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방언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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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방언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말
  • 정이철
  • 승인 2014.09.26 06:54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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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현상인가? 성경의 방언인가?(3)

성경의 방언의 대상은 사람

성경의 방언의 주체는 하나님이었고 방언의 대상은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방언을 통하여 사람에게 메시지를 주셨다. 그러나 오늘 날의 방언이라고 주장되는 소리현상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여 시행되고 있다. 방언을 한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 시간에 그 소리현상을 써먹는다. 이점에 있어서 오늘 날의 방언이라고 주장되는 소리와 성경의 방언은 매우 다르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최초의 방언은 성령의 강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방언을 발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방언에 대한 어떤 난해한 부분은 마치 사람의 영혼이 방언을 말하는 주체인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보면 사람의 영혼이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 사람이 방언을 사람에게 말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하고 방언이 나타났고,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교회의 경우도 먼저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 방언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었으므로 방언을 만들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의 영혼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방언에 대해 언급하는 모든 성경의 말씀들이 성령의 역사로 방언을 사람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결코 방언으로 하나님께 말하였다는 표현을 찾아보기 어렵다. 성경의 방언은 사람이 듣도록 말하는 방언이었지 하나님이 듣도록 기도하는 방언이 아니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행 2:4)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10:46)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19:6)
“방언을 말하는 자는”(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고전 14:4)
“방언으로 말하고”(고전 14:6)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고전 14:13)
“방언을 더 말하므로”(고전 14:18)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고전 14:19)
“다 방언으로 말하면”(고전 14:23)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고전 14:27)
“방언말하기를”(고전 14:39)

▲ 사도 바울 영화

방언에 대한 바울 사도의 가르침 속에 방언이 하나님께 전하는 특별한 영혼의 언어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난해한 부분이 두 군데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이 부분은 참으로 해석하기 난해한 부분이다. 성경의 많은 말씀들이 초대교회의 방언의 주체를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 방언을 한다고 했으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혀를 이용하여 하나님 자신에게 말하였다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만일 바울이 사람의 영혼이 성령의 감동을 입어 하나님께 방언으로 말했다고 하면 더 논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방언을 말하는 주체가 사람의 영혼이라는 주장은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라는 부분으로 말미암아 또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 날의 소리현상이 성경의 방언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근거로 들면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한다. 그 소리들이 사람의 귀에는 무의미한 소리 같으나 사실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 비밀스러운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랠랠랠레 우알랄라 엘렐렐레 우알라스데 ... 이런 소리를 통하여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 비밀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보면 방언에 이러한 이론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영상이 많다.

신사도 운동가인 박호종 목사가 이끄는 신사도운동교회 과천의 하베스터 샬롬 교회(전, 홍정식 목사 시무)의 문정혜 목사(박호종 목사 사모)가 방언에 대해서 이런 내용을 가르치는 영상을  보았다. 이 영상을 보니 약 9분 30초가 경과하는 무렵부터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방언은 비밀을 말하는 기도예요. 제가 방언은 비밀을 말하는 기도라는 것을 보고나서 가장 먼저 성경의 아가서가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속하였고 내가 하나님께 속한 자. 비밀을 누구에게 마하지요 정말 친밀한 자에게 말합니다. 귀에다 대고 아무도 못 알아듣게 살포시 이야기하는 것이 비밀입니다. 여러분, 육성의 기도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방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사랑으로 고백하는 비밀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이상한 친밀감을 강조하는 신부운동의 개념을 실어서 방언이 사람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감을 높여주고 증진시키는 비밀스러운 대화의 수단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과연 바울은 그러한 뜻으로 ‘비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까? 그러나 바울이 여기에서 사용한 헬라어 ‘뮈스테리온’(비밀)이라는 단어는 한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신약성경에서 수 없이 사용되고 있는 이 말은 사람에게 다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을 의미한다. 개인의 인생과 영혼의 비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전해주시는 복음의 비밀,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에 전해지는 계시를 말한다. 이 단어가 쓰여진 또 다른 성경의 문장을 보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뮈스테리온’)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여기서 바울이 무슨 뜻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믿으라고 성도들에게 말하였겠는가?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먼저 받아서 성도들에게 전하는 사람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비밀’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감을 증진시키는 사적인 비밀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임하는 구원계시를 말하다. 이것이 다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엉뚱하게 방언기도는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성을 증진시키는 비밀대화라고 하면서 많이 할수록 좋다고 가르치고 있다.

고전 14:2절은 방언이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는 바울의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나님께 방언으로 복음의 비밀을 하나님께 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비밀을 모르시니까 사람이 방언으로 가르쳐 드린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난해구절이다. 난해구절을 억지로 풀면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이러한 난해구절을 멋대로 해석하면서 아무렇게나 인용하여 방언이 하나님께 영적인 비밀을 이야기하는 기도라고 가르치는 것은 위험스러운 행동이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이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중대한 사실은 초대교회의 방언은 객관적인 통역과 함께 교회에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점이 오늘 날의 소리현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오늘 날 방언을 한다는 사람은 수 없이 많으나 객관적으로 신빙성있는 통역이 이루어지는 방언은 없다. 통역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마다 다 다른 뜻으로 푼다. 그러므로 오늘 날의 방언이라는 것은 결코 신뢰할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방언이랍시고 공개적으로 교회에서 소리를 발하는 행동은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위험스러운 행동이다.

조용기 목사가 예배 중에 했던처럼 스스로 방언을 말하고 스스로 통역하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2인 이상의 다른 사람이 방언하는 사람과 사전에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고서 방언을 듣고 즉석에서 성령의 역사를 따라 말해야 한다. 그때 두 사람 이상이 같은 뜻으로 통역하면 그들의 방언과 방언 통역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르는 것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과연 어디에서 그러한 방언과 방언통역을 볼 수 있겠는가?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에는 그 통역하는 내용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더 이상 새로운 단어와 내용은 나타나지 않고 비슷한 내용들이 반복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라면 그 의미와 내용과 표현이 무궁무진할 것인데, 왜 비슷비슷한 말들이 반복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고 자신들의 느낌과 감각대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용기 목사처럼 스스로 방언 말하고 스스로 그 내용을 통역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영적가교 역할을 자처하는 현상은 더욱 더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현존하는 계시의 통로가 되기 때문인데, 성경이 있는 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자기 자신에게와 하나님에게만 말하라고 하였을까?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께 말하고, 또한 자신에게도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해석해야 할까? 방언으로 인한 무질서가 횡횡했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반드시 현장에서 객관적인 통역이 가능 할 때에만 방언을 활용하라고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하지 말라는 말을 더욱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께 말하고 자기에게 말하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을 근거로 방언이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던 특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방언을 교회에서는 반드시 통역과 함께 활용하라고 하였다는 것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방언의 내용을 통역함으로 교회와 성도에게 신앙의 유익이 분명하게 나타났었다는 추론이다. 바울 사도가 유익이 없는 일을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방언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설명이었거나, 복음에 근거하여 성도에게 주시는 권면과 교훈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보면, 성경의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복음전파의 보조적인 수단이었다. 이첨 초대 교회의 방언은 성도와 교회에 확실한 유익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방언을 통한 유익을 얻는다고 객관적으로 말할 근거가 없다.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권면을 받고 있지도 않다. 이미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여 적용하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을 따라 신앙생활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보조수단이었던 방언이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초대교회의 방언에 대해 언급하는 대부분의 성경말씀들이 방언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사람에게 말했다고 기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방언한다는 사람들은 방언이 하나님께 더 잘 기도하게 하는 은사라고 우긴다.
 

하나님과의 비밀대화가 방언이었나?

특이한 소리현상을 성경의 방언이라고 하면서 영혼에 매우 유익하니 그 모양이 우스꽝스러울지라도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실행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그런 비성경적인 말에 현혹되어 단잠을 줄이고 새벽부터 교회에서 “우알랄라 우알랄라 엘렐렐레 센노리세”...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이런 소리를 내는 분들이 있다. 그 소리 때문에 새벽에 함께 기도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의 귀에는 저리 유치할지라도 그 속에는 무궁무진한 영적인 의미가 있고 하나님은 다 알아들으신다고 가르치는 말들은 성경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이런 괴이한 소리가 신령한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다음의 성경구절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이 부분을 근거로 들면서 방언은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의 기도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영’(헬라어 ‘프뉴마’)는 무엇이고 또 ‘마음’(헬라어‘노우스’)은 무엇인지를 규명하여야 한다. 단순히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따라 영과 마음을 완전히 분리하고, 영과 마음은 전혀 다른 세계이며, 서로 교차하거나 함께 맞물려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이 구절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이분법적인 이해는 그리이스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전에 우리에게 입력되어 있는 선입견이 아닐까? ‘영’(프뉴마)라는 개념이 성경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셀 수 없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이 단어를 또 다른 성경에서 ‘마음’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고 나면 여기서 말하는 영과 마음이 서로 분리된 각각 배타적으로 독립된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방언은 영의 기도이고 모국어 기도는 육의 기도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주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금방 드러난다.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프뉴마’)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후 4:1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프뉴마’)이 아니요”(딤후 1:7)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니 마음으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바울의 난해한 말은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오용하는 성도들에게 방언은 기도의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친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싶다. 하나님께서 개인의 기도에 활용하라고 방언을 주시지 않았으며, 방언을 기도에 도입할지라도 그 자신에게는 영적인 유익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일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이 구절을 통하여 방언이 천사의 언어라는 주장을 펼치는 더욱 한심한 사람들도 있다. 이 말씀은 방언이 천사의 언어라는 내용이 뜻이 전혀 아니다. 사랑이 중요한 신앙의 핵심 덕목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말씀일 뿐이다. 사람들은 방언 등의 겉으로 드러나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게 하는 은사와 이적에 더 예민해진다. 종종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있는 겉으로 과시할 수 있는 은사를 자랑하거나 남의 은사에 대한 시기심이 발동하여 보기 흉하게 경쟁하는 모습들이 나타난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서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더불어서 행하는 것이 그 어떤 은사보다 더 가치있는 최고의 은사라고 강조한 것일 뿐이다.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아세아연합대학 대학원(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을 졸업했다.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에서 수학했고, 현재 미시간의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와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계속 연구한다.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를 출판하였고,「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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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만 2018-11-25 03:57:21
방언의 이해와 유익에 대해 분명히 알지도 못하는 자가 글을 길게 쓰고 비판이나 하니 한심한구나!
분명 정이철씨는 성령을 체험하지도 못했고 방언기도도 못하는 부류일 것이다.
신령한 일은 신련한 것으로 분별하건만 영ㅈ의 세계나 은사에 대해 제대로 모르면 잠잠히 거하거라.
하나님의 신학이 아닌 자기 신학에 함물되어 다른 사람이나 단체를 비판만 하고 나대질 말고....

방언 2014-10-10 22:12:55
정이철 목사님
링크해 주신 [옹알거림의 성경적 근거는 매우 불확실]에
다섯개의 댓글을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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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2014-10-08 10:50:07
고린도전서 14장 2절 말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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