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왜 변하지 않는가? 이 문제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과 같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능력인데, 이 능력이 복음의 현장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분명히 복음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복음의 능력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그렇다면 전하는 자들이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성경적 변화됨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변화됨의 시작 : 회심, 거듭남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거듭남(회심)의 여부에 달려 있다. 만일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당연히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면서 그를 점차적으로 변화시켜 가실 것이 때문이다. 물론 사람마다 변화되는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금씩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됨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의 회심여부부터 의심해봐야 한다. 이런 사람에게 아무리 회개나 윤리를 강조한다고 한들 어떻게 변화될 수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그 안에 새로운 생명이 존재하지 않고 죽어 있는 사람에게 회개를 외치면 외칠수록 서로가 피곤하고 지치게 될 뿐 이다.

춘천한마음교회의 김성로 목사는 이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부활을 붙잡았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이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인지됨으로 비로소 능력 있게 부활을 증거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제사 후 하늘 성소로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다는 주장을 함으로서 논란을 일으켰으나, 자신의 표현상의 실수라고 말하며 이 부분을 교정하였다. 일단 표현상의 실수로 인정하여 교정, 더 이상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가 하늘 성소에서의 제사를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되면서 그의 부활 복음이 뭔가 허전하게 느껴진다.

작년 10월 말 김성로 목사의 송촌교회 영상을 보니 그는 여전히 부활을 강조하고 있었다. 물론 왕왕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결코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계속 강조했지만 그의 설교의 핵심은 여전히 부활에 있었다. “성경에 표적이 계속 돼도 절대로 예수가 하나님 일 수 없고 부활의 표적을 통해서만 예수의 하나님 되심이 인지될 수 있다”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제자들이나 바울이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다는 주장도 결코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는 송촌교회가 부활의 중요성을 깨달을 때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은커녕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리스도, 마리아의 태중에 있던 예수님을 보고 엘리사벳은 어떻게 "내 주의 모친이 내게 오시니~~"(눅1:43의 )라면서 마리아의 복중에 잉태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지할 수 있었을까? 또 눅2장의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는 어떻게 성전에 할례를 위하여 들어온 난지 8일 밖에 안 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백부장, 그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고백하며 충성을 다짐한 사람인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이는 진실로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십자가에 매달렸던 3명의 시신 중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어떻게 부활하기 전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서 장사할 수 있었을까? 정반대로 행17:31에 바울은 부활이 "모든 사람이 믿을 만한 증거"라고 말했지만 정작 이 설교를 들었던 에덴 사람들 중 단 몇 사람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싶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증거를 제시했지만 거의 다 조롱하거나 거부하고 말았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무덤을 지키던 군사들과 그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왜 부활을 믿지 않고, 군사들에게 돈을 주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을까요? 그들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 아닌가?

김성로 목사는 사람들이 부활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령 충만하게 부활을 증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게 말씀을 증거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부활을 믿게 할 수는 없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했지만 그 반응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으며, 바울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바울이 개종 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반대하며 죽이려고 했다.

문제는 전하는 자의 성령 충만이 아니라 듣는 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전하는 자의 성령 충만함은 듣는 자들의 반대나 박해에 흔들리지 않고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지만 그것이 듣는 자들의 회개와 돌이킴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회심, 거듭남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회심과 거듭남이라는 사건은 아무리 강조해도 인간 편에서 만들어 낼 수 사건이 아니다. 성경은 거듭남을 모두 수동태로 표현하고 있다. 요3장의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거듭남이나 고후5:14절의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명령도 수동태로 쓰임으로 거듭나는 일, 하나님과 화목 하는 일은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당하여야 할 그 무엇으로, 결국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고후5:18에서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로 났나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화목의 주체가 곧 주님이심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인간의 시각에서 보면, 결국 내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결과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어떤 영적 선도 행할 수 없다. 바울은 엡2:1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의 상태를 완전히 죽은 자들로 규정한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죽은 지 사흘이나 돼 무덤 속에 누워있던 나사로는 자신의 소생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무덤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의지를 가질 수 있겠는가?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항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엡2:8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선물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전적인 주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분명히 밝히며, 은혜로 인한 것이기에 구원이 선물임을 명시하고 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다름 아닌 회심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나 회심과 거듭남은 인간 편에서의 노력보다는 전적인 주님의 은혜의 역사이게, 인간은 철저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5,16)

이렇게 회심하여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주(主)로 고백하며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 김성로 목사의 주장처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인지되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한 이런 회심이 있다면, 망대의 계산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치러야 할 비용 계산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 후에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부자인고로 근심하여 돌아간 관원같이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나 문제가 된다.
 

(2) 회심을 위해 필요한 바른 복음 선포

성령의 조명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주 앞에 돌아오게 하는 회심과 거듭남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바른 복음 선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다면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이탈시키는 잘못된 가르침을 철저히 경계시키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 무엇인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죽음과 부활이다. 세계 3대 칼빈주의자로 꼽히는 B.B 워필드는 『바울의 복음』이란 설교에서 “그는 우리의 처지를 취하셨고, 그 몸에 우리의 모든 범죄를 지시고 나무에 달리셨고, 우리가 당할 죽음을 몸소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의를 우리에게 베푸셔서 이후로 우리가 살고 그에 대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의 핵심입니다.”라고 설파했다. 그가 이해한 바울 복음의 핵심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대속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떻게 한국교회 가운데 십자가의 대속 죽음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는 부활 복음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일까? 그의 부활 복음이 교회 부흥의 좋은 도구가 되는 실용적 가치 때문이다. 물론 교인들을 변화시켜서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도가 성경의 교훈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성경의 정죄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야 되는 사명자들이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거부하고 수적 부흥이 목회의 성공이며 주님께 영광이라는 실용주의적 등식을 가진 복음 사업가나 야망가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정하는 부흥은 결코 수적 성장에 있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 부흥의 기준이 된다면 성경에 기록된 진실한 선지자들은 실패한 사역자들로 전락하는 반면 성경이 정죄하고 경계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은 성공한 사역자들로 지옥에서 천국의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로 올라서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서 무려 120년 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 의의 설교자였던 노아는 오늘날 실용주의적 기준으로 보면 완전히 실패한 사역자가 되고 만다. 그는 단지 입술로만 주님의 심판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을 피할 길이 되는 방주를 산 위에다 지음으로 그의 삶을 통하여 설교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120년이란 시간동안 복음을 전했지만 그가 구원으로 이끈 사람들은 고작 그의 가족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히11:7)”와 “오직 의를 전파한 (설교)자(벧후2:5”)로 부르고 있다. 노아의 사역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주께서 주신 사명을 다하여 사람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의를 전파한 설교자의 모범이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동족들에게 주의 말씀을 대언했으며, 예레미야, 에스겔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다 백성들에 의해서 핍박받거나 죽임 당했다는 사실은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행7:52)”라는 스데반의 증거를 통하여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백성들에게 죽임 당한 선지자들은 실패했을까? 이 설교를 하고 죽은 스데반도 실패한 전도자일까? 아니다. 그들은 주께서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파한 설교자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많은 군중을 얻지는 못했을지라도 있는 그대로 주의 말씀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갈 남은 자들에게 참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일에 가장 크게 쓰임 받은 도구요, 가장 성경적으로 성공한 사역자들이었다.

물론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살펴볼 때 수적으로 부흥한 경우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부흥으로 평가되는 기준은 결코 많은 사람들을 모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성경적으로 바른 복음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 많은 목회자들이 수적으로 부흥한 목회자들을 추종하며, 그들의 비결을 배우려고 하는 태도는 심히 우려가 된다. 그분들이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비성경적인 부흥의 비결이 아니라 바른 복음의 내용이다.

바른 복음 선포를 통하여 진정으로 거듭난 주의 백성들을 세움으로 주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진정한 사명자들은 성경의 교훈과 상치하는 다른 복음은 결코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타협하지 않는 정신에서 선포되는 바른 복음을 통하여 씨 뿌리는 비유에서 주께서 말씀하셨듯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맺힐 것이다.
 

결  론

김성로 목사의 문제점은 사람이 변하지 않는 이유를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르게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은 회심의 여부에 있지 부활 강조에 있지 않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회심은 우리가 억지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른 복음 선포를 통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전적인 주님의 역사에 달려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늘 겸손하게 바른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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