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두말할 가치도 없는 진리이다. 그런데 구원 그 이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심비에 새져진 성령의 법에 따라 살아가고 있으니, 이제 구약의 도덕법은 거기에 녹아져 있으니 볼 필요도 없다는 주장과 그 성령의 법을 따름에 지침서인 계명의 기초인 구약의 도덕법을 보면서 신구약 모든 말씀에 순종할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양분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속에서 복음을, 복음 속에서 율법을 발견할 수 있고, 발견해야 한다는 '언약' 신학적 관점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율법 그 자체로서는 '죽이는 것'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율법이 성령으로 인하여 사용될 때에 그것이 복음의 열매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다고 하였다. 그 율법이 어떻게 죽이는 의문이 되었느냐 하면, 성령없이 그리스도 없이 사용되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되고, 성령에 의해서 활용될 때에 생명으로 인도하고, 또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좌표이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칼빈은 율법의 세 가지 용법으로 잘 정리하였다.

다시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돌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고 마음 판에 새겨진 것이 바로 '성령의 법'이요, '생명의 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구약의 의식법들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이런 오해는 절대 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율법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소위 '성령의 법'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분들의 오류가 바로, 율법의 복음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법은 결코 거룩하고 선한 '율법'을 무시하지 않는다.

칼빈을 오해하는 이들은 칼빈이 회개없는 믿음으로 구원을 강조함으로 한국교회 전반의 믿음이 엉터리이고 이기적이고 이로 인해 교회가 욕을 먹는다는 것인데, 칼빈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구원 받은자는 율법을 사랑하게 된다. 그 기록된 율법의 '정신'과 '영'을 깨닫고 지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고, 그것을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행하게 하시는 이, 행할 수 있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을 '성령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상의 면에서 볼 때, '모세의 법'과 '성령의 법'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같은 것이면서 또한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불신자들도 도덕법을 따르려고 하는데, 하물며 성령 안에 있는 우리가 새삼스럽게 도덕법이 왜 지침서가 되는냐? 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다. 똑같은 말씀을 가지고도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바라보는 말씀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예를 들면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비신앙인들은 인간의 윤리적인 측면에서만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신앙인의 눈으로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구원 얻은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당연한 의무라고 해석한다. 거기에는 자신의 한일에 대하여 항상 무익한 종으로서의 자기 성찰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의로 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4)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여기에 보면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는데, 사실 본문은 ‘...이루라’(work)가 아니고 ‘...이루어 가라’(work out)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한다. 이는 복합 동사를 사용하여 목표를 강조하는 말이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들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이 말은 분명히 성도가 달성해야 할 성도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목표요 의무임에 틀림없다. 즉 성도가 주도적으로 움직여 할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참여하신다. 그래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한 것이다. 이는 움직이고 행동하는 주체는 분명히 자신인데, 사실은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실이다. 이는 인간의 지혜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인 것이다.

구원을 위해 인간의 노력이 첨가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성도의 성화적인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의 당연한 책임이며 의무인 것이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비로소 안식을 누리며,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버지께 서 기뻐하시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새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4~5)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1~33)

성령께서는 성도의 심령 속에 내주 하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어서, 하나님의 뜻을 간구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완성한 이후로도 율법은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는 도구로 존재한다. 율법이 하는 일 중에 신자들에게 폐해진 것은 정죄하는 기능이다. 즉 죄 지은 이의 양심을 찌르고 저주하는 일이 중단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불신자나 자기의 힘으로 신자노릇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정죄가 주어진다. 하지만 신자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보여 주는 모범이다. 신자들이 행할 의가 율법과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의의 생활을 지도하는 영원불면의 표준은 여전히 도덕법 하나뿐이고 그것은 여전히 경외의 대상이다. 그것의 완전성은 우리가 평생토록 추구할 목표를 보여 준다. (교회사 김기홍 교수님의 글중에서 인용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세 부분이다. 첫째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이다. 그것은 칭의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둘째 자유는 이제는 율법을 사랑하며 순종할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병든 사람은 뛰어다니길 싫어한다. 그럴 힘도 없다. 마찬가지로 죄인은 혹시 의를 원해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죽음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얻은 이들은 일어나 활동할 자유가 주어진다. 하나님의 율법을 바라보면서 점점 더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전에는 의무감으로 할 수 없이 지켜야 했던 율법을 이제는 자진해서 행한다. 좋은 두려움으로 주인의 일을 하지만 자녀는 아버지의 기업이 자기 것이므로 기쁨으로 아버지의 일을 행한다.

셋째는 무해 무익한 것에 대한 자유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의 모든 것에 해당된다.그것들에 사로잡혀서 우상 섬기듯이 하지 않는 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 그 자체로는 해도 유익도 아닌 단지 하나님을 얻기에 이용할 대상인 줄을 알고 빠지지 않으면 된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진정한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어하는 성향이 생기게 되는 것이고 자기의가 아닌 성령에 의해서 그 법을 지킬 수도 있고 때론 실패할 수도 있지만 실패를 가슴아파하게 되는 자기 성찰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은 절대로 하니다. 하지만 구원 받은자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고 사랑하는 자유가 생기는 것이다. 구원파적인 믿음은 가짜이다.

진짜 믿음은 구원이후의 삶에 성화를 갈망하고 조금씩이라도 성화되어 가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음에 있어서는 다른 것을 첨가해서도 안 되고 첨가할 수도 없다. 구원받기에 합당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 사람자체가 변화하게 되므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게 되고 성령 안에서 그 법대로 살고 싶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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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숙 집사는 한국 교회의 신앙의 현장에서 개혁신학이 세워지기를 위해 깊이 헌신하고 있는 평신도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사랑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모여서 신앙을 토론하는 인터넷 싸이트 “개혁주의 마을”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화여대 및 이화여대교육대학원을 졸업했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대학원(MA 졸업)과 총신대학원(기독교 교육 수학)에서 신학을 연구하였으며, 대구신학교(현 대신대학) 등에서 강사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