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닌 영음 방언이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며, 다른 종류의 방언(영음, 하늘 언어)은 없다. 성령이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주신 방언도 언어였고, 고린도교회에 주신 방언도 언어였다. 그리고 1901년 로버트 파함이 운영했던 벧엘 신학교의 오즈만 여학생이 한 방언도 언어(중국어)였다고 한다.1) 로버트 파함은 그의 제자 아그네스 오즈만의 중국어 방언을 보고 방언이 외국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방언의 은사가 상시적인 능력으로 착각하여 언어 훈련 없이 선교사를 선교지에 파송해도 된다고 가르쳤고, 그의 가르침을 따랐던 선교사들은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오즈만의 방언이 중국어가 사실이었다면, 성령이 오즈만에게 중국어 방언을 말하게 하신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오즈만이 중국어로 말한 방언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면 중국어 방언을 주신 성령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파함은 안타깝게도 방언의 메시지보다는 방언의 신기한 현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이제는 선교사가 언어 훈련을 받지 않고 선교지에 가도 된다.’는 어이없는 결론을 내리고 만 것이다. 만약 그가 중국어 방언의 내용을 주목해서 성령의 뜻을 살폈더라면, 어쩌면 윌리엄 시무어로 시작되는 영음 방언의 비극은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성령은 20세기가 막 시작되는 시기에 미국 땅에 중국어 방언을 왜 주셨을까? 성령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비록 추측이지만 이 질문에 답해 보는 것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필자의 사견이다.

성령이 중국어로 방언을 말하게 하신 것은 중국 선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중국어 방언을 주신 곳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은 성령이 미국 교회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막강한 힘, 특히 이들의 청교도적 신앙과 풍성한 부(富)를 사용해 중국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길 원하셨던 것 같다. 중국 선교는 1854년 3월1일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50년 가까이 중국 선교에 헌신했던 허드슨 테일러는 1905년 6월에 주님의 품에 안겼다.

짐작컨대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말기인 1901년에 성령은 미국 교회에 중국어 방언을 주셔서 미국 교회가 중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함으로 허드슨 테일러의 뒤를 이어 계속 중국 선교에 힘을 쓰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또 파함의 학생들이 한 방언들 중에는 아프리카 말도 꽤 있었다고 한다. 이때 미국 교회는 성령의 뜻을 깨닫고 선교사들에게 본격적으로 중국어, 아프리카 어 등의 언어 훈련을 시켜 세계 선교에 매진했더라면 ‘영음’ 방언으로 말미암은 현대 교회의 영적 황폐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로버트 파함의 잘못된 판단으로 파함의 추종자들은 방언이 외국어라는 데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이때 LA 아주사 거리에서 독립한 파함의 제자 윌리엄 시무어가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고린도 교회의 영음 방언을 이용해 대중의 영적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백인 목사 파함에 비해 모든 부분에서 열등했던 흑인 목사 시무어가 파함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파함보다 뛰어난 영적 고수임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시무어가 선택한 무기는 고린도교회의 거짓 방언이었고, 이것은 절묘한 사탄의 지혜였다. 이런 사탄의 지혜는 교회사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교회사에서 드문드문 발견되는 방언은 그 시대의 다수의 집단에게 소외당했던 소수의 집단에게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수의 집단이 대중의 주목을 받아 종교적인 주도권을 자신에게로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소수 집단이 다수의 집단보다 영적으로 훨씬 뛰어난 집단임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소수 집단이 주로 동원한 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영음 방언이었다.

아무튼 1906년 LA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된 영음 방언은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오순절주의자는 로버트 파함을 오순절주의를 시작한 인물로, 윌리엄 시무어를 방언으로 오순절주의의 부흥을 주도한 최초의 인물로 여긴다. 그러나 파함 때의 중국어 방언이 사실이라면, 오순절주의의 기원은 로버트 파함이 아니라 윌리엄 시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순절주의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을 기원으로 하는 윌리엄 시무어의 영음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은 메시지가 없는 자신들의 영음 방언에 문제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 자신들의 방언도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인 양 위장하려고 여러 가지 증거들을 발굴해 낸다. 이런 위장의 대표적인 예가 김우현 PD의 ‘카할리’ 스토리일 것이다.

김우현의 ‘카할리’ 스토리

“그런데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의 턱과 입이 저절로 마구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내가 의도하지 않은 전혀 낯선 방언으로 어떤 말을 반복해서 외치는 것이 아닌가. 카할리…… 카할리……카할리……”2)

김우현 PD는 한동안 방언으로 말한 ‘카할리’가 무슨 뜻인지 몰라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한다.

“아버지, ‘카할리’가 무엇인지……우리말로 가르쳐 주세요. 한국어 방언으로요.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어요.”3)

그러나 이 말은 몇 페이지 앞에서 한 자신의 말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그는 손기철 장로의 방언 특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찬양, 성경 읽기 등은 우리의 의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방언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영의 기도’이며 본인도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이 작용하지 않는다.”4)

이렇게 그들의 방언기도에는 의식이 작용하지 않는데도 김우현 PD는 어떻게 ‘카할리’를 기억하고 그 뜻을 알고 싶어 했을까? 또 김우현 PD의 ‘카할리’ 스토리가 사실이라면, 성령은 왜 김우현 PD가 모르는 히브리어로 말씀하셔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김우현 PD의 애를 태우게 하셨을까? 혹시 성령은 히브리어는 아시지만 한국어는 모르시는 게 아닌가?

‘카할리’가 무슨 뜻인지 알고 싶어 기도한지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김우현 PD는 인터넷 검색창에서 ‘카할리’를 검색해 보고 ‘카할리’가 히브리어로 ‘교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카할리’라는 방언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새롭게 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후 그는 구약학을 전공한 어떤 교수에게 ‘카할리’가 ‘나의 백성’을 의미한다는 말을 들은 후에는 ‘카할리’의 방언 코드가 “나의 백성을 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줄 깨닫고, 이번에는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솟을 것 같았다고 했다.5)

그런데 김우현 PD의 ‘카할리’ 스토리를 읽다 보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카할리’는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분명히 사람의 언어인 히브리어인데, 어째서 그는 자신의 방언을 하늘 언어라고 말하는 것일까? 또한 다른 곳에서는 한국말로 된 직통 계시를 잘만 듣던 그가6) 어째서 여기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때문에 ‘이런 개고생을 했을까? 성령이 그에게 정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새롭게 세우도록 말씀하고 싶으셨는데 직통 계시를 하지 못할 사정이라도 계셨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카할리’ 대신에 ‘마태복음 16장 18절!’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래도 마태복음 16장 18절에는 ‘교회를 세우다’라는 메시지가 분명하지만, ‘카할리’는 단지 ‘교회’라는 의미밖에 없어서 ‘카할리’가 교회를 세우라는 말인지 교회를 무너뜨리라는 말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카할리’가 “자동차(카)는 절대로 (할)부나 (리)스로 장만하지 마라”는 하나님의 경고처럼 들리는 데 말이다. 혹시 하나님이 김우현 PD에게 “너의 방언은 교회에 해로우니 교회를 위해 방언을 버리라”는 뜻으로 ‘카할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아무튼 김우현 PD는 ‘카할리’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새롭게 세우라는 것이다.’라고 깨달을 만큼 작가다운 뛰어난 상상력을 갖고 있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김우현 PD의 이런 상상에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 어디에도 주님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교회를 세우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주의 몸 된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우리를 재료 삼아 성령이 세우신다.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주체가 아니라, 세우심을 입는 객체다(엡2:20).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들이다(엡2:22). 그런데 어째서 주님이 김우현 PD에게는 ‘교회를 새롭게 세우라’는 명령을 하셨을까?

2012년에 출간된 김우현 PD의 책 ‘하나님의 심장’을 보면, 왜 그가 ‘카할리’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도 ‘교회를 새롭게 세우라’는 성령의 명령을 들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보면 그가 신사도주의에 푹 빠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목말라하고 있다.7) 그의 말대로라면 아마 하나님은 ‘카할리’라는 방언으로 그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명령(?)하고 계신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카할리’가 ‘교회를 세우라’도 아닌 ‘교회를 새롭게 세우라’(이 뜻은 아마 ‘방언이 없는 교회를 방언 천지의 교회로 새롭게 세우라’는 뜻일 것이다)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카할리’ 스토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해 끼워 맞춘 김우현 PD의 픽션이다. 그의 말대로 ‘카할리’에 그런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면 ‘카할리’와 함께 말했던 다른 방언 소리들도 메시지가 있는 언어여야 한다. 그런데 그는 다른 방언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왜 ‘카할리’만 말하고 있는 걸까? 성령은 잡소리 가득한 방언 속에서 의미 있는 단어를 하나씩 툭툭 던지면서 계시하신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김우현 PD의 어떤 목적(자신의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목적)을 위해 ‘카할리’를 소재로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카할리’ 스토리와 비슷한 소설을 쓰며 독자들을 희롱하고 있다.8) 참고로 그의 소설 몇 가지를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우현의 또 다른 거짓 방언 스토리들

1) ‘샤카’ 스토리

다음은 김우현 PD의 말이다.

“주님 ‘샤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이지요?” 내 영이 더욱 방언의 기도로 고양되어갈 때 ‘샤카’라는 단어가 반복하여 나온 적이 있다. “샤카!…샤카!” 하고 방언을 말하다가 갑자기 내가 소리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미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며칠 후에 기독서점에 들러 성령님께 책을 소개해 달라고 구하는데, 정말 거짓말 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눈앞에 <샤카>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 것이다. 그때의 기분은 어휴! 정말……<<샤카, 살아있는 예배(Living Worship)>>라는 책인데 존 랜달 데니스(J.R. Dennis)라는 유명한 찬양 가수가 지은 것이다. “아니……이런 책이 있다니! 그동안 그렇게도 보이지 않던 것이……” 나는 즉시 책을 열어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샤카’(shachah)는 “온전히 엎드려 절하다 또는 경배하다”라는 의미였다. 순전한 순종과 완전한 엎드림으로 드리는 삶의 예배가 ‘샤카’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엔 내 영이 오직 아버지만 경외하고 그 뜻만을 구하던 때다. 나는 그것을 더욱 깨닫고 더욱더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사11:3)라는 예수님에게 임하신 그 기름부음을 간절히 구했다.9)

2) ‘할라’ 스토리

다음은 김우현 PD의 말이다.

2007년 성탄절, 안양의 한 중보에 헌신한 집사님이 기도 가운데 “오! 할라…할라…”하는 방언이 반복하여 나왔다고 한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데……“나는 나의 종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이 방언의 의미를 김우현 감독과 나누라”는 것이었다. 그 메일을 받고 나서 나는 혹시 그 ‘할라’가 히브리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인터넷에 그래서 인터넷 검색창에 그대로 올렸다. 그런데 정말 히브리어였다. ‘할라’(Challah)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먹는 특별한 빵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것이 제사장들을 위해 떼는 빵이라는 것이다. 나는 주님이 이 하늘의 언어를 특별히 ‘사역자들’과 나누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에 정말 많은 목회자, 선교사님들이 전 세계에서 찾아와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10)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으로 기도해야 하나님께 말하는 비밀을 사탄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기도가 사탄의 공격에서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생각한다.11) 방옹자들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하늘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방언기도라고 하는데, 앞의 ‘스토리 시리즈’를 보면 이상하게도 이들의 방언은 하늘 언어가 아니라 ‘할라카’, ‘아바’, ‘하이야’ 등과 같이 인간의 언어인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들이다. 혹시 사탄이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알아듣는다면 하늘의 비밀을 다 들키고 말텐데 말이다.

오래전 어떤 TV 개그 프로에서 개그맨 박성호가 진행했던 인기 코너가 하나 있었다. 이 코너는 외국 음반의 노래를 일부분만 편집해서 한국어와 똑같은 발음으로 어떤 메시지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진행자가 “오빠, 라면 끓여주세요. 나 왔어요.”라고 외치고 나서 준비한 외국 음반의 편집된 부분을 들려주면, 정말로 외국인이 영어로 노래하다가 갑자기 ‘오빠, 라면 끓여주세요. 나 왔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면 방청객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영어로 노래한 그 외국인은 한국어로 “오빠, 라면 끓여주세요. 나 왔어요.”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 귀에 한국어로 그렇게 말한 것처럼 들렸을 뿐이다.

얼마 전 TV에 방영된 해외토픽에서 어떤 고양이가 말을 한다고 해서 호기심에 TV 화면을 들어다 본적이 있었다. TV에 나온 고양이는 “아이 러브 유~ 아이 러브 유~”라는 소리를 연신내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 고양이는 그 말밖에 다른 말은 할 줄 몰랐다. 그런데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한 그 고양이는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는 의미로 그 말을 했을까? 아마도 그 고양이는 “아이 러브 유”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냥 고양이 소리를 냈으며, 우연히 그 소리가 우리 귀에 ‘I love you'처럼 들렸을 뿐이다. 이것은 감기에 걸린 사람이 콜~록(call~ rock) 콜~록(call~ rock)하는 것은, 단순히 기침 소리지 ‘반석(rock)이신 예수님을 불러라(call)’는 뜻의 방언이 아닌 것과 같다.

따라서 ‘카할리’ 류(類)의 방언 스토리는 억지로 꾸며낸 방언-통역 소설에 불과하다. 이런 소설은 개 짖는 소리로도 꾸며낼 수 있다. 개가 이렇게 짖었다고 가정해 보자. “왕(王), 워~ㄹ(war), 월(wall), 웨~ㄹ(well)~” 이 개 짖는 소리를 김우현 PD의 ‘카할리’ 방식대로 통역하면, “나는 왕(王)이다! 이제 나는 너와 전쟁(war)을 할 것이다! 나와 싸우기가 두려우면 손들고 벽(wall)으로 붙어라! 그래 잘(well) 했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2)

김우현 PD가 ‘카할리’ 스토리로 소음에 불과한 자신의 방언을 메시지가 있는 성령의 은사로 위장하려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방언이 억지로 꾸며낸 개그 같은 것이며, 개 짖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이런 종류의 억지는 방옹자들이 자주 말하는 ‘옹알이’ 스토리에도 있다.

방옹자들은 소음 같은 자신들의 거짓 방언을 언어인척 하려고 갓난아이의 옹알이에 비유하기를 좋아한다. 갓난아이의 옹알이는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어머니는 다 알아듣는 것처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도, 말하는 자신조차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알아들으신다는 것이다. 또한 갓난아이는 처음에는 옹알이를 하다가 자라면서 점점 말을 잘하는 것처럼 방언도 처음에는 갓난아이의 옹알이처럼 ‘랄라, 롤로’하지만 나중에는 아주 능숙한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법 그럴듯하다.

그러나 방옹자들의 옹알이 스토리를 갓난아이가 듣는다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갓난아이의 옹알이는 방옹자들의 소음 같은 방언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옹알이는 말을 할 줄 몰라 내는 소리지만 엄연히 갓난아이의 언어다. 갓난아이는 옹알이에 자신의 의사를 담아서 어머니에게 전한다. 그러므로 단지 어른들이 그 옹알이의 의미를 잘 모를 뿐이지(어머니는 어느 정도 눈치껏 알아듣는다) 갓난아이는 자신이 한 옹알이가 무슨 뜻인지 안다. 그러나 방옹자들은 방언을 할 때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는 방언을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갓난아이의 언어인 옹알이와 소음에 불과한 방옹자들의 방언은 서로 비교할 만한 유사점이 전혀 없다.

특히 방옹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갓난아이는 말을 할 줄 몰라서 옹알이를 하지만, 자라면서 말을 배우면 옹알이를 멈추고 배운 말로 어머니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 그러나 방옹자들은 처음이어서 서툴기 때문에 한다는 옹알이는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만약 갓난아이가 자랄수록 말은 어머니에게 더 심하게 옹알이만 한다면, 이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대신에 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 그것도 정신병원에 말이다.

방옹자들의 영음 방언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를 주시는 목적은 인간이 그 계시를 잘 알아듣도록 하는데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능한 한 쉬운 말로 계시하실 것이다.

그러면 성령은 고린도 교회에서는 왜 현지인 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게 하시고 또 그것을 통역하게 하셨는가? 차라리 방언을 생략하고 통역한 언어로만 말씀하셨으면 현지인 신자들은 바로 알아들었을 텐데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 방언과 통역이 함께 있었던 이유는 거기에 현지인들이 쓰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언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방언이 아니면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인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며, 방언을 현지어로 통역을 해야 하는 이유는 방언으로는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 신자들도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언이 있는 예배에는 반드시 외국인이 있어야 하며, 현지인 신자들을 위한 통역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곳에 복음을 방언으로 들어야 하는 외국인이 없다면 방언도, 통역도 필요 없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언의 은사자에게 현지인 신자들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현지어로 예언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외국인이 없는 곳에서 누군가가 방언으로 말한다면, 그리고 그 방언을 누군가가 통역한다면 이것은 성령의 은사와는 상관없는 종교 헤프닝일 뿐이다.

그런데 김우현 PD를 비롯한 방옹자들이 이런 사기극을 벌이는 이유는 자신들의 방언이 의미 없는 소음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다. 이들은 의미 없는 거짓 방언을 통역하는 흉내까지 냄으로 꽹과리 소리를 그럴 듯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들려주는 하늘의 언어로 둔갑시키고 있다. 다음은 유-튜브에 올라온 것으로서, 조용기 목사의 방언과 통역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의 동영상이다. 조용기 목사가 강단에서 회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방언의 메시지를 주시고 계시네요. 리피아 라샤카파게 라시야라 로아르바카나키 리키키코 나카치 라시카파타르 릴리키니야 아파타카카카야 시키키고 바야

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너는 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구만리 장천 멀리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땅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느냐? 땅을 파야 나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너의 속에 들어와 있고, 너희 숨과 함께 있고, 너의 생명 속에 함께 있도다. 내가 너를 붙들어 주고 내가 너를 도와주기를 원하라. 너희가 나를 모르는 도다. 나를 알라. 나를 깨달으라. 나를 의지하라. 내가 너의 기도를 듣고 너희 손을 붙잡아 주고 너를 이끌어 주리라. 기필코 내가 살아계신 능력을 너에게 나타내 주리라. 영광을 보여주리라. 뜻대로 되게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의 영광의 뜻이 임하여서 너희 속에 나타나게 되게 할 것이라.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며 담대하고 강하라. 이와 같이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위의 방언과 통역 현장에는 모두 한국말로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먼저 말하고, 그것을 한국말로 통역 했다 (이 부분은 뒤에 통역 비판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처음부터 하나 마나한 영음 방언은 생략하고 바로 통역한 내용을 바로 한국말로 하는 것이, 번거롭지도 않고 시간도 절약되니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성령이 바보가 아니시라면 말이다.

따라서 위의 방언-통역은 조 목사가 만들어낸 종교 해프닝이다. 조 목사도 김우현 PD처럼 곧잘 직통계시를 받는다. 그럼에도 방언-통역이라는 해프닝을 벌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높은 영성을 과시하는데 방언-통역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령이 한국말을 할 줄 몰라서 방언으로 말하시고 조 목사가 그 방언을 통역했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더욱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성령은 방언밖에 못하시지만 조 목사는 방언도 알아듣고, 한국말로 그것을 통역까지 할 수 있으니 성령보다 조 목사가 한 수 위가 되는 셈이니까 말이다. 분명히 조 목사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들보다 한 수 위인 영적 고수이며(왜냐하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기껏해야 자신들이 아는 히브리어로 계시를 듣고 히브리어로 예언했지만, 조 목사는 계시를 하늘의 언어로 듣고 말하고 또 그것을 한국말로 통역까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실제로 조 목사를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영적 고수로 믿고 있다), 언어에 관한 한 하나님보다도 한 수 위인 고수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오래 전부터 종교꾼들에게 사랑받아온 고전적인 수법이다. 고대 이방 신전의 사제들에게서부터 현대의 무당들과 이단 사이비 교주들에 이르기까지 불건전한 종교 집단의 우두머리들은 집회 현장에서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므로 신(神)과 교통하는 자신의 모습을 신도들에게 보여주는 해프닝으로 자신의 높은 영성을 과시해 왔다. 오랫동안 방언-통역 해프닝이 종교꾼들에게 사랑받아 온 이유는, 방언-통역이 자신의 높은 영성을 보여주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동시에 가장 안전한 수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안전하다는 말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방언-통역의 거짓여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안전하게 남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거짓 예언을 하다가 들통 난 사람들은 많아도, 거짓 방언을 하다가 들통 난 사람들은 역사상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거짓 방언의 놀라운 안전성 때문이다. 현대 교회의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도 방언기도만 난무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안전성 때문이다.

 

-- 각 주 --

1) 이때 오즈만이 말한 방언이 중국어처럼 들리기는 했으나 언어가 아니었다고 주장도 있다. 정이철,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p.13.

2)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113.

3) 앞의 책, p.113.

4) 앞의 책, p.110.

5) 앞의 책, p.138.

6) 앞의 책, pp.65, 119 등. 오순절주의의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 다 직통 계시를 받으며 편리하게 살아간다. 로버츠 리어든, 아주사 부흥, 김광석 옮김(서울: 서로사랑, 2008), pp.173-174.

7) 김우현, 하나님의 심장(서울: 규장, 2012), p.50. 책 전체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김우현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

8) 김우현 PD의 책들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그는 성령에게 아주 손쉽게 직통 계시를 받는 자다. 그럼에도 그가 방언-통역이라는 소설을 쓰는 까닭은 직통 계시를 바로 회중에게 말하는 것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먼저 말하고, 그것을 통역해 들려주면 회중은 자신을 더 영험한 존재로 여기고 자신에게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방언-통역 소설이 직통 계시보다 자신의 영적 능력을 과시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종종 이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9) 영으로 비밀을 말함(서울: 규장, 2009), p.215-216.

10) 앞의 책, p.216.

11) 김신호, 성령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125.

12) 개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방옹자들의 방언을 비하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 집회에서 종종 “개들도 방언을 하는데 오늘 여기 온 사람들, 오늘 방언을 받지 못하면 개만도 못한 자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생각나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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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