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예배당 정문에 게시한 반박문은 이신칭의에 관한 선언은 아니었다. 로마 교황청이 실시하는 부당성에 관해서 95개 조항을 공포한 것이다. 그 부당성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로마서 1:16-17을 근거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이었다. 루터는 실존적으로 죄 사함을 시도한 위인이다. 그는 수많은 고행에도 죄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인식했다. 당시의 모든 방법, 성지 순례, 고행 등등을 동원했지만 죄가 사라지지 않음을 알았다. 그렇게 죄와 사투를 벌리는 신실한 수사가 로마서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고행방식(충족설)’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확신하면서, 로마 교황청의 가르침이 부당함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95개 반박문을 게시하기까지 이르렀다.

“이신칭의가 완성된 교리인가?”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다. 16세기 루터는 자기 시대(부패한 교회, 복음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에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한 성경의 보석이 나왔고, 그 보배로 빛을 반사시킨 것 밖에 없다. 이신칭의는 사도행전 15장, 로마서, 갈라디아서에 근거한 성경에 근거한 가르침이다. 이신칭의는 바울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울이 주도했더라도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결정한 교회의 가르침이다(행 15장).

“이신칭의가 부족한 교리인가?” 루터파 지역인 독일에서 세계 전쟁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신칭의 교리에 문제가 있는가? 그렇다면 히틀러에게 항거하며 죽임 당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완전한 그리스도인가? 이신칭의 교리는 어둠 시대에 빛난 성경의 가르침이고, 그 복음으로 교회를 개혁했다. 개혁된 교회는 다시 개혁되어야 하지, 뒤로 후퇴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이신칭의 교리는 경건주의, 자유주의, 현대신학에서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고 받고 있다. 한국 신학계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이신칭의를 공격하는 진영에서 신학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서구 신학계에서 이신칭의 교리는 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톰 라이트는 패배 소식을 듣지 못한 숲속에서 항전하는 수준으로 평가했다. 1999년에 루터파와 로마 교황청이 칭의 교리 협약을 했고, 영국 국교회, 감리교 등이 교류 협약을 했다. WCC의 행보는 이제 거대담론을 형성해서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1517년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를 붙들고 서 있는 것은 세계 교회에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지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만용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한국 교회가 유대인과 접촉점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는 이신칭의 교리를 붙들고 교회를 세우며 열국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칭의에 대해서 계속 혼란을 주는 문장에 대해서 간략한 제시를 하려고 한다.

첫째, 칭의를 “과거, 현재, 미래로 보는 견해”이다. 칭의를 이해할 때 ‘하나님 나라’ 도식으로 볼 때, ‘이미와 아직’의 양면성을 고려한다. ‘하나님 나라’는 ‘세계 전체’에 하나님 나라 실현을 목표하기 때문에 ‘교회’와 다르다. ‘구속사’를 ‘세계 전체’로 볼 것인가? ‘교회’로 국한 것인가를 분명하게 정의해야 한다. ‘이미와 아직’은 구속사 도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칭의를 논할 때에는 개인의 구원 서정을 제시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개인의 구원 서정에 관련한다. 이미와 아직은 구원사와 관련한다. 구원사와 구원의 서정이란 두 주제를 한 문단에 혼용해서 사용해서 이해할 수 없는 혼란으로 넣었다.

둘째, 칭의는 모두 ‘법정적 칭의’로 이해한다. 법정적 칭의 시점이 어디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뿐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에 ‘법정적 개념’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법정이 ‘마지막 날(미래)’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신칭의는 ‘과거’에 법정적 칭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법정적 칭의는 ‘현재’ 시간에 발생했다. ‘그 현재’가 지나 ‘과거’가 된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서정이고, 그 발생한 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구원파에서는 그 구원이 발생한 시점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몰랐을 때 무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에 발생하는 법정적 칭의 사건을 인식한 사람은 사도 바울 뿐이다. 그 때 칭의도 주(主)께서 신분을 밝힘이었지 법정적 선언은 없었다. 그러나 신학에서 ‘그 부름’을 ‘법정적 칭의’로 정립한 것이다. 칼빈은 자기의 구원을 ‘갑작스러운 회심(subita conversio)’으로 소개했다. ‘현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은 ‘과거 어느 시점’에 법정적 칭의가 되었을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시점’을 현재 보았을 때 과거지만, 반드시 ‘그 시점’은 ‘그 당시 현재’에 발생한 사건이다. 현재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을 현재 자기 윤리 행위(=성화)라고 하고, 그 결정도 미래, 자기 죽음도 아닌 마지막 날에 심판장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 미래가 최소한 개인의 죽임이어도 문제인제, 미래에 개인의 죽음에 대한 배려는 없다. 마지막 날까지 ‘개인의 죽음’에 대한 대체한 제시가 없다.

셋째,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법정적 칭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말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루터가 이신칭의를 선언했고, 칼빈이 이중예정을 확립함으로 종교개혁사상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이신칭의에 탈락가능성이 없는 이중예정 이해이다. 그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의지(不變性, immutability)를 믿기 때문이다. 김세윤, 새관점은 더 크게 불변의 ‘단순한 하나님의 계획(라이트의 God's Simple Plan of Salvation)’을 주장한다. 그럼에도 유보적 칭의, 미래적 칭의에서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다. 구원의 탈락 가능성이 성경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면 더 당혹스럽다. 성경에 더 많은 부분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말씀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참 신자와 가면 신자를 구분한다. 가면 신자의 교회 이탈은 구원 탈락이 아니라 본래 탈락된 자이다.

넷째, 이신칭의, ‘칭의와 성화’, ‘성화가 윤리로 드러나야 한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예수께서 주와 구주이심을 증언하는 것이다(행 1:8). 증인(증언)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마 28:16-20).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복음 전파를 부여하지 않고 윤리의 당위성을 말하는 것은 우선순위에 문제가 발생한다. 왕권에서 우선순위가 바뀌면 반역하는 행동이다.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예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세상을 섬기는 것이고 윤리이고 문화이다. 바울이 말하는 윤리는 반드시 교리에 근거한 것이었지, 윤리를 위한 교리는 없다. 그리고 윤리와 성화는 전혀 다르다. 윤리는 세상의 것이고, 성화는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와 성화를 혼용하는 것은 땅과 하늘을 섞는 무도한 일이다. 개혁신학이 윤리를 강조하지만 성화와 철저하게 구분한다.

다섯째, 이신칭의 교리를 인간의 공로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은 부당하다. 이신칭의가 공로주의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기복주의(현세지향주의)가 공로주의로 연결된 것이다. 이신칭의와 기복신앙을 동의어나 혼용해서 보는 것은 부당하다. 기복신앙을 개혁해서 이신칭의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주요 과제이다. 이신칭의는 현재 도달하지 못했고 개혁하고 가야할 목표점이다. 현재 이신칭의 교리가 완수했다고 분석하는 것은 이신칭의 교리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천주교회가 세계적으로 범람한 상태이고, WCC 세력의 거대담론을 형성했다. 그런데도 이신칭의가 정착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물고기 배 안에서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다. 우리는 큰 물고기 안에서 토함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구원에서 인간의 역할을 부인하는 것은 동일하게 보인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인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오직 은혜, 이신칭의 교리에서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전적 구원은 윤리 메시지를 강조하는 부류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닌데,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두 주장(전적 하나님 능력과 윤리 행함 강조)을 견지하고 있다.

여섯째, 최갑종 교수는 구속은 성부, 칭의는 그리스도, 성화는 성령으로 구분, 별개의 것으로 말하는 등식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마치 삼위일체 한 구원 사역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기 체계로 신학 하는 한 단편이다. 이신칭의는 ‘성도가 구원 얻는 방식’에 대한 논의이지, ‘삼위일체 구원사역’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구원 얻음 교리가 이신칭의 교리이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그런데 교리 이해에서 삼위일체 도식을 도입시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 교회가 이신칭의 교리를 확고히 보수한다면, 세계 교회에 중요한 지표를 형성할 것이다. 허물어진 이신칭의 교리를 확실하게 세운 한국 교회가 있다.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 줄 수 있는 커다란 빛이다. 무너진 세계 교회의 희망이 한국 교회에 있다. 한국은 이슬람 등 각종 신비주의 사상이 범람하고 있다. 이신칭의를 무너뜨린 세계 신학이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이신칭의 교리를 향해서 쓰나미 같은 범람으로 공격할지라도, 이신칭의 교리를 담대하게 고백하면 든든한 교회를 유지하고 세울 수 있다. 교회는 믿음 고백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중세 천년의 어둠을 깬 능력의 믿음 고백이기 때문이다. 바른 교회가 세워질 때 기뻐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질 때 세계는 바른 질서를 소유했고 지금까지 기독교 세계관으로 유지되고 있다. 종교개혁이 생겨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종교개혁 500주년, 무너진 세계 교회를 한국 교회가 세울 때가 되었다. 이신칭의 교리를 굳건하게 세우자. 그리고 복음을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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