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종교의 명상의 다른 형태인 관상으로 이끄는 영성훈련 '렉시오 다비나'(성독, 거룩한 독서)는 원래 중세 천주교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천주교 신부 토마스 머튼과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거짓 기독교 영성가 리챠드 포스터, 또한 한국인으로서 그 영향을 받은 이동원, 강준민, 최일도 목사 등을 통해 한국 교회 속으로 들어왔다

종종 신문과 책에서 ‘렉티오 디비나’, ‘렉시오 디비나’,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본다. 성독(聖讀), 거룩한 독서, 영적 독서, 묵상 등으로 번역한다. 고영민은 큐티(QT)와 렉티오 디비나를 구분했다. 규티는 ‘관찰-해석-적용’의 3단계의 과정으로 삶의 적용을 강조하고, ‘렉티오 디비나’는 ‘읽기(lectio)-묵상(meditatio)-기도(oratio)-관상(contemplatio)’ 4단계 과정에서 자발적 기도를 강조하기 때문에 ‘말씀기도’라고 정의하며, 성경과 교회 역사에 뿌리는 둔 기도 방법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 ‘렉티오 디비나’는 ‘관상기도’를 위한 영성 훈련이다.

첫째, ‘영성 훈련’과 ‘경건 훈련’은 다르다. 경건 훈련은 하나님 경외를 목표하며 자기 한계에 멈추는 겸손을 훈련한다. 영성 훈련은 하나님과 자연 사랑과 포용을 목표하며, 무한한 자기 계발을 위해 훈련한다. 칼빈은 ‘성경 제자’들이 ‘경건’을 훈련하도록 제시했다. 영성 훈련은 ‘예수 제자’들이 ‘영성’을 훈련하도록 제시한다. ‘제자’는 반드시 ‘선생’이 인준해야 한다. ‘스스로 제자이거나 제자됨을 주장하는 사람’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둘째, 렉티오 디비나는 독서를 강조하는 독서 훈련이 아니라 관상기도로 이끄는 영성 훈련이다. 독서(讀書)를 강조하는 지성가가 독서의 최고 수준을 렉티오 디비나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독서는 본문(text)에서 의미를 찾는 훈련이고, 렉티오 디비나는 본문을 초월해서 실재를 직관(直觀, Intuition)하는 것을 목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경과 성령에 매이는 겸손 훈련을 한다. ‘직관(直觀)’은 ‘지복(至福)’이다. 천주교는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을 천국에서 가능하다고 제시했다2). 그것을 생전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직관’을 할 수 있다는 상상이나 제언을 버려야 한다. 천주교에서 직관은 생전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사후에 이루겠다는 욕망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사후의 그리스도인은 오직 보좌와 어린양께 경배와 찬양을 그치지 않는다.

셋째, 렉티오 디비나는 계시계속 사상 일환이다. ‘성경 본문을 넘어서’,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계시계속주의 사상이다. 교황주의와 수도원주의는 로마 카톨릭의 한 쌍 구조인데, 공통점은 계시계속주의이다. 교황과 공의회를 통해서 현 계시보다 우월한 계시가 나올 수 있고, 수도원주의는 ‘직관’을 통해서 계시가 계속된다.

렉티오 디비나는 어떤 매개 없이 실재를 직접 관조할 수 있는 수준까지 목표한다. 본문 독서가 아니라 직관이 목표하고, 성경도 나도 없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서 실재를 직관해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새로운 지식은 직관에 의한 산물이기 때문에 계시 사건이 된다. 신사도 운동은 외적 현상(병고침, 축귀, 예언? 등)에 의해서 ‘스스로 사도’라 분류하고, 사도 수준의 예언이 가능하다. ‘성경 66권’을 말하지 않는 기독교는 대부분 계시계속주의를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넷째, 렉티오 디비나 훈련에는 ‘숨쉬는 방법(호흡법)’까지 포함되어 있다. 호흡법이 있는 렉티오 디비나가 독서 훈련이 아니고 영성 훈련이라는 단초이다. 호흡도 독서를 위한 호흡이 아니라, 4단계에서 수용을 위한 호흡법이다. 렉티오 디비나의 최종 단계는 ‘관상’이다. 예수회원 월터 벌가르트(Walter Burghardt)는 ‘관상기도’를 ‘실재를 바라보는 길고 사랑스런 시선(A Long, Loving Look at the Real)’이라고 했다. ‘사랑스런 시선(Loving Look)’이 요점이다.

훈련(訓練, disciple)이 쉽게 진행할 수 있고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이 어리석다. 육체 훈련을 통과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래서 특수군대의 훈련을 통과한 사람들은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영 훈련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통과했다면 무한한 겸손과 헌신 그리고 자기부정이 발생하게 된다. 영적 자부심은 바리새인의 성품이다.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들어간 수도사들이 모인 수도원이 왜 부패했을까? 인간은 지복(至福)을 꿈꾼다. 그러나 지복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얻어야 할 수준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복’이 아니라 ‘자족’이다.

(참고) 마약(痲藥) 종류 중에 ‘엑스타시(Ecstasy)’가 있다. 엑스타시는 ‘메틸렌다이옥시메쓰암페타민(MDMA)’이라는 환각성분으로 ‘황홀경(ecstasy)’을 8시간까지 지속시킬 수 있는 약물이다. 인위적으로 황홀경을 만드는 방법은 최면술 등 다양한 방법이 있고, 가장 쉬운 방법은 약물을 통한 것이다. 인간이 지극한 기쁨을 느끼는 것이 황홀경이다. 그런데 마약은 쉽게 황홀경까지 다다르도록 하지만, 중독성과 함께 인체와 정신에 심각하게 피해를 준다. 피해를 알면서도 한 번 들어가면 끊을 수 없는 마력(魔力)이 있다. 마약(魔藥)에 무서운 중독자들은 밤에만 즐기고 낮에는 지극히 정상으로 활동한다. 우리는 담배를 마약 성분(니코틴 중독)이 있음으로 분류하면서도, 국가 공기업에서 판매하고 있는 실정이다.

--- 각주 ---

(1) 고영민, “렉치오 디비나의 역사”, [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8호] 2014년, 인터넷 사이트
(2) 인터넷 가톨릭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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