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의 성령사상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문제점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다. 성령의 기름부음 사상은 이미 성령을 모시고 사는 신자들에게 반복되는 성령의 임재를 주장하는 오순절 신학의 성령 이론과 관련된 비성경적인 내용이다. 오순절 운동 신학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으시고 성령을 부어주신 사람에게 이후 반복적으로 성령을 더 부어주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신학은 성령의 반복적인 임하심을 표현하고, 또한 성령이 계속 더 오실 때 나타나는 이상한 권능(?)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적절한 용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말이다. 오순절 운동가들의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말은 마치 공사판에서 먼저 놓인 벽돌 위에 다른 벽돌이 쌓이듯이, 떡 시루 속에서 시루떡이 떡이 층층이 쌓여 익어가듯이, 물동이에 물이 더 부어져서 물이 차고 넘치게 되듯이 처음 구원받을 때 오신 성령 외에 더 많은 성령이 계속 임하시어 성령의 권능이 차고 넘치게 된다는 비성경적인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나쁘고도 멋있는 용어이다.

오순절 교회와 그 외의 장로교회 등의 교회에 다니면서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는 사람들에게 “대체 성령의 기름부음이 무엇이오?”라고 물어보라! 아무도 시원하고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성령의 능력을 더 받는다는 모호한 말을 하기만 한다. 그 이유는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는 불행하게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쓴 다는 것을 그 사람이 마귀의 거짓 성령운동에 사로잡힌 즏거라고 여겨도 크게 틀리지 않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문론 성경에 기름부음이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얻은 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에게 임하신 성령 그 자체를 ‘기름부음’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해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표현하였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이라는 말에는 다음과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처럼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으로 쓰시기 위해 택하셨음을 의미하는 관용적인 표현이었다. 둘째는, 다윗처럼 왕으로 선택된 사람에게 실제로 기름을 붓는 의식을 뜻하는 말이었다. 셋째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에게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신이 특별하게 함께하기를 시작하니 하나님의 신의 임재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구약의 기름부음의 의미를 크게 요약하면, 하나는 하나님이 쓰시려고 택하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신(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신약의 모든 참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자들이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를 씻으신 후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방식을 차용하여 신자들을 향하여 “기름부음을 받았다”, “기름부음이 거한다”라고 기술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받은 모든 성도들이 이미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임을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마귀는 매우 고약한 술수를 동원했다. 이미 구원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또 다시 반복적으로 오신다는 거짓 성령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마귀는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개념을 앞세우며 침략했다. 성령은 한 번 오심으로 완전하게 영구적으로 오신 것인데, 이후에 또 추가적으로 더 오신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교본인 성경에 없는 내용이다. 실제로 그렇게 일하는 성령은 성경에 없다. 그런 일을 벌이는 영은 성령이 아니고 악령이다.

그러므로 반복적인 성령의 오심을 전파하는데 요긴한 수단으로 쓰여지는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우리는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특히 쓰러지고, 옹알거리고, 몸이 마비되고, 정신이 몽롱해지고 ... 이런 지저분한 것들을 보고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했다고 하고 있으니, 이 말이 거짓 영들이 장난하도도록 돕는 유용한 수단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80년대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것이 뜨겁게 퍼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신사도 운동으로 정착된 존 윔버(John Wimber)의 빈야드 운동의 핵심이 ‘Anointing’(성령의 기름부음)이었다. 그 이전 오순절 운동가들이 자기들의 추잡한 성령운동을 이 말로 설명하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온 세계에 무작위로 이 용어를 전파한 것은 빈야드-신사도 운동이다. 신사도 운동의 핵심은 마귀의 수작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이론으로 무수한 영혼들에게 확산시키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들먹이는 사람들 대부분을 이단 스타일로 간주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되는 혼탁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불행하게도 로이드 존스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무척이나 애용하였다. 그래서 불량한 은사주의자들이 그의 글을 읽으면서 좋아하고 신났다. 그 때문에 위대한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거장 로이드 존스는 그 불량한 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대체 로이드 존스는 왜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을까? 사도 요한이 언급한 ‘기름 부음’이라는 말이 로이드 존스에게 성령의 기름부음 개념을 가지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이드 존스는 요한일서를 강해하면서 요한 사도가 성령으로부터 신자들에게 흘러나오는 ‘영향력’을 좀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기름부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해석했다. 물론 로이드 존스의 말은 틀리지 않다. 실제로 요한 사도는 당시 영지주의의 공격을 받고 있는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영지주의의 거짓됨을 분별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기름부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요한 사도의 이 말은 성령이 깨우치고 지도하시니 신자들이 결코 이단에게 넘어가서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영향력을 뜻하는 차원에서 사도 요한이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로이드 존스의 해석은 맞다. 사도 요한은 처음 믿을 때 이미 신자들에게 영속적으로 임하신 성령이 신자들의 마음을 조명하시므로 성령을 모시고 사는 신자들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자신들에게 적용하여 영지주의 이단을 불리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요한이 말한 그대로 ‘기름부음’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조금 바꾸었다. 이것이 로이드 존스가 분명히 책망을 받아야 할 일이다. 성령 그 자체를 기름부음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로이드 존스는 왜 우리 안에 ‘기름부음’이 이미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하였을까?

로이드 존스는 성령을 받고 거듭난 신자들에게 이후 성령이 추가적으로 오신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성령이 더 오시어 부흥과 능력을 주시는 등의 성령의 특별한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이 추가적으로 부어주시는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힘, 영향력, 능력을 의미하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였고, 그것을 사도 요한이 말한 대로 ‘기름부음’이라고 하면 충분하지 않으니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조금 바꾸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기름부음은 신자의 일생에 단 한번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로이드 존스가 성경대로 ‘기름부음’이라고 했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이고, 오늘 날의 불량한 이단 스타일의 성령운동가들이 로이드 존스까지 이용하여 자기들의 이단 기질을 미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령받고 구원받은 신자에게 성령이 추가적으로 더 부어진다는 그릇된 신념, 그리고 성령이 더 부어질 때 권능과 능력과 부흥이 나타나게 됨을 표현하기 위해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로이드 존스는 이단 스타일의 성령운동가들에게 멱살을 잡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로이드 존스와 성령운동가들이 꼭 같은 관점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 현대의 불량한 성령운동가들은 거짓 영들이 일으키는 지저분하고 웃기는 현상들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영광, 거룩을 체험하게 만드는 성령의 역사를 뜻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내적 조명하심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개념을 더욱 많이 표방하였다. 로이드 존스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이야기하는 내용을 직접 읽어보자.

“...(중략) 많은 사람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시대도 있었으며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까지도 잘못된 길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여겨지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남은 자들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왜인가? 바로 성령의 기름부음이 그들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을 믿음 가운데 그리고 진리 가운데 보호해 지켜 주셨기 때문이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내재하는 동안에는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로이드 존스)

그런데 동시에 로이드 존스가 오순절 운동가들과 신사도 운동 성령사역자들이 사상과 동일한 차원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로이드 존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여 능력으로 충만해졌다고 가르쳤다. 이 부분은 성령의 반복적 임재를 가르치는 오순절 운동가들이 말하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로이드 존스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았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 시 한번 말하면 주님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그분에게 임하셨다. 바로 그때 주님은 메시아적 사역과 구원사역을 위해 기름 부음을 받으셨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이해하는 것은 명백하게 비성경적이다. 비록 사람으로 태어나셨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완전한 제 2의 성자 하나님이셨다. 성자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성령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언제나 성령 하나님과 신비하게 연합되어 계신다. 성부, 성자, 성령은 인격적으로는 다른 분이시나, 본질적으로는 언제나 한 분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결코 분리되시지 않고 언제나 서로가 서로 안에 내주하시며 계신다. 그러므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성령의 능력을 받는 차원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신학 주장은 용납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태중에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출생하여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내내 성령과 함께 하셨고,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셨다. 우리처럼 죄인으로 태어난 분이 아니므로 죄 사함과 성령으로 중생하시는 과정을 거치시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하셨으므로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후 진행되는 성화의 과정도 거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능력을 전수받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며,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격하시킴으로 나오는 비성경적인 발상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눅 4: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나사렛 회당에서 구약 이사야의 이 예언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날 저의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라고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근거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으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실제 내용은 없다. 그 자신이 성령과 연합되셨고, 그 자신이 성령을 보내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이나 성령의 능력을 받는 기름부음을 받으실 이유도 없으신 것이다.

이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약의 기름부음의 의미를 성취하는 메시야로 오시었다는 뜻이다. 구약 시대에 기름부음을 받았던 세워졌던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오시어 그 기능과 사명을 완성하시는 메시야로 오셨음을 스스로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처음부터 성령을 자기 안에 담지하고 오시어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메시야로 오셨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요단강 세례시의 일을 예수님께서 메시야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능력을 받기 과정으로서 성령의 기름부음이었다고 가르친 로이드 존스의 말을 완전히 틀렸다. 또한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본을 받아 중생 이후에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한다는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은 더욱 더 경계받아야 마땅할 위험한 이단사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셨던 것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해결해야 할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자기 몸에 전가 받으심이다. 그와 동시에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시어 서로 협력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려는 사역을 시작하심을 드러내는 특별한 의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가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에 대해서 마땅히 이렇게 가르치지 않고 창자 전개될 메시야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 능력받으시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에수님에게 임했다고 하였으므로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단 스타일의 성령운동가들이 춤을 추면서 즐거워하였다. 왜냐하면 개혁신학의 거장 로이드 존스가 자기들의 이단적 성령세례 사상과 동일한 내용을 말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능력을 받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구원 이후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고 이와 같이 가르쳤다.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피조물들과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해 버린 것이다.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이며 피조물인 우리들의 신앙 여정의 모델로 간주하는 실수를 범했다. 성령으로 잉태되고 출생하신 예수님도 다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모든 신자들도 중생할 때 이미 성령을 받았을지라도 더 능력을 받기 위해 성령의 기름부음을 사모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로이드 존스의 엄청난 실수였다. 

이단 스타일의 성령운동가들이 로이드 존스를 두려워하지 않고 반대로 로이드 존스를 만만하게 여기면서 그의 말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던 것처럼,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께 더 쓰임받기 위해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하다는 그릇된 성령의 기름부음 이론을 로이드 존스가 일찍 앞장서서 크게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놀라운 부흥을 이끌어 낸 지도자들 대부분이 그러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설명하였다.

“조지 윗필드는 성령의 기름부음과 능력을 느끼지 못한 채 설교한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사람의 사역에도 편차가 있었습니다.”(로이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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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