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란 무엇인가?(1)

‘칭의(稱義, Justification)’에 대해서 꾸준하게 논의하는데, 논의하면 할수록 합의점에 아닌 미궁(迷宮)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왜 많은 연구자들이 ‘칭의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데, 미궁에 들어가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칭의란 무엇인가>라는 동일한 책제목으로 몇 종류가 출판된 상태이다(최갑종, 새물결플러스, 2016; 가이 워터스, 신호섭 역, 부흥과개혁사, 2011). 이와 관련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주제는 훨씬 더 많은 출판물과 연구논문이 있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왜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혼란이 증대하는지 원인을 밝히면서 해소 방안을 제안하려고 한다.

1. 칭의 카오스(Justification Chaos)

‘칭의’를 논하면서 혼란이 증대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와 서구 교회의 차이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루터의 고뇌, 기독교화된 16세기 유럽 문화에 대한 이해를 고려하지 않는다. 서구 교회는 1945년 이후 유대교에 대한 이해를 전향했고, 1970년대 등장한 새관점학파(NPP)가 유대교에 대해서 전격적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먼저 서구 교회는 2차 대전 홀로코스트의 충격을 벗어가기 위한 일환으로 유대교에 대한 대립적인 종전 이해를 포기하고, 기독교에서 유대교에 대한 모든 비판 행위를 금지했다. 그리고 유대교에서 기독교의 근원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신학 방법으로 전환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고대교회와 연속성을 주장하는 종교개혁의 가치가 무의미하게 된다. 종교개혁의 ‘이신칭의’에 대해서 새롭게 해석해야 했다. 

이 과정을 앨리스터 맥그래스가 진행하고 있고, 새관점학파에서 진행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샌더스와 조금 다르게 칼빈파와 루터파를 구별하면서, 루터보다 칼빈을 선호한다는 주장을 자주한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가치를 무력화시키고, ‘칭의가 아닌 언약’으로 신학 이슈를 전향시켰다. 필자는 ‘언약 신학’에 대해서 논의할 때 현대 신학 조류가 이끄는 방향에 합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만약 현대 신학이 주장하는 언약 개념에서 벗어나려면, 17세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언약 신학을 고백해야 하고, 서철원 박사가 제시한 첫언약과 새언약 개념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언약 개념을 개진할 때는 현대 신학 조류에 편승한 것으로 분류하고 싶다. 그것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연속된 관점에서 보려는 현대 신학에서 역사를 보는 관점이다.

현대 신학의 주된 역사의식은 ‘한 하나님을 근거로 한 동일한 역사 개념’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계시’가 현재도 계속되고 발전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연속적으로 보려는 좌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계시’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칭의’를 논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생뚱맞은 주제가 되었다. 서구 신학에서 ‘칭의’는 합당한 주제가 아니라 도태되어야 할 주제이다. ‘칭의’ 개념이 드러나면 ‘유대교와 기독교 연속 개념’이 자리를 잡을 수 없다.

한국 교회에서 칭의 혼란이 증대하는 이유는 ‘루터와 16세기 유럽 사회’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루터가 ‘의롭게 됨’에 대해서 고민했다고 이해한다. 루터가 ‘의롭게 됨’이 ‘칭의’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해하는 ‘칭의’와 ‘다른 칭의’가 될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칭의는 ‘불신자가 의인(신자)이 되는 칭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신자로서 의롭게 됨을 고민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칭의와 다른 수준이다.

16세기 유럽 사회를 개혁하는 주장이 독일, 스위스, 프랑스, 유럽 각지에서 발생했지만 기독교 사회를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사회를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절반의 성공으로 정착되어 신교와 구교가 분리되는 정치 현상으로 귀착되었다. 그것은 30년 전쟁을 마치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이다. 기독교 사회(Christendom)에서는 신자와 불신자의 갈등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피선교 지역으로 30%의 선교 위업을 달성했지만, 여전히 사회 일반 수준까지 이르지 않았다. 불신자를 신자로 만들어야 할 복음전도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칭의’는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전환점’이다. 그러나 유럽 신학에서 ‘칭의’는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 되는 것’이다.

기독교화된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한 신학 주제는 ‘남은죄’에 대한 이해이다. 종교개혁 전에는 산 자의 남은 죄와 죽은 자의 남은 죄를 교회가 결정했고, 면죄부를 통해서 죽은 자의 남은 죄를 청산하는 구조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보다 나은 교회를 위한 몸부림인 종교개혁 교회는 ‘남은 죄’를 청산하는 것을 ‘중생’으로 제시했다. 그것을 칼빈의 ‘광의적 중생’ 개념이라고 한다. 칼빈도 시대의 인물로 신자의 발생에 대해서 심각한 고려가 부족했다. 그리고 16세기 로마 교회의 선교는 불신자를 신자로 만드는 방식이 아닌, 정권을 정복해서 사회 체계를 기독교화려고 시도했다. 1,000년 기독교 사회에 익숙한 유럽이 가진 족쇄라고 평가한다. 그것을 루터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주해를 통해서 깨뜨렸고, 칼빈은 체계적으로 완성했다. 루터와 칼빈이 한 종파를 이루지 못한 것은 당시 그들이 정치, 문화의 한계 속에 있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 칭의를 주장하면 신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서구 신학에서는 그런 사안에 대한 방안이 없었다. ‘새 신자’를 만드는 것이 아닌 ‘바른 신자’를 만드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다. ‘새신자 만듬’에 관심이 있는 한국 교회가 ‘바른 신자 만듬’을 지향하는 ‘칭의 신학’을 적용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혼란을 겪은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바른 신자 만듬’에 칭의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화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성화는 ‘의롭게 됨’이 아니라 ‘더 의로워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루터가 주장한 칭의는 ‘보다 의로워 지는 과정’에 대한 주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루터는 자기 실존적 갈등에서 ‘이신칭의’를 주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기 개혁파 진영(루터파가 아닌)에서 구원 서정(Ordo Salutis)을 제시했다. 한국 교회는 루이스 벌콥의 견해를 따른 박형룡의 서정을 일반으로 생각한다(소중회신칭수성견영(召重回信稱收聖堅榮)). 이 때 칭의는 첫 단계가 아닌 다섯 번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칭의’를 이해할 때 ‘칭의’ 개념에 대해서 모호하게 생각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칭의를 ‘죄인이 의인이 되는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서구에서 주장하는 칭의 개념에 대해서 차이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세윤은 ‘칭의와 성화를 동의어’로 제시하기도 했는데, 서구 신학을 반복 답습하여 소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에 대한 배려가 없는 신학 견해이다. 필자는 칭의는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구원의 현실화) ‘구원협약(pactum salutis)이 역사에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엡 1장). 그래서 칭의에서 ‘죄인이 의인으로 존재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존 머리(John Murray, 1808-1878)는 칭의 확실성에 대해서 ‘결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 개념을 제시했다.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복음을 강조하는 한국 교회와 선교적 교회에서 칭의는 현실적이고 역동적인 과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미명으로 개종 선교를 금지하는 WCC의 정책에서 ‘칭의는 걸려넘어지게 하는 반석’이다. 종교다원주의 지향 신학에서 칭의는 사라져야 할 기둥이다.

우리가 왜 ‘칭의’ 개념에서 혼돈(chaos)을 하는가? 그것은 명확한 전도 개념이 약하거나 없기 때문이다.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칭의 개념을 갖고 있으면서, 학문을 위한 신학을 하거나(약함), 종교다원주의 지향, 유대교와 기독교 일원화 방향(없음)의 흐름에서 있으면 당연히 칭의 개념은 혼돈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칭의 개념을 포기하면 울렁증은 사라질 것이다.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칭의 개념을 갖고 혼란에서 벗어나려면 정확한 믿음의 좌표, 믿음으로 신학을 해야 하고, 성경 무오 교리를 굳건하게 지키며 그리스도 믿음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 일원주의 현대신학에 대해서 배격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서 확고한 신학 지식을 갖기를 기대할 수 없다. 양자를 택해야 한다. ‘좁은 칭의 길’(불신자를 신자로 세움)을 포기하고 넓은 신학의 길(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음)을 가든지, 좁은 칭의 길을 선택하고 넓은 신학의 길을 포기해야 한다. 좁은 칭의 길과 넓은 신학의 길을 동시에 취하려는 자세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행동으로 훨씬 위험하고 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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