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소멸되어 갈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결국에는 소멸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물론 바울이 성령의 영감으로 고린도전서 13장 10-11절을 기록할 때 확실히 깨달았을 테지만, 그 전에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은사가 소멸되는 것을 이미 인지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신유의 은사에 대한 그의 경험을 살펴보면 바울은 은사가 소멸되어 감을 몸소 겪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자를 일으켰다(행14:10). 귀신들린 소녀에게서 귀신도 쫓아냈다(행16:18). 자신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도 병이 떠나고 악귀가 나갔다(행19:12).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까지 행했다(행20:10). 이렇게 바울은 많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며 사역했다(롬15:19; 고후12:12).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는 신유의 은사로 병 고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사경을 헤맬 때 바울은 그를 치료하지 못했으며, 혹시 죽을까봐 근심하기까지 했다(빌2:27). 디모데에게 자주 생겼던 위장병을 놓고도 바울은 포도주(당시 가장 보편적인 치료약 중 하나)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하는 정도에 그쳤다(딤전5:23). 드로비모가 병들었을 때 바울은 그를 치료해 주지 못한 채 밀레도 섬에 그냥 남겨두고 떠나왔다(딤후4:20).1)
이렇게 바울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뿐 아니라 자신이 순회하며 목회하던 교회들에서도 성령의 은사들이 빠르게 소멸되고 있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바울이 다른 서신서에서 은사를 강조하지 않은 것도, 그리고 고린도전서 외에 다른 은사 목록들에 방언의 은사 등 초자연적인 능력이 수반되는 은사들이 없는 것도 성령의 은사가 빠르게 소멸되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야고보서에서도 감지된다. 야고보는 병든 자들을 위해 신유의 은사자를 불러서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교회의 장로들을 청해 기름(기름도 포도주와 함께 고대 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치료제였다)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말했으며,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가도하라고 권했다(약5:14-16). 야고보의 이런 처방은 당시에 신유의 은사자가 없었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은사가 급격히 소멸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야고보서를 읽는 교회들에 어찌 신유의 은사자가 한 사람도 없을 수 있었겠는가?
바울은 방언의 은사의 빠른 소멸도 경험으로 인지했으리라 여겨진다. 고린도전서 이후 어디에서도 방언에 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시에 이미 방언의 은사가 빠르게 소멸되어 거의 없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 당시 방언의 은사가 급속히 소멸되어 간 것은 로마 제국의 통일 정책과 도로와 교통의 발달로 말미암아 헬라어가 지중해 연안에 널리 보급되어 세계적인 공통어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2) 이런 방언 소멸 현상은 사도 시대 이후에는 더욱 급격히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시대 이후의 교부들 중에 방언에 대한 기록을 남긴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방언이 초대 교회를 부흥시킨 주된 능력이었다면, 교부 시대 이후에도 교회의 부흥과 함께 방언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교부들의 글에서도 방언에 대한 언급이 빈번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이그나티우스가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도 방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당시 교부들은 중요한 신약 교리에 대한 글들을 많이 남겼지만 이상하게도 방언에 대한 글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또 교부들은 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글에서도 방언을 그 예로 들지 않았다. 만약 당시에 방언이 정말 있었다면, 그들이 방언에 관한 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는가?
이런 교회사적 사실들은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명백한 증거들일 것이다. 물론 사도 시대 이후 3세기 동안 방언에 대한 언급이 단 두 번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두 번의 경우도 이단으로 정죄된 몬타누스와 한때 몬타누스주의에 빠졌던 터툴리안에 의해서였다.3)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말이 통하지 않는 오지의 선교 현장에서 아주 드물게 선교사들에 의해 보고되는 정도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3장 10-11절의 말씀대로 아직까지 은사가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지만 계속 소멸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렇게 방언은 계속 사라져 가다가 성경대로 예수의 재림 때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 교회의 방언 홍수 현상은 성령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거짓 현상임이 분명하다.
성령의 은사 소멸 그래프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은사는 어린아이같이 연약하고 미숙한 교회에 주어지는 성령의 비상적인 선물이다. 은사는 교회가 당장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당장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이 일시적으로 주시는 초자연적 능력이다(이 부분은 3부 ‘현대 교회의 방언’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그러므로 은사를 주신 성령의 목적이 달성되면, 즉 교회가 성령이 주신 은사가 필요 없을 만큼 성숙해지면 미숙할 때 필요했던 은사는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어린아이가 장성해서 성인이 되면 어린아이의 유치한 일들을 버리듯이 온전한 것이 올 때(예수의 재림) 교회는 완성될 것이므로 어린아이같이 미숙할 때 주어진 은사들은 교회에서 완전히 소멸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지금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는 성장 과정을 비유로 은사의 소멸 방식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아래는 오순절주의자들 주장과 은사 중자론자들의 주장 그리고 바울의 은사 소멸 주장을 그래프로 그린 것이다. 참고하라.

위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의 은사는 유효 기간이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 때가 유효 기간이 만료되는 시점이다(고전13:10). 우리는 은사가 완전히 소멸되는 시점인 예수님의 재림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초대 교회 때보다 지금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더욱 가까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초대 교회 시대보다 지금이 성령의 은사가 훨씬 적어야 하는 것이 성경적이므로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에는 성령의 은사들(특히 방언)이 왜 날이 갈수록 더 성행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에 성행하는 은사들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가 아닌 거짓 은사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유효 기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유효 기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거짓 은사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며 성행할 것이다(마24:24 참고).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처럼 말이다.
물론 오순절주의자들은 주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사단의 역사는 우는 사자와 같이 강해질 것이므로 교회도 성령의 능력으로 더욱 강하게 무장해야 한다고 항변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은사를 동일시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더욱 무장해야 하며 성령도 그렇게 되도록 교회를 도우실 것이다(계11:3 이하 참고). 그러나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면 할수록 오히려 성령의 은사들은 감소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연약한 교회에게 주시는 성령의 비상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도’라는 은사는 참으로 대단한 은사이다. 그러나 이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기록하도록 성령이 주신 은사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지고 성경 기록이 완성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사도의 은사는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비록 사도는 없어도 교회는 더욱 강력한 성령(말씀)의 능력으로 무장해 세상을 이기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방언의 은사도 마찬가지다. 방언은 외국어를 하지 못하는 자에게 외국어를 할 수 있게 하는 초자연적인 언어 능력이다. 그러나 이 은사도 때가 되면 사라지는 비상적인 능력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 방언의 은사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빨리 외국어를 습득하여 방언의 은사 없이도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잘 걷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보행기를 의지해서 걷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보행기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 걷는 연습을 통해 다리에 힘을 길러서 빨리 보행기를 버리고 제 발로 자유롭게 걷고 뛰어야 한다. 만약 어린아이가 계속 보행기를 탈 수밖에 없다면, 그 아이의 다리는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 각주 ---
1) 김세윤 외 3인 공저,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서울: 새물결플러스, 2011), pp.38-39; 로이드 존즈, 성령의 주권적 사역, 정원태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41.
2) 마이클 그린, 초대 교회 복음 전도, 박영호 옮김(서울: CLC, 1988), p.15.
3) 문효식, 방언에 대한 신학적 평가, 국제신학 4월호, 2002, p.112.
4) 로버트 토마스, 성령의 은사들, 김지찬 옮김(서울: 생명의말씀사, 1983), p.149.

이창모 목사님의 글은 치밀한 수사학적 분석이 돋보이는 설득력 강한 문장이 매력이며 이전의 방언에 대한 연재글을 공감하면서 숙독하였었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성령의 은사'에 관한 3편의 글을 연이어 읽으면서 공감과 동시에 부분적으로 공감하기가 편치 않는 부분이 있어서 글을 올려 봅니다.
1편의 글에서 이목사님께서는 성령의 은사가 성경의 완성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재림때에 가서야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자라나 성인이 되듯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고 하시며 아직까지 성령의 은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성령의 은사라 함은 예언, 방언, 통역, 신유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3편에서는 은사의 양과 시간의 흐름을 그래프로 보여주시면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부연설명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3편에서 이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물론 성경 기자의 서술도 그러합니다만), 사도 바울이나 야고보는 서신서를 통해 교회에게 그러한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이목사님의 설명과 그래프가 불일치하는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과 야고보가 편지를 쓸 당시는 당연히 성경이 아직 완성되기 전입니다.
저 시기를 이천년 교회사를 일년 단위로 쪼개어 이천등분해서 표기한다면 아마도 성령의 은사가 발현된 시기는 그래프의 맨 앞쪽 부분에 해당될 것이며 2번 그래프의 그림과 같은 모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이것을 글로 표현하려니 여간 어렵지 않네요...ㅠ)
물론 이목사님의 주장처럼 간혹 몇 년에 한 번, 혹은 몇 십년만에 한번 일어나는 성령의 은사로 3번 그래프처럼 묘사하기엔 무리가 따릅니다.
정 그린다면 2번 그래프처럼 급격하게 꺽이다가 거의 바닥선과 일치하듯 진행되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나 이목사님의 주장처럼, 사도들이 서신서를 쓸 무렵에는 이미 성령의 은사가 거의 소멸된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목사님께서도 설명하셨구요.
또한 초대교회를 지나 속사도 시대, 교부시대를 거쳐 가면서 성령의 은사가 발현된 증거문헌이나 자료 등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성령의 은사가 거의 소멸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굳이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100% 확증할 수 없는 성령의 은사가 몇 십년만에 한 번 발현됐다고 가정했을 때, 그것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함으로써 오순절파나 신비주의, 신사도주의 등에서 "때는 이때다"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함 때문입니다.
두서 없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