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復興, revival)은 ‘물량’이 아니라 ‘순수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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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復興, revival)은 ‘물량’이 아니라 ‘순수 회복’이다.
  • 고경태
  • 승인 2017.03.2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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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改革, reformed)’ 뒤, 17-18세기에 ‘부흥(復興, revival)’이 일어났다. 부흥(復興)은 종교개혁이 약화될 때 종교개혁을 강화하기 위해서 일어났다. 종교개혁이 약화된 것은 계몽철학(이성주의), 신비주의(이성주의), 식민주의(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발흥하면서 발생했다.

부흥은 종교개혁을 반복하려는 사역자들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종교개혁은 바른신학 운동인데(가르침의 회복), 부흥 시대에는 열정과 세계선교(탈교회주의)를 추구했다. 생명을 건 헌신과 뜨거운 기도를 추구했고, 교회가 아닌 선교회를 중심으로 선교가 진행되었다. 그 부흥에서 헌신과 열기를 뜨겁게 올려야했고, 더 많은 지역에 더 많은 영혼을 구령하는 것을 목표한 것처럼 나타났다. 부흥은 외적인 가치는 중요하지 않은 생명을 건 헌신과 뜨거운 기도와 세계선교인데, 사람은 곧 외적인 평가 수단(판단)을 하고 증명받기를 추구한 것이다.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영, 복음선포(바른 교훈)를 추구한다. 부흥운동이 복음의 내용을 회복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계몽철학의 파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럽은 세속화 시대로 전락했다. 21세기 유럽은 세속화를 넘어서 이슬람화(타종교화)의 우려를 갖고 있다. 이런 현상은 미국 사회에도 유사하다. 2001년 9.11 테러 현장에 2010년에 이슬람 사원(모스크)를 건립하려는 시도까지 했었다.

대한민국 부흥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다. 평양대부흥 운동은 회개 운동으로, 무너져가는 대한제국의 유일한 희망 근거가 되었다. 부흥운동을 근거로 교육, 의료 등 사회운동으로 대한의 땅을 지지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도입된 방언 운동을 근거한 부흥운동은 거룩 운동이 아니라 세속 운동으로 전락했다. 그 열매는 2016-17년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탄핵을 거부하는 운동에 은사주의 계열의 교회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부흥운동, 은사주의가 거룩운동인지 세속화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위정자에게 충성하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속화된 유럽 국가(국교. 기독교)에서 동성애 혼인을 법제화시켰고, 차별금지법을 법제화화면서 성경이 사회법에 반하는 불온서적 수준으로 전락시켰다. 타종교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기독교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기독교 신학’이 얼마나 세속화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사안이다.

기독교를 물량이나 현상으로 영향력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오순절주의를 대안방향으로 제기하는데, 이유는 숫자가 증가하는 현상을 근거로 한다. 기독교가 숫자가 증가하는 방향을 대안으로 생각한다면 세속화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수가 승리의 종교라는 인식을 한다면, 1세기 120명에서 시작했던 기독교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추방되고 순교했던 사도들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바른 가르침으로 이 땅에 세워져야 할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부흥은 바른 가르침의 내용이 확산되는 현상이어야 한다. 숫자가 증가하는 현상, 열정적인 현상은 사도행전적 교회가 아니다. 사도행전에서 숫자를 강조한 적이 없다. 사도들이 겪는 고난이 무수하게 반복한다. 방언, 숫자증가, 생명을 건 헌신과 기도에는 ‘오직 고난’이라는 현상이 등장했다. 성경을 근거한다면 ‘고난 현상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숫자가 부흥해서 승리의 깃발을 날린다면 여전히 종교개혁이 개혁한 ‘영광의 십자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 땅에서 황금집을 이루는 기독교를 상상하지 말자.

기독교는 이 땅에서 취하는 영광을 두려워하고 부정하는 유일한 종교이다. 어떤 이단 단체에서 수상한 장면을, 그리고 모 단체에서는 유명인사와 찍은 사진을 선전도구로 삼은 것을 보았다. 부흥 운동을 주도하는 유명 강사들의 프로필은 세상 어디에 내 놓아도 탐스러울 만큼 화려하다.

기독교는 무엇인가? 기독교 부흥은 순수 열정 회복 운동이다. 그러나 내용을 경솔히 여긴 부흥 운동은 기독교에 큰 올무를 제공했다. 그것은 순수한 열정이 쉽게 물량주의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부흥 운동에서 순수한 열정을 찾을 수 있는가? 물량주의 평가를 배제하라! 숫자로 기독교를 말하지 말라! 기독교는 기독교 설립자이신 구주 하나님의 이름, 주 ‘예수’ 이름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나도록 하라. 그 현상이 기독교 부흥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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