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24회)

최종 경고

바울은 지금(고전12장~고전14:32)까지의 가르침을 마무리하면서 고린도 교회에 최종적으로 엄한 경고를 한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14:37-38).

위 본문에서 바울이 굳이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말은 정상적인 신자들에게는 하지 않아도 되는 상식적인 말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을 고려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자신을 신령하다고 여기는 정신 나간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1)

따라서 바울은 자신을 신령하다고 여기는 정신 나간 자들의 저항을 의식했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까지 편지로 가르친 내용이 “주의 명령”임을 이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면서 세운 교회의 지도자의 리더십을 무시하면서(이것은 곧 바울의 사도권 또는 리더십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거짓 은사를 앞세워 고린도 교회를 장악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런 자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의 비상식적인 행태로 보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상식적이지 않은 자들에게 매우 침통한 어조로 상식적인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이런 경고는 사도권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도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는 이런 침통한 경고가 발견되지 않는데 반해 사도권을 의심했던(고전9장과 갈1-2장을 참고하라) 교회에 보낸 고린도전서와 갈라디아서에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한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가 교회를 존재하게 하는 복음을 의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은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거짓 선지자들로 인하여 복음이 왜곡되었고, 고린도 교회에서는 거짓 방언자들로 인하여 복음(예언)이 전해지지 못하도록 방해받았다. 어떤 형태로든지 교회에서 복음이 공격당하는 일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이런 일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교회는 파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공격하는 일은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9).

또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린도 교회에도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14:38).

여기서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난해한 본문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제안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해석 두 가지는 ‘알지 못하는 대로 두라’(KJV-let him be ignorant)와 ‘그는 알려지지 않을 자다’(NIV-he himself will be ignored)이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전후 문맥을 고려한다면, 후자의 해석이 좀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서 ‘알려지지 않다’의 ‘아그노에이타이’(avgnoei/tai)는 현재형(직설법, 수동태) 동사다. 따라서 현재 시제를 고려해 후자의 해석을 취한다면, 38절은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하나님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이다

스스로 신령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바울이 고린도전서에 쓴 가르침이 주의 명령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들은 하나님께 인식되지 않은 자들, 즉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지 않는 자들(요일4:6을 참고하라)이 틀림없다.2) 여기서 하나님께 인식되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런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염려다. 혹시 이들이 끝까지 자신의 가르침과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바울의 불길한 예감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이런 불길한 마음을 이미 드러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인 선지자의 예언을 끝까지 듣지 않았으므로 앗수르 방언이 심판의 표적이 되어 파멸 당했듯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도 거짓 방언을 끝까지 고집해 예언을 듣지 않으므로 결국 거짓 방언이 심판의 표적이 되어 파멸 당하게 될 것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21절에서 이사야 28장 11절을 인용하면서 구약 원문에는 없는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를 첨가하므로, 당시의 이스라엘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강퍅함을 고린도 교회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고린도 교회가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멸 당했다는 분명한 역사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역사적, 고고학적 정황들을 종합해 보면 고린도 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파멸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 가능성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종 부탁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내 형제들아”라고 부름으로써, 여전히 이들을 믿음의 가족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한 모든 가르침이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바울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마지막 부탁을 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39-40).

위 본문은 고린도전서 12-14장 전체의 결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에 강조해 왔던 것처럼 마지막 부탁에서도 일관되게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왜냐하면 깊은 영적 침체에 빠져있는 고린도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은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울은 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방언 수용을 고린도 교회에 명령하는 것일까? 만약 이 명령이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개인용 방언, 즉 방언기도에 대한 것이라면 “금하지 말라”는 명령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하는 방언기도는 이미 28절에서 금하도록 명령했고, 교회가 아닌 장소에서 혼자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기도는 교회가 “금하지 말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지금 “금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방언은 예배에서 외국인에게 들려주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말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거짓 방언의 폐해를 지적하며 직간접적으로 그것을 금하도록 고린도 교회에 명령했다. 왜냐하면 거짓 방언을 말하는 것은 무익하며, 더 나아가 지체들 간에 서로 외국인이 되게 하므로 교회를 파괴하는 악이며,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에 대한 자신의 강력한 금지 명령 때문에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가 혹시 어쩌다가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외국인들이 예배에 들어왔을 때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방언마저 금하는 일이 생길까봐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방언을 하는 것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지만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방언을 금하는 것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예언은 적극적으로 하고 거짓 방언은 금하되, 성령의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까지 금하지 않도록 39절에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3) 그럼에도 방옹자들은 이것마저도 바울이 방언기도를 독려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4) 방언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바울의 가르침을 거역하지 말라’고 비난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예언을 강조하고 있는가 아니면 방언을 강조하고 있는가? 본문에서 바울은 예언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추구’를, 방언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수용’을 고린도 교회에 주문하고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바울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는 방옹자들은 왜 예언보다 방언을 더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는 것일까?(물론 바울이 소극적으로 수용하도록 말한 방언도 방옹자들의 방언기도는 아니다)

또 40절의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말은 독립적으로도 훌륭한 교훈이 될 수 있겠지만, 전후 문맥상 예배에서 행해지는 예언과 방언에 대한 명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은 먼저 예배에서 행해지는 예언과 방언을 “품위 있게 하고”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품위 있게 하라”의 헬라어 ‘유스케모노스(euvschmo,nwj)’는 상황에 ‘알맞게’(decently), ‘어울리게’(becomingly)5)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상황에 알맞게(어울리게)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에 알맞게, 즉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외국인이 왔을 때는 상황에 알맞게 외국인을 위해 ‘방언’을 말하고, 현지인 신자들을 위해서는 상황에 알맞게 방언을 통역하라는 말이며, 외국인이 없을 때는 상황에 알맞게 예언만 하라는 말이다. 따라서 바울이 이 명령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 하려는 말은 결국 “예배에서 거짓 은사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바울은 예배에서 행해지는 예언과 방언을 “질서 있게” 하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인간이 스스로 차례를 정해 놓고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쓰라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차례를 정하는 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서 있게 하라”는 말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대로 순종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예배의 질서는 저절로 유지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와 상관없이 하는 거짓 은사가 있다면 예배는 결코 질서가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 은사를 행하는 자들은 결코 성령이 역사하시는 대로 순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이 명령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게 하려는 말도 결국 “예배에서 거짓 은사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맺는 말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책망하는 것은 개인용 방언이 아니라 교회용 방언의 남용과 오용에 관한 것이며, 바울은 오히려 개인용 방언을 권장하고 있다는 방옹자들이 주장은 지독한 억지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개인용 방언처럼 보이는 거짓 방언을 지적하고 퇴출시키도록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은사를 주셔서 교회로 하여금 그 은사를 사용하게 하시는 것은 마치 아버지가 글자를 모르는 어린 아들의 손에 연필을 쥐여 주고 자신의 손으로 아들의 손을 덮어 잡고 아들에게 글자를 쓰게 하는 것과 같다. 이때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덮어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움직이기 때문에 어린 아들은 글자를 몰라도 제대로 된 글자를 쓸 수 있으며, 결코 칸을 넘어가는 남용이나, 지면 온 전체를 마구잡이로 낙서하는 오용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린 아들의 손에 연필이 들려 있기는 하지만 아들의 손을 움직이는 것은 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어린 아들이 아버지 몰래 연필을 들고 혼자서 글자를 쓴다면 칸을 넘나들며 삐뚤삐뚤 글자를 쓰게 될 것은 뻔하다. 이때 어린 아들이 쓴 글자는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아니라 마음대로 갈겨 쓴 의미 없는 낙서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린 아들은 자신이 글자를 쓰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또 온 지면에 의미 없는 낙서로 가득 채우면서도 대단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착각하며 흐뭇해할지도 모른다. 현대 교회의 방옹자들처럼 말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이 은사자의 손을 붙드시고 역사하시므로 오용이나 남용은 있을 수 없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남용되고 오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현대 교회의 오순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면서도 오용과 남용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이유는, 이들 모두의 방언이 성령의 붙들어 주심과는 상관없이 혼자서 마음대로 갈겨쓰는 낙서 같은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각 주-

1) 데이비드 프라이어, 고린도전서 강해, 정옥배 옮김(서울: IVP, 1999), p.340.
2)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p.335.
3) 본문에서 ‘금하다(forbid)’로 번역된 헬라어 ‘콜뤼오’(kwlu,w)는 ‘훼방하다(prevent), 억제하다(withhold)’의 의미도 있다. 데이비드 프라이어, 고린도전서 강해, 정옥배 옮김(서울: IVP, 1999), p.341. 따라서 본문의 ‘콜뤼오’(kwlu,w)를 ‘훼방하다’의 의미로 본다면, 바울의 이 명령은 예배에서 거짓 방언을 마구 함으로써 외국인에게 해야 하는 ‘정상적인 방언 말하기’를 훼방해 왔던 거짓 방언자들에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4)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8), p.84;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77 등 이 본문을 언급하는 방옹자들의 모든 책에서 동일한 주장을 편다.
5) Walter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New Testament(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 p.327; 김승교, 신양 원어 강해-고린도전서(서울: 로고스, 2008),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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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