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의 차이를 모르는 한국 교회(1)

성경에는 통일성이 있다. 1600여년의 기간 동안 여러 지역에 살던 각계각층의 약 40여명의 기자가 기록했음에도 그 모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수렴된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외적 증거라고 고백한다. 신적 통일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도, 신약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발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다룰 것이다)을 발견해야 한다. 이 목적도 역시 예수님과 관계가 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러한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보아야 길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통일성과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신약과 구약은 또한 분명히 다르다. 필자는 여기서 세세한 신학적인 문제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에 심각한 오해를 야기하며 기독교 신앙을 우상숭배(혹자는 이것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르지만 우상이라는 것이 결국 현세적인 기복을 위해 인간이 만든 것이다)로 만드는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고 대우하시는 것에 관한 문제이다. 구약에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수준과 신약의 그것은 전혀 다르다. 구약의 분위기는 사뭇 현세적이다. 구약이 말하는 복과 저주는 모두 육신과 땅에 관한 것이다. 메시아에 관한 진술들도 대부분 현세적이다. 유대인들이 소위 ‘정치적인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던 것은 구약의 가르침 상 당연한 것이다. 구약에 천착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세례 요한조차도 메시아에 대해 혼란스러워 한다.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눅 7:19, 20)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마11:11 ; 눅 7:28 참조)였다.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 중에는 가장 위대한 자라는 의미이다. 육신으로 태어났다는 말은 ‘성령으로 나지 아니했다’는 의미이다. 위의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은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이다. 여기서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이고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요 3:5)이다. 즉 예수를 믿는 신약의 백성들이다.

구약의 위대한 족장들, 믿음의 선진들, 선지자들보다 위대한 세례요한이다. 성경에서 ‘큰 자’, ‘작은 자’의 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이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멀리서 보고 기뻐하였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선지자들도 메시아의 시대를 바라보며 예언했지만 예수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 분에게 세례를 준 사람이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그 분의 길을 예비하는 자인 것을 안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잠시 의심했다. 자기가 알아오던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분이 메시아라면 자기가 감옥에 갇혀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분이 오시면 ‘이 땅에서’ 다윗의 왕국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던 모든 악이 궤멸되어야 한다. 그러나 헤롯은 여전히 승승장구하며 로마제국은 건재하다. 반면 자신은 그들에 의해 감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필자에게 있어 세례 요한의 이러한 오해는 일면 충격으로 다가온다.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아닌가? 선지자라면 적어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메시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선지자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보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구약의 예언서에 대해 설명할 때 ‘선지자적 원근 통시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산을 멀리서 바라볼 때 가까운 봉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봉우리가 한꺼번에 보이지만 실제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거리는 대단히 먼 것을 비유한 것이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구약의 선지자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멀리서 바라보며 거의 하나의 그림으로 이야기 하지만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적 간격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례 요한의 예를 통해서 보면 이 ‘선지자적 원근 통시법’에 의해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선지자들도 결국 멀리서 산을 바라본다. 큰 윤곽은 보이지만 그 안의 세세한 부분들을 볼 수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그 산의 세세한 모습은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만 산을 설명한 것이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이 그러한 인식을 가졌다면 구약의 사람들이 메시아를 몰라보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해도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한 것이 오히려 신기한 것이다. 실제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까지 메시아를 빙자해서 세상 권세를 얻으려 했다(막10:37 참조). 이들이 바른 메시아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요16:13)하신 것이다. 성령께서 오신 것은 모 교단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이적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는 것이다(이 교단은 성령을 완벽하게 오해했다. 이것은 오해라기보다는 신성모독에 가깝다).

신약에 오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신약은 육신의 것, 현세적인 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맛보고 밤새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6,27).

예수님은 ‘육신의 떡’이 아니라 ‘하늘의 떡’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떡은 복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육신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백성들에게는 시내산 언약이 주어진다. 시내산 언약에 딸려있는 복과 저주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그것이다. 다분히 현세적이다.

반면 신약의 백성들에게는 산상수훈이 주어진다. 이것에 딸려있는 복과 저주는 천국과 지옥이다(마5:17-20; 7:21-27 참조). 여기에는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 신구약은 이렇게 극명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신약을 살아가는 소위 ‘말씀대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구약의 ‘말씀’을 아무런 여과없이 사용한다. 그들에게는 대단한 확신이 있다. 소위 ‘기록된바’에 대한 확신이다. 물론 그들이 제시하는 말씀은 기록된 말씀이다. 그러나 그 기록된 말씀은 ‘바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사탄과의 싸움에서 인용하신 말씀 중에는 기록된 것을 정확하게 인용하지 않으신 것이 있다(이것에 대해서는 ‘영적 전쟁’을 다루는 글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말씀의 주인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나타내신다. 기록된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확한 의미를 모르면 ‘말씀대로’ 했는데 심지어 ‘말씀’에 생명을 걸었는데도 세례 요한과 같은 혼란과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사실 이단도 자기들은 ‘말씀대로’ 한다. 성경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단이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으면 타종교이다. 오늘날 정통에 속한 소위 ‘말씀’을 강조하는 자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도 위에서 진술한 신구약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해서 이단과 별 다를 바가 없다.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의 차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세가 너희 마음이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19:8)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빙자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주신 말씀이다. 여기서 “모세가 허락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너희 마음이 완악함을 인하여”이다. 하나님께서는 참 많은 것을 내려놓으셨다. 그 분은 죄를 보면 ‘돌격’(출19:22,24참조)하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완악함을 이해하신다(창8:21,22참조). 원래 혼인에 관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일부일처(말2:15참조)이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하신다(삼하 12:8참조). 구약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도 내주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엄위하시고 온전하신 요구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합당한 정도만 요구하신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또한 현세적이고 육신적인 복과 저주를 제시하신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늘의 떡’을 이해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11장, 28장의 복과 저주는 ‘완악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채찍과 당근이다. 유치원 정도의 아이들에게는 사탕과 약간의 벌이 동기부여가 된다. 아이들은 사탕을 얻기 위해 ‘좋은 일’을 하고 벌을 피하기 위해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좋은 일’은 하고 ‘나쁜 일’은 피한다. 사탕이나 어린 아이가 받는 벌은 어른들에게 전혀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 백성이 ‘완악’하다는 것은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백성들은 유치하다. 반면 신약의 백성들은 성숙하다. 인간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대로 구약에서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성령의 내주도 없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시작한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몸을 성전 삼고 내주하신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이것은 사실 유치원생과 어른의 차이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수준’이나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신약의 요구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6)

하나님께서 ‘새 영’, ‘부드러운 마음’을 주입하지 않으시면 절대로 불가능하다. 신약의 백성들은 이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신약의 백성들에게 레위기, 신명기의 복과 저주를 제시하면서 동기부여를 하려는 자들 때문에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되지 못하고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 하나님 신앙과 우상숭배의 차이는 그 숭배의 대상이다. 하나님 신앙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높인다. 그러나 우상숭배에서 관심하는 것은 사실 신이 아니고 나 자신이다. 구약의 복과 저주에 대한 관심은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다. ‘내’가 상을 받을 것인가 벌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다. 참된 하나님 신앙의 관심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다. 나의 행위로 ‘내가 벌을 받을 것인가 상을 받을 것인가’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인가 모욕을 받으실 것인가’이다.

오늘날 신구약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복음 또한 복음이 아니다. 새로운 유대교이다. 새로운 ‘조상(장로)들의 유전’(갈1:14참조)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말씀대로’의 말씀은 ‘장로들의 유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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