 방언으로 기도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힘든 대면을 피하면서도 영적으로는 유익을 얻으려 했던 비겁한 짓이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방언기도는 힘은 덜 들면서도 영적 만족도는 최고였기 때문에 당시 필자는 무엇보다도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셋째, 방언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매우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8) 그러나 이런 생각도 영적 교만에서 오는 중증 망상이다. 방언을 하지 못했던 어거스틴, 루터, 칼빈 그리고 무디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별로 사랑하시지 않았단 말인가? 이렇게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하는 자신에 대한 특별한 신적 사랑을 내세워 피방언자들을 영적 열등생으로 몰아감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방언에 대한 간절함을 불태우게 만든다.

넷째, 방언기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은사이다.9) 아마 방옹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개인용 은사가 맞다”라는 사실을 애써 변호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독한 자기모순이다. 방언이 연약함을 돕는 은사가 사실이라면 방언을 할수록 연약한 믿음이 강해질 것이고, 방언으로 믿음이 강해진 자는 상대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할 필요가 덜하게 될 것이다. 즉, 방언을 할수록 믿음이 강해진다면 믿음이 강해질수록 방언을 적게 해야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그러면 방언을 많이 하는 자는 믿음이 약한 자라는 말인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는가? 이들은 방언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믿음의 고수라고 여기니 말이다. 방언은 연약함을 돕기 위한 은사라고 말하면서 왜 이들은 방언을 많이 하는 자를 영적 고수로 여기고,10) 또 방언의 고수일수록 방언기도를 더욱 많이 하는 것일까? 혹시 방언을 하면 할수록 믿음이 더 약해지기 때문은 아닐까? 이들이 하는 방언은 거짓 방언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들은 방언을 할수록 믿음이 약해지는 자신을 본능적으로 깨닫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방언기도를 해서 믿음을 강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방언을 더 많이 하게 되는 진짜 이유는 방언의 중독성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방언기도를 하면 할수록 그 중독성 때문에 방언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져서, 더 큰 영적 자극을 얻기 위해 더 심하게 방언기도를 하게 된다는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방언으로 얻는 자극에는 한계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로도 원하는 자극을 얻지 못하는 시점이 되면, 방언자들은 더 큰 영적 자극을 얻기 위해 다른 은사들을 찾게 되고, 결국 그것들을 하게 된다. 대부분 방언 다음으로 하게 되는 은사들은 통역, 신유, 예언 그리고 성경에도 없는 방언 찬양, 방서(방언을 종이에 이상한 글씨로 필기하는 은사를 방서라고 한다. 방서를 하는 자들은 자신의 방언을 기록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이 하는 방언을 기록하기도 한다), 투시 그리고 넘어짐, 입신 등 다양하다. 방옹자들은 이들 중 한 가지를 체험하게 되면 방언기도가 주지 못하는 영적 자극을 얻음으로 당분간 여기에 만족한다. 그러나 또 그 은사가 주는 자극의 한계점이 오면 또 다른 은사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방언자들은 이런 현상이 방언 중독 때문에 오는 것인지는 꿈에도 모르는 채 방언의 은사가 모든 은사의 통로라고 생각한다.11)

일반적으로 마약의 세계에서 대마초가 가장 접근하기 쉬운 향정신성 물질이다. 왜냐하면 대마초는 다른 마약에 비해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고, 값도 비교적 싸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마초는 다른 마약에 비해서 중독성도 덜하고, 그다지 치명적이지도 않다고 한다.12) 그럼에도 대마초가 심각한 이유는, 대마초의 자극으로 쾌감을 얻는 자들은 대마초가 주는 자극의 한계점이 오면 다른 마약을 찾게 된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마초는 모든 마약의 통로가 되므로 철저하게 규제해야 한다. 다른 마약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자극이 강한 마약도 시간이 지나면, 그 마약이 주는 자극이 식상해 짐으로 또 다른 마약을 찾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지금도 신종 마약들이 끊임없이 새로 나오고 그 수요가 계속 느는 것은 마약의 이런 특성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신종 마약이 끊임없이 개발되는 모든 이유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모든 마약의 통로는 대마초다’라고 정리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거짓 은사들도 마약과 같다.13) 방언이 모든 은사의 시작과 다른 은사를 받는 통로가 되는 것은 방언기도가 모든 거짓 은사들 중에 대마초처럼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마초처럼 거짓 방언이 주는 영적 자극의 한계점이 오면 오순절주의자들은 더 큰 자극을 얻기 위해 다른 거짓 은사들을 찾게 된다. 그러나 마약 중독의 결말이 파멸이듯이 영적 마약인 방언기도의 결말도 결국 자신의 영혼을 파멸로 내몰고 말 것이다.

다섯째, 방언을 받으면 ‘사람이 변한다’, ‘교회가 부흥한다’, ‘기쁨이 넘친다’, ‘힘이 솟으며, 아무리 기도해도 피곤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방언의 강한 중독성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다.

(1)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사람이 변한다”14)는 사실을 내세워 방언기도가 성령의 은사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들은 방언을 받은 사람이 단숨에 변한 사례를 선전하며 방언기도의 놀라운 능력을 과시한다.15) 과연 그들의 주장이 맞을까?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은 주의 제자들이 단번에 변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령을 받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스데반이 순교하기까지 한참 동안 유대 지경 밖으로 복음을 들고 나가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미숙했다(행8장). 주님이 오순절 날 성령 받은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내는 데도 여러 번 환상을 보여주어야만 했을 정도로 베드로는 영적으로 미숙했다(행10장). 베드로는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바울이 실망할 정도의 영적 미숙함을 보였다(갈2:12). 베드로가 베드로전후서를 쓰며 주를 위해 순교할 만큼 변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바울도 성령을 받은 후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지낸 다음 비로소 주의 사역을 시작했다. 바울도 성령을 받았지만 사역을 시작하는 데는 적어도 3년이라는 변화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것은 대개 실성했거나 술이나 마약 같은 데 취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2)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교회는 쇠퇴하고, 방언을 하는 교회는 부흥(이들의 부흥은 숫자적인 증가를 말하는데, 이것은 성공신학 또는 번영신학의 산물에 불과하다)한다고 주장한다.16) 그러면 방언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는 정말 성령이 역사하시는 부흥이 있을까?

방언을 전면에 내세우는 오순절 교단은 기독교 단일 교단으로는 카톨릭 다음으로 세계적인 큰 교세를 가졌으며, 교회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크게 부흥했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지금도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단은 오순절 교단이며, 이 모든 것의 원천은 방언기도의 능력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는 방언으로 말미암은 부흥을 자랑하기에 앞서 이것이 정말 성령의 역사로 인한 부흥인가를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한다고 해서 진리라고 단정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보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훨씬 더 많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더 많으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진리가 된다. 진리를 결정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점일획이라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지구상의 생명체들 중에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생명체는 암세포와 프로테우스17) 증후군밖에 없다. 이렇게 끊임없이 성장하는 암세포와 프로테우스 증후군은, 사람 속에 들어와 자라므로 사람을 괴롭히며, 끝내 사람의 생명을 파괴시키고 자신도 결국 죽고 만다. 그러나 정상적인 생명체는 성장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성장을 멈춘다. 왜냐하면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성장하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한 준비이지 성장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태어나서 일정 기간은 성장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성장을 멈추고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한다. 이제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멈추지 않고 계속 성장한다면, 성장을 멈추게 하는 치료를 그 사람에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장애인으로 살다가 끝내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교회도 생명이 있는 유기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정 수준(주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하면 성장을 멈추고, 주님이 교회에 맡겨주신 사명에 올인(all-in)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 태어난 교회들도 함께 잘 자랄 것이며, 이들 교회들도 어느 시점에서 성장을 멈추고, 주의 사명에 올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런 건강한 교회들로 인해 죄가 억제되고 선이 증가되며 아름다워진다. 그러나 어떤 교회가 성장을 멈추지 않고 계속 자란다면, 그 교회는 암세포처럼 주변의 다른 작은 교회들을 죽이다가 끝내 자신도 죽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세상도 점점 더 나빠지게 될 것이다. 현대 교회의 멈출 줄 모르는 성장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자신뿐 아니라 모두를 파멸로 몰아가는 사탄의 미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라! 초대형 교회들이 즐비한 이 땅이 얼마나 황폐해져 있는가를 말이다.

기억하라! 끊임없는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더러운 욕망에서 나온 것임을! 그러므로 현대 교회의 부흥 신학, 성공 신학, 번영 신학 등은 주의 교회에 기생해서 끊임없이 자라게 하는 암세포의 성장이론이다. 그리고 이 암세포를 가장 잘 자라게 하는 영양소 중 하나가 바로 방언기도다.

현대 교회는 끊임없이 계속 성장하기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를 통해 주신 생명의 능력인 십자가를 버리고 긍정의 힘, 마케팅 전략, 신비주의, 은사주의 등의 위험한 인스턴트 능력을 게걸스럽게 먹어대고 있다. 이들이 먹는 대표적인 메뉴가 바로 방언기도인데, 요즈음은 너무 많이 먹어서 물렸는지 예언, 입신, 투시, 넘어짐, 웃음, 왕의 기도, 화살기도, 금가루, 금이빨 등 다양한 메뉴들을 개발해서 먹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가장 중요한 영양 공급원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방언기도다. 그래서 오순절주의 뿐 아니라 유사 기독교 집단들을 비롯해 거의 모든 불건전한 종교 집단에서는 방언으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영양소를 공급받고 있다.

오순절주의의 방언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과 같은 거짓 방언이다. 그러므로 거짓 방언의 능력으로 교세가 성장하는 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로 인한 부흥일 수 없다.

(3)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기도를 하면 기쁨이 넘치고, 저절로 힘이 솟고, 방언기도는 아무리 해도 피곤하지 않다고 주장한다.18)

인간의 육신은 연약하기 때문에 육체적인 노동을 하면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루 종일 힘든 사역을 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실 때, 폭풍우로 배 안이 온통 시끄러웠지만 곤하게 주무실 수밖에 없을 만큼 육신이 피곤하셨다(막4:38). 이것은 예수님이 성령 충만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인간이 연약한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그것은 실성했거나, 귀신들렸거나(막5:4), 아니면 마약에 취했을 때다. 특히 마약에 취하면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한 방언기도의 능력과 같은 증상들이 동일하게 일어난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도 마약처럼 중독성이 아주 강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방언의 능력에 대한 것들은, 피방언자로 하여금 방언을 열망하게 만들어 방옹자들이 던져 놓은 낚시의 미끼(여기서 미끼는 혀가 꼬이는 현상을 말한다)를 덥석 물게(여기서 덥석 문다는 말은 혀가 꼬일 때 계속 꼬이게 그냥 내버려둠으로 결국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만들기 위한 밑밥이다.

3. 세 번째로 중요한 요령은, 피방언자로 하여금 방언을 간절히 사모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19) 지금까지 소개한 것이 방언을 받을 수 있는 심리적인 요령이었다면, 지금부터 소대하는 것는 실제적인 요령이다.

피방언자의 방언에 대한 실제적인 간절함은, 앞에서 말한 1, 2번의 심리적인 요령이 성공하면 손쉽게 생겨나는데, 여기에 피방언자 옆에서 큰 북과 같은 타악기를 빠르게 계속 친다든지, 방언의 고수들이 방언으로 열렬하게 기도한다든지 하는 분위기 조성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순절주의자들은 분위기 조성을 위해 피방언자 옆에 있는 자들에게 피방언자가 방언을 받을 수 있도록 모국어로는 기도하지 말고, 방언으로 기도해서 도와주라고 말하기도 한다.20)

4. 네 번째로 중요한 요령은, 피방언자들의 이성이 마비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방언 받는 가장 중요한 요령이기도 하다.

피방언자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작업은 피방언자가 기도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된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이성을 마비시킬 분위기 조성을 미리 하는 것을 말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피방언자의 이성이 마비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기도하기 전에 빠른 박자로 크게 찬송하도록 피방언자를 유도한다. 보통 이때는 같은 찬송을 계속 반복해서 부르게 하는데, 북과 같은 타악기를 빠른 템포로 강렬하게 쳐주면 효과는 배가 된다. 이 정도면 벌써 상당부분 감정의 뚜껑이 열리기 때문에, 이때 이미 피방언자의 이성은 졸게 된다. 그러고 나서 다음 요령을 따라 기도하면 피방언자의 이성이 잠드는 것은 시간문제다.

첫째, 피방언자로 하여금 짧은 문장의 말을 계속 반복하게 한다.21) 이때 보통 ‘할렐루야’를 반복하게 하거나,22) 경우에 따라서는 ‘할렐루야’를 거꾸로 반복하게 한다.(‘할렐루야’를 거꾸로 하는 것은 이성의 마비보다는 혀 꼬임에 더 비중을 둘 때 주로 시행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피방언자로 하여금 모국어로 기도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다.23) 왜냐하면 피방언자가 모국어로 기도하면 기도의 내용을 인지하기 때문에, 이성이 마비되지 않으며 졸던 이성까지 잠을 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자들은 “더 이상 우리말을 하지 말고 입을 주께 맡기며 믿음으로 우리말이 아닌 다른 말을 해야 한다”24)고 계속 피방언자에게 정상적인 말 대신 비정상적인 발음을 요구한다.

둘째로, 입을 크게 벌리고 큰 소리로 말하게 한다.25)

셋째로, 빨리 그리고 격렬하게 말하게 한다.26)

위의 3가지 방언 받는 요령은, 먼저는 피방언자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또 하나는 혀가 쉽게 꼬이게 하는 효과도 있다. 독자들은 지금 당장 한 번 실험해 보라. 눈을 감고 짧은 문장의 말을 계속 반복해서 크게, 그리고 빠르고 격렬하게 발음 해보라. 시간이 조금 지나면 여러분의 머릿속은 점점 하얗게 되어 곧 생각이 멈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빠르게 큰 소리로 격렬하게 말하다 보면 반드시 혀가 꼬이는 순간이 온다. 이때 이성이 살아 있으면, 말을 빨리 하고 크고 격렬하게 했기 때문에 당연히 혀가 꼬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꼬인 혀를 원위치로 바로 잡을 것이다. 이러면 방언은 결코 할 수 없게 된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혀가 꼬일 때 피방언자가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잠재의식 속에 이미 세뇌된 대로, 혀가 꼬일 때 성령이 나에게 방언을 주시는 것으로 믿게 만들어서 혀가 꼬이는 현상을 계속 그냥 내버려두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면 피방언자는 드디어 방언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 오순절주의자들은 피방언자에게 “어떤 현상이 몸에 오면 의심하지 말고 성령님께 무조건 맡기라”27)고 말하므로 혀가 꼬일 때 계속 꼬이게 내버려 두도록 강하게 주문한다.28) 따라서 소리를 내지 않고 기도하거나, 소리를 내어도 격렬하게 내지 않고 조용히, 천천히, 그리고 점잖게 기도하면 절대로 방언기도는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이성이 마비되지도, 혀가 꼬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 설령 혀는 꼬였다 하더라도 꼬인 혀를 금방 원래대로 바로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29) 그래서 정원 목사는 “지나치게 많은 생각은 영의 흐름을 방해한다”30)고 말하면서 노골적으로 아예 아무 생각도 하지 말도록 피방언자에게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오려고 할 때 단순하게 ‘멈춰!’ 하고 말하면 됩니다. 사소한 일로 주의를 빼앗기게 되거나 마음이 상하려고 할 때 ‘멈춰!’ 하고 말하면 됩니다. 기도를 할 때 생각이 방해되지 않도록 ‘머리야, 잠잠하라!’ 하고 말하면 됩니다.”31) 그는 지금 피방언자에게 방언을 할 수 있도록 최면술을 가르치고 있다. 어떤 방옹자들은 피방언자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를 의심하는 것으로 치부하며, 성령을 훼방하지 말도록 협박까지 한다.

방옹자들은 피방언자가 방언을 하기 시작하면, 피방언자에게 놀라서 방언을 멈추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멈추어 버리면, 다시 이성이 잠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거기서 방언기도는 끝나 버리고 만다. 방옹자들은 이것을 막기 위해 피방언자에게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 “처음 방언이 터졌을32) 때는 강하게, 큰 소리로 논스톱으로 적어도 30분 이상은 해야 합니다.33) 그렇게 시작되는 물줄기가 속에서 어떤 변화와 감동을 가져오는지 그렇게 계속 하다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들이 시작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34)

오순절주의자들이 왜 이런 주문을, 막 방언을 터뜨린 피방언자에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피방언자로 하여금 방언에 확실하게 중독되게 하고, 또 중독된 뇌가 다시 원할 때 방언을 더욱 쉽게 할 수 있도록 혀를 길들이기 위함이다.35)

피방언자가 방언을 터뜨리고, 계속 방언으로 기도할 때도 위와 같은 요령에 따라, 즉 빠르고 격렬하게 그리고 거의 같은 소리를 반복적으로 내며 30분 정도 계속 기도하면 거의 대부분 황홀경으로 들어간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이때 경험하는 황홀경을 성령이 주시는 천상의 체험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속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체험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천상의 체험이 아니라 인간의 요령에 의해 유도된 방언 중독 증상이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의 방언은 성령에 의해서 밖에서 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요령들에 의해서 안에서 만들어져 밖으로 터뜨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뜻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원할 때 언제 어디서든지 방언기도를 할 수 있고, 또 하면 할수록 더 능숙한 방언의 고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각 주--

1) 강요셉, 방언기도에 숨은 비밀(서울: 도서출판 성령, 2012), p.17.

2) 심지어 로버츠 리어든은 방언기도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구여! 당신이 몇 억을 투자하여 집을 사려고 한다면 아무 집이나 구입해서는 안 된다. 집을 사는 것은 풍선껌을 사는 것과 다르다. 집을 사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30년, 40년, 심지어 50년 동안 빚을 갚아 나가야 한다. 이렇게 큰 부담을 안고 집을 샀는데 그 집이 당신에게 맞지 않으면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방언기도를 많이 하면 어떤 집을 보기 위해 그 집 대분에서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당신은 하나님께서 ‘이 집을 사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을 들을 만큼 영적으로 민감해질 것이다.” 로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94. 리어든의 말대로라면 부동산업자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는다면 재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3) 김신호, 성령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124.

4)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109>

5) 빌 해몬, 방언을 해야 하는 70가지 이유, CI KOREA 옮김(서울: CI KOREA, 2011), pp.74-75.

6)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8.

7)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165.

8) 앞의 책, p52.

9) 이들은 롬8:26에서 ‘성령의 탄식’을 방언기도라고 가르침으로, ‘방언기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은사이다’를 자연스럽게 믿도록 만든다.>라는 것이다.<각주: 앞의 책, p.148;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 p.42.

10)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166.

11) 앞의 책, p.108.

12) 이런 이유로 2013년에 미국의 메릴랜드 주, 콜로라도 주, 위싱턴 주에서는 대마초(마리화나)를 합법화했고, 2013년 12월에 우루과이도 대마초를 합법화했다.

13) 옥성호 형제는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의 개정판 서문에서 방언을 마취제로 비유한다.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2), p.14.

14)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p.61, 112, 147 등.

15) 앞의 책, pp.60-61.

16)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p.4-7; 김신호, 성령 세례를 받으면 방언을 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p.303-304 등 거의 모든 방옹자들의 책에서 이런 주장이 발견된다.

17) 이 병은 사람의 피부, 뼈, 다리 등 신체의 특정 부위가 비정상적으로 계속 성장하는 희귀병이며, 프로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의 신하로서 자기가 원하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다.

18) 로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p.75-76;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207.

19)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p.27, 74. 오순절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이 원칙을 강조한다.

20) 케네스 해긴, 성령세례와 방언, 장혜영 옮김(서울: 베다니출판사, 2011), pp.164-165.

21) 정 원, 방언기도의 은혜와 능력1(서울: 영성의 숲, 2012), p.317.

22)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233 참고.

23) 로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162.

24) 정 원, 방언기도의 은혜와 능력1(서울: 영성의 숲, 2012), p.68.

25) 앞의 책, p.317.

26) 앞의 책, p.332.

27) 어떤 방옹자는 이때 ‘성령을 풀어놓아야 한다’는 방자한 표현을 쓰기까지 한다. 정 원, 방언기도의 은혜와 능력1(서울: 영성의 숲, 2012), p.204). 아마 이들의 성령은 그 동안 꽁꽁 묶여 있었나 보다.

28) 김신호, 성령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145. 케네스 해긴은 혀 꼬이는 현상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도록 가르친다.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혀와 입술 위에 역사하실 때 목소리를 높여라. 성령과 협력하면 당신도 방언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케네스 해긴, 성령 세례와 방언, 장혜영 옮김(서울: 베다니출판사, 2011), p.155. 여기서도 케네스 해긴은 “성령과 협력하면”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은연중에 방언기도가 인위적인 것임을 드러낸다.

29)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하면 아무리 방언을 받으려고 애써도 방언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사람에게는 방언 받는 요령에 충실히 따를 것을 주문한다. 필자가 추측하건대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도 방언의 은사가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 인위적인 요령을 적극적으로 따라하지 않는 사람, 이성적인 사람, 아주 정직한 사람, 그리고 한 번 슬쩍 혀를 꼬부려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이들이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인위적인 요령을 따라하지 않으므로 이성이 마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이 방언의 은사를 주실 때까지 정직하게 기다렸기 때문이다. 방언 받기를 정말로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자신의 신앙 양심부터 슬쩍 내려놓을 필요가 있음을 명심하라.

30) 정 원, 방언기도의 은혜와 능력1(서울: 영성의 숲, 2012), p.204.

31) 앞의 책, p.447.

32) 오순절주의자들은 피방언자가 방언을 하게 되면 ‘방언이 터졌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81. 이런 표현은 무의식중에 자신들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님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인데, 이들의 방언은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 안에 있는 어떤 무의식의 소리를 깨워 밖으로 터뜨리는 것이므로 자기도 모르게 ‘방언이 터진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33) 손기철 장로도 “처음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는 30분에서 1시간 이상 창자가 꼬일 정도로 쉬지 않고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도 온갖 육신의 것, 상처, 쓴 뿌리, 정보 등으로 잔뜩 뒤범벅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겨내는 ‘보링’(Boring) 작업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친다.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109.

34) 정 원, 방언기도의 은혜와 능력1(서울: 영성의 숲, 2012), p.337.

35) 여기에 대해 김신호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는 힘들더라도 방언으로 한 시간 정도 열심히 기도하고 나면 방언기도의 내성이 생겨서 그 다음부터는 잊어버리지 않고 할 수 있다.” 김신호, 성령 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190.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