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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의 로마가톨릭 칭의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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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의 로마가톨릭 칭의론 3
  • 최덕성
  • 승인 2017.01.24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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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解毒文): 김세윤의 칭의론과 관련하여

7.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가?

7.1 트렌트공의회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칭의되었다는 확신은 부당하다고 한다. 칭의교령은 “진정으로 칭의받은 자들이 자신의 의롭게 됨을 조금의 의혹도 없이 내적으로 확신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이 죄 사함을 받았고, 칭의를 받았다고 지속적으로 믿는 자만이 죄 사함을 받고 칭의되었다고 여겨서도 안 된다. 죄 사함과 칭의가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여겨서도 안 된다”고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가 용서됨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을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 머물게 한다.

7.2 칭의교령은 구원의 확신 불가능성의 까닭을 “각자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신의 약점과 무질서에 대하여 성찰하면서 자신의 은혜의 지위에 관해 걱정하고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는 말로 설명한다. “어느 누구도 착오 없는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차지했다는 것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고 한다. 기독인은 자신의 구원, 칭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않아야 하고, 자신에게 일정한 결실이 보장된다고 믿지도 않아야 한다. 만약 확신을 가지면 이단자가 된다고 한다. 칭의교령은 이 점을 네 차례 강조한다. 왜 구원의 확신 불가능성을 이처럼 강조하고 심지어 이단과 관련시킬까?

7.3 트렌트공의회가 구원의 탈락가능성, 칭의의 상실 가능성, 구원에 대한 확신 불가, 구원의 확신을 이단과 동일시함은 교황 교회와 교계 제도가 평가 절하될 가능성 때문이다. 트렌트공의회가 구원과 칭의 확신을 이단과 관련시키는 선언은 교회의 “성사들의 가치와 효력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서술 다음에 나온다. 칭의교령은 세례로 칭의받고, 대죄를 범함으로 상실된 칭의, 구원을 고백성사를 거쳐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교리를 가지고 신도들을 사제주의와 교계(敎階) 제도에 묶어 놓는다.

7.4 트렌트공의회는 바울이 엄청난 부조리라고 여기는 것들을 신앙 원리로 천명한다. 기독인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면, 바울이 말하는 평화(롬 5:1), 다윗이 선포하는 행복(시 32편), 엄중한 심판을 면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바울이 자주 언급하는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과 구원에 대한 확신(fiducia)과 확실성(certitudo)을 넘어서는 담대함(audacia)을 무엇이라고 이해할 것인가? 바울이 구원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죽음과 지옥을 조롱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구원하는 사랑을 너무도 확신하기에 아무 것도 그를 이 확신에서 돌아서게 할 수 없다고 자랑한다(롬 8:33-35). 칼빈은 이 사실들을 언급하면서 확실성이 제거되면 그 순간에 믿음이 완전히 파괴된다고 말한다.

7.5 구원이 율법을 지킴과 인간의 윤리적 행위의 완성에 의해 결정되고, 칭의가 인간의 자비와 사랑의 행위 실천에 달렸다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확신만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가 없다. 하나님의 의의 눈높이에 도달할 만큼의 의롭고 자비로운 행위를 가진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7.6. 장로 요한은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안다”(요일 4:6 참고)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에 대한 ‘앎’의 근원, 출처가 다름 아닌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께 속한 영을 받은 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알 수 있다(고전 2:12). 우리에게 주어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한 구원의 소망에 대해 담대하게 자랑하게 한다. 양자의 영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롬 8:15). 성령은 믿음으로 우리가 값없이 부름 받고 의롭게 되었음을 확신하게 한다. 칼빈은 이러한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하나님의 영이 경건한 자들, 칭의 받은 자들의 마음에 새겨 넣은 선물이라고 한다.

7.7 칼빈은 트렌트공의회가, 성경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은혜, 칭의, 구원을 확신을 오히려 정죄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바울과 요한이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인지 아는 자들 외에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울은, 칭의교령과 반대로, 기독인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하라고 권하면서(고후 13:5),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거함을 알지 못하는 모든 버림받은 자들(reprobos)을 정죄한다.
 

8. 칭의가 계명준수, 윤리실천으로 성취되는가?

8.1 칭의교령은 제10장에서 칭의를 믿음 소망 사랑과 관련시키고, 교회가 이를 증진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칭의의 증진”(justiticationis incremento)이라는 소제목 아래에서 칭의를 받은 자들은 자신의 육적인 소욕을 억제하고, 하나님과 교회의 명령을 준수함으로써 의와 성화의 도구로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은 그 의 자체 안에서 성장한다고 한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약 2:24). 교회가 의의 증진을 목적으로 “저희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8.2 칼빈은 트렌트공의회가 그리스도의 값없는 의의 전가(imputatio)를 인간의 공로와 혼동하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하여금 은혜의 관점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비판한다. 행위에 대한 그릇된 확신으로 눈멀게 한다. 칼빈은 기독인이 날마다 선행을 증가시키는 노력을 해야 하며, 그 선행을 때로 ‘의’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위의 가치가, 하나님의 값없는 용납 외에 어떤 다른 근원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값없는 용납을 뒤엎을 수 있다고 봄은 어리석은 일이다. 종속된 것은 그것을 종속시키는 것과 상반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겨지는 것은 값없는 전가 덕분이다. 우리의 행위가 의롭지 않아도, 의롭다는 명칭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는 복된 은혜(beneficium) 덕분이라고 한다.

8.3 칼빈은 우리의 인격과 행위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고 한다. 하나님이 한 순간 대가없는 칭의를 선물한 뒤에 우리에게 일생 동안 율법을 준수하고 윤리적인 의로움을 스스로 획득하여 칭의가 완성되기를 원하는가? 그렇지 않다. 값없이 전가되는 칭의를 인간의 공로로 대체하거나, 윤리적 실천으로 이를 완성, 증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협잡이라고 한다.

8.4 성경은 믿음 밖의 그 어떤 것에도 칭의의 공(功)을 부여하지 않는다.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것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다”(갈 3:10). “율법의 하나라도 어긴 자는 모두 범한 자다”(약 2:10). 율법을 완전하게 준수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간의 행위는 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칭의는 값없이 인간 바깥에서 주어지는 선물(mutuandam)이다.

8.5 야고보가 인간이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게 된다고 한 것(약 2:24)은 상당히 그럴듯한 말이다. 칼빈은 야고보가 칭의를 거룩한 삶의 원인이 아니라 의의 증거로 이해한다고 풀이한다. 믿음의 외적인 동의와 증거를 보이라는 말이다. 이 문맥을 고려하면 야고보가 한 말은 칭의받은 자다운 증거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트렌트공의회는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은 채 인간이 선행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으로 풀이하고 그래서 교회가 믿음 사랑 소망의 증진을 간구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낮의 날벼락 같은 허황된 소리이다.

8.6 칭의교령은 “계명 준수의 필요성과 가능성”이라는 소제목 아래서 칭의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준수 불가한 것을 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을 내릴 때 실천이 가능한 것은 실천하고 실천할 수 없는 것은 도움을 청하라고 가르치며,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고 한다.

8.7 칼빈은 율법을 만족시켜 의롭다고 인정받을 자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복 강조한 솔로몬과 다윗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한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없다”(왕상 8:46). “주의 목전에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시 143:2). 바울은 트렌트공의회가 정죄하는 것을 진리로 천명한다. “기록된 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은 자다”(갈 3:10).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성취할 수 있고, 그 공로로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함은 이 성경의 저자들을 거짓말쟁이들로 만드는 교만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어느 누구나 저주 아래 있다.

8.8 바울은 자신이 율법에 복종할 수 없는 무능력에 사로잡혀 있다고 통탄한다. 이 질병은 죽음이 그것을 고칠 때까지 고쳐질 수 없다고 외친다(롬 7:19-24). 칼빈은 우리가 새로운 죄를 짓지 않고 지나가는 순간이 거의 한 순간도 없다고 말한다. 트렌트공의회조차 “실로 죽어야 할 이 운명의 인생에서 성인들이나 의인들이라 할지라도 가끔은 적어도 가벼운 죄나 일사의 죄 곧 소죄라 불리는 죄에 떨어질 때가 있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이 경우, 이 죄로 말미암아 칭의가 취소, 중지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겸손하고 진실한 청원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한 번 칭의된 사람들이 먼저 당신을 저버리지 않는 한 그들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인다.

8.9 바울은 자신의 의지가 최선일 때조차도 완전함과 거리가 멀다고 고백한다(롬 7:14-15, 23-24).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자극되고 고무되어도 우리의 욕망은 의로운 명령을 순종하는 경주로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최대 속도를 내라고 명할 때 우리는 겨우 걷고 있다. 우리가 온통 열심을 내야 할 때 겨우 미적지근할 정도이다.85)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의 행위도 하나님에게는 흠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행동은 느릿하고 삶은 어둡다(욥 25:5). 우리는 자신의 결함을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행조차 하나님의 영원한 정죄에 합당하다. 가벼운 정도의 죄도 죽음의 원인이 된다.

8.10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어거스틴을 괴롭히면서 하나님이 원하면 인간을 완전함에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끌어올린 적이 없다. 하나님의 구원과 형벌의 구도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은 여기서 복음의 핵심을 소개한다. 인류는 시초부터 율법의 불순종했고, 여전히 순종에 부적격하다. 우리에게는 바깥에서 오는 의의 전가 곧 율법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풀어주고 보호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에로 피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용서를 받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계명준수, 윤리실천으로 칭의의 완성, 성취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의 불결함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지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연금 상태에 있는 것과 같은 우리는 무한한 하나님의 긍휼 덕택에 율법의 멍에에서 풀려났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신도들에게 그들 자신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받았으며 또한 부르심을 받고 복음의 참여자가 되었음을 마음에 새기라고 거듭 당부한다.
 

9. 인내가 우리를 칭의의 완성으로 인도하는가?

9.1 트렌트공의회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자비롭게 약속된 은혜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선행과 공로와 윤리실천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칭의받은 자의 선한 행위가 심판대에서 상급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개념과 달리, 구원을 하나님을 바라는 가운데 끝까지 의롭고 선하게 행동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칭의된 사람의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칭의를 완성시키는 자신의 선한 공로이기도 하다.

9.2 칭의교령은 위 교리를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제13장에서 “견인”을 언급하면서 “모두가 하나님의 도움의 도우심에 대한 확고한 희망을 간직하고 거기에 의존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자신에게 일정한 결실이 보장된다고 믿는 일이 그 누구에게도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신학공식에 따르면 우리의 구원과 칭의는 종말의 날까지 또는 심판대에 서는 순간까지 미완성이다. 심판대에 서는 시점까지 유보적이다. 종말의 날에 우리가 완성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칭의교령은 “고생을 하고 밤새 잠을 못 자는 상황에서 자선을 하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봉헌을 하면서도, 단식을 하면서도, 정결을 실천하면서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9.3 위 칭의교령이 말하는 견인은,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구원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심판 날까지 믿음을 굳게 붙들어주셔서 종국에는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투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승리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 승리의 구원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견인의 이유를 우리 “자신들이 아직은 영광스럽게 거듭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광에 대한 희망 안에 거듭난 것일 뿐임을 알고, 육신과 세속과 마귀에 대해서 아직도 치러내야 하는 전투를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9.4 칼빈은 구원과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는 여러 가지 의심으로 동요할 수 있다고 한다. 바울은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를 끊을 수 없다”(롬 8:37)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즐거워한다”(롬 5:2). “땅의 장막이 무너질 때, 한 집이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안다”(고후 5:1). 만약 기독인의 소망의 확실성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라면 바울처럼 말할 수 있는가? 바울의 확신은 트렌트공의회가 구원과 영생의 확신과 확실성을 제거하는 것과 상반된다.

9.5 칭의교령은 인내가 칭의의 완성으로 인도한다는 주장을 “자기가 서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전 10:12)는 성경구절을 근거로 삼는다. 기독인의 구원의 탈락 가능성, 칭의의 상실 가능성에 적용한다. 바울의 이 가르침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비교하는 문구이거나 조심하라는 경고이거나 명목상으로 교회에 속한 자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칼빈은 기독인의 신실한 실천을 강조하거나 명목상의 기독인이나 기독인이 아닌 자들에게 준 성경구절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실성을 흔들고 우리를 공포로 몰아간다고 반박한다.

9.6 트렌트공의회는 이 맥락에서 “우리 안에 선업(善業)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완성하실 것이다”라는 한다. 구원이 우리 안에서 실천, 윤리로 완성된다면, 하나님의 시작한 선업이 처음부터 미완성이며 불완전함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우리의 구원이 종말의 날까지, 심판대에 서는 순간까지 미완성이라 함은 선업으로 완성될 때까지 구원, 칭의가 유보적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윤리적 실천과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시작한 선업이 완성된다면 과연 구원을 받을 자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눈높이 곧 율법의 잣대로 평가하면 우리는 모두 직무태만의 죄인이다. 구원의 탈락에서 제외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9.7 칭의교령은 칭의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설정한다. 새 관점학파와 김세윤에 앞서서 ‘관계적 칭의’를 제시한다. 믿음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며, 온갖 칭의의 기본이며, 뿌리라고 하면서,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으며, 그분의 자녀로서 그분과 친교를 이룰 수 없다고 한다. 올바른 기독인은 자기 안에 주입된 의가 보존되고 증대되도록 곧 계명을 준수하고 윤리적 실천의 열매로 구현되도록 노력한다. 처음 주어진 의가 완성을 향한 의로 이어지게 한다. 인간이 선물로 받은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착한 행실로 보존되고 증진, 증대된다. 믿음 소망 사랑 형태의 의의 완성 과정을 거쳐 향상된다. 칭의는 선행의 증대 요인이며, 윤리적 실천은 칭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증대 과정이기도 하다. “만일 누가 인간이 받은 칭의가 하나님 앞에서 선행(per bona opera)을 통해 보존되거나 증대되지도 않고(non conservari atque etiam non augeri), 선행은 얻은 칭의의 열매와 표징에 지나지 않으며 칭의의 증대 요인도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을 받아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10. 고해성사가 상실한 칭의를 회복시키는가?

10.1 트렌트공의회는 대죄(peccatum mortale)를 범하는 자의 칭의 은혜가 상실된다고 선언한다. 불신, 간음, 간통, 호색, 남색, 절도, 탐욕, 폭음, 신성모독, 강탈을 행한 자들과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자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된다. 배교나 용서받지 못할 여러 가지 중대한 죄를 범하는 자는 칭의를 상실한다.

10.2 칭의교령은 죄로 말미암아 자기가 받은 칭의를 상실한 자들이 교회의 고해성사를 통해 이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잃어버린 구원, 상실한 칭의의 회복을 위한 참회와 고해성사를 칭의의 “은혜를 상실한 난파 후의 두 번째 구명대”(tabula)라고 한다.

10.3 칭의교령은 구원에서 탈락하고 칭의를 상실한 죄인에게는 고해성사, 사제로부터 사죄경 듣기, 금식, 자선, 영성생활, 심신 수련 활동 등의 보속행위가 필요하다고 한다. 죄에 떨어져 구원에서 탈락하고 칭의를 상실한 다음에 행하는 기독인의 참회는 세례 때에 하는 참회와 아주 다르다. 죄를 미워할 뿐 아니라 교회의 규례에 따라 “성사적”으로 고백하는 행위를 거쳐야 한다고 한다.100) 또 칭의교령은 “만일 누가 세례 후에 죄를 지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주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로마와 전 세계의 거룩한 교회가 오늘까지 선언하고 지켜온 고해성사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잃어버린 의로움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10.4 칼빈은 칭의 회복을 위한 고해성사를 비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붙잡아 교회라고 하는 제도에 얽어매고, 탈락한 구원을 회복시키고, 상실한 칭의를 복구시키는 성례를 제정한 적이 없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의 방법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과 값없이 죄 사함을 받는다(롬 3:24). 성경은 구원의 지식(눅 1:77)을 말한다. 성경은 고해실(confessional box)에서 귓속말로 하는 고백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칭의교령은 죄 사함을 고해성사의 법규에 옭아매고, 보속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처럼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과는 반대로 나아간다고 지적한다.

10.5 성경은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면 용서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고백성사가 구원과 칭의의 회복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제도는 오랜 시간 후에 인간이 고안한 것이다. 구원의 닫힌 문이 고해성사라는 가식적인 열쇠에 의해 열린다고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한다. 사죄의 능력을 소유한 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로운 죄 고백과 회개의 방법을 제시한다.

10.6 칼빈은 기독인의 지속적 회개를 강조한다. 성경은 회개가 인간 전체의 갱신이라고 선포하고 그것의 참 근원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참된 의식이 가져오는 경외라고 한다. 자기 부인, 죄에 대한 증오, 타락에 대한 혐오, 삶의 갱신, 정신의 갱신,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회개의 일부분으로 열거하고 강조한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가 결합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거룩한 삶이 기독인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의무라고 말한다. 트렌트공의회는 교황제도에 어울리게 회개의 교리를 타락시켜 헛소리를 만들어 냈다. 참회를 가끔 또는 드물게 행하는 막연한 무엇으로 상상하게 하고, 고백성사라는 조건을 제정하여 값없이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혜를 독점하려 한다고 지적한다. 칼빈은 참회를 칭의에서 분리시킴을 복음을 찢는 행위이며, 그리스도를 조각내는 일이라고 한다. (계속ㅡ 맺음말)

(이 글은 최덕성 교수의 승인하에 리포르만다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리포르만다 바로가기)

최덕성 교수는 고신대학교, 리폼드신학교(M.Div, M.C.ED),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고,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였으며, 현재는 브니엘신학교의 총장이다. ‘신학자대상작’으로 선정된「한국교회 친일파 전통」과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을 비롯한 약 20여권의 귀중한 신학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신학-복음전문방송 <빵티비>(BREADTV)의 대표이며, 온라인 신학저널 <리포르만다>(REFORMANDA)를 운영하며 한국 교회에 개혁신학을 공급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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