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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 사상은 비성경적입니다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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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03  20: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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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운동이 교회에 미친 악영향이 크다. 이제는 중보기도라는 용어 자체가 비성경적임을 성도들에게 더욱 더 강조하고 가르쳐야 한다.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중보기도를 가르치고 권하는 내용이 없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나 개념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고, 남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기도를 다 하되 중보라는 개념과 의식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보자·중보기도팀·중보기도회·중보기도운동… 이 모든 용어도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음에 해되는 말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신앙에도 오해와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보기도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가 그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장 합동은 이미 오래 전에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합동 교단 교회에서도 여전히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미 친숙한 용어로 자리 잡았으므로 고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교회와 타인을 위한 기도라는 의미를 분명하여 계속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수용할 수는 없다. 신앙에 해를 미치는 나쁜 사상과 운동이 일어 날 때에는 꼭 성경적이지 못한 용어가 등장하고, 그 용어를 매개로 하여 비성경적인 사상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 사상을 기반으로 장난하는 사탄의 미혹이 밀려온다. '성령운동'이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인간이 성령을 일하게 한다는 그릇된 개념을 내포하는 망령된 말이다. 그릇된 성령운동이라는 이론 하에 귀신 장난이 교회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기름부음'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으로부터 기름부음이 나온다는 흘러나온다는 아무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애매모호한 '기름부음'이라는 개념도 결국 교회에 많은 귀신의 미혹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중보기도'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운동·기름부음이라는 말이 이미 우리에게 너무도 밀착되어 있는 것처럼, 중보기도라는 말도 우리에게 매우 깊이 밀착되어 있다. 그래서 중보기도가 그릇된 용어이며 비성경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이미 오래 전부터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운동·기름부음이라는 모호한 말을 용납하면서 겪어야 했던 심각한 손해를 생각해야 한다. 중보기도라는 말과 개념의 부작용도 그에 못지않다. 기도하는데 왜 혼란과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뻐하시지 않고,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도해도 성경적이지 못하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에 사탄의 미혹이 일어난다. 기도는 중요하고도 영적으로 예민한 영역이기 때문에 그릇된 기도는 악한 영들이 좋아는 대표적인 미혹의 통로이다. 중보기도 사상과 운동을 통해 그러한 부작용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피터 와그너와 신디 제이콥스, 마이크 비클 등의 미국 사람들과 엘리야 기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김종필 목사, 인터콥의 이지애 총무, 서울의 큰믿음교회의 중보기도학교(교장 김옥경 목사) 등의 신앙을 연구해 보기 바란다. 이들은 모두 심각한 신사도 운동가들이다. 중보기도 사상은 신앙이 크게 변질된 사람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중보기도 

왜 중보기도 사상을 확실하게 가진 사람들은 그릇된 운동의 거장들이 되었을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라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라는 말이다. 십자가가 완전한 구원을 준다고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사역이 완벽했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보기도의 자격이 있고, 중보기를 해야 한다면, 또는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방법인 십자가의 효력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중보기도에 대한 내용이 전무하다. 신약의 교회에는 중보기도의 사명, 중보기도의 은사, 중보기도의 직분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디모데전서 2:1절의 '도고'를 중보기도라 오해하고서 신약성경에도 중보기도에 대한 명령이 있다고 우긴다. 그러나 도고라는 단어(헬라어 '엔튝시스')를 일부 영어성경들이 'intercession'으로 번역하고 또 우리 말 성경이 '중보'라고 번역하여 나타나는 오해일 뿐이다. 그 단어는 '기도'라고 번역되면 좋을 단어이다. 


우리가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되는 이유를 정리해 보자.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느낌을 따라 임의로 믿으면 안 된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의 사명을 완수하심으로 완전한 구원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중보기도라는 말과 사상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기독교의 구원을 위협하는 행위이다. 사탄이 중보기도 사상으로 일하는 자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중보기도 개념 그 자체가 완전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 유일성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천주교가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공동구속자'(Co-Redeemer), '공동중보자'(Co-Mediator)라고도 한다. 마리아가 일반 사람들에게 은혜와 구원이 임하도록 하나님께 중보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그 외에도 교황·신부·위대한 성인들도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신·구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중보기도 개념 

구약성경의 어떤 내용은 중보기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구약시대에는 인간 중보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주시라고 요청하고 중재하는 중보기도를 드렸다. 매 시대마다 존재했던 인간 중보자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일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도록 중재하면서 요청 드리는 중보기도를 드렸다. 지금 널리 확산되어버린 중보기도 개념은 이 사실을 단순하게 이해하는데서 시작되었다.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의 활동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인간 중보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셨다. 일반 백성들을 직접 대면하시면서 일하시지 않았다. 모든 시대마다 세우신 중보자들이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셨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들이 사명을 잘 감당했을 때에는 큰 부흥과 은혜가 있었고, 그들이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했을 때에는 재앙과 고통이 많았다.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이 감당했었던 일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 전달하여 백성들이 무지에서 벗어나고 자신들의 악한 죄를 깨닫게 했다. 이러한 중보사역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모세·이사야·예레미야·다니엘… 등의 선지자들이다. 

둘째, 하나님을 대신하여 통치하면서 사회의 질서를 수립하고 유지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앞장서 싸움으로 해치기 위해 침입하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였다. 이러한 중보사역을 감당했던 자들이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왕들이었다. 또한 왕정이 수립되기 이전의 이스라엘의 사사들도 같을 일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셋째, 죄에 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백성들을 위해 동물의 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사죄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선물하였다. 그들은 피의 제사를 드려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하였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평하게 만들었다.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을 비롯한 많은 제사장들이 이러한 중보사역을 감당했다. 

구약 시대에 인간 중보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죄악에 빠진 인간과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사이에 아무런 교통(communication)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구원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멸하기를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은혜·생명을 주시기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리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 부득이 필요한 조치를 취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인간 중보자들을 세우시는 것이었고, 그들로 하여금 쉬지 않고 중보하는 기도를 올리게 만드셨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지"(삼상 12:23) 

중보자였던 사무엘 선지자는 자신의 중보기도에 따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끊임없이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는 거룩한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중보기도하지 못하여 이스라엘에 은혜가 그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수라 할 정도의 작은 일이 아니고 그 결과가 너무나도 심각한 죄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겔 22:30) 

중보기도운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자주 인용한다. 오늘 날에도 중보기도를 시행하여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일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중보기도자들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렇게 이용될 내용이 아니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릴 성물을 더럽히고, 지도자들이 불의한 이득을 위해 연약한 백성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참된 예언의 말씀을 받아 전해야 할 선지자들이 사탄의 미혹을 받아 거짓 복술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즉, 그 시대의 인간 중보자들이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인간 중보자들이 다 감당하지 못한 그 일을 완전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다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 이전에 인간 중보자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지금도 중보기도자들이 부족하여 은혜가 넘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 

구약 시대의 인간 중보자들의 중보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그들이 위대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죄악에 빠져 망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전히 중보하여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는 이르지 않았고, 그렇다고 백성들의 죽고 망하도록 방치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참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미리 대행할 모세와 같은 인간 중보자들을 세우셨다. 모세와 같은 인간 중보자의 중보기도를 기꺼이 받으시고 응답하신 것은 장차 오실 완전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모세가 그 자이에 섰기 때문이다.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은 부족한 죄인들이었다.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을 수 없었다. 모세는 여러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매우 성공적인 중보사역을 감당하여 이스라엘에게 많은 은혜와 복을 누리게 했다. 그러나 한 순간 자신의 혈기를 이기지 못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중대한 일을 그르치기도 했다(민 20:12).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릇 행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계시하는 중보자의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하지 못하였음을 책망하셨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우리게 하리라 하시더니"(행 13:22) 

구약의 왕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왕이었던 다윗도 장차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계시한 인간 중보자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선지자이면서 동시에 왕이었다. 일찍부터 다윗의 성품과 믿음을 아신 하나님은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다윗은 탁월한 믿음을 가진 다윗의 통하여 많은 일들을 이루셨다. 그러나 다윗도 치명적인 죄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철저하게 실패하는 다윗을 보면 하나님나라를 인간 중보자들에게 맡긴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죄인들에게 은혜주시기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러한 위험과 모험을 감수하셨던 것이다 

선지자·왕·제사장의 중보 직임을 완수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아들이 온전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도 더욱 생명의 능력이 동반되는 권세 있는 말씀을 무지한 백성들에게 전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는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크게 은혜를 입었으나, 사탄에게 속한 사람들은 분개하며 이를 갈았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도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전파되는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 속한 백성과 사탄에게 속한 악한 사람들이 확연하게 구별되었던 것은 예수께서 참 선지자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진리와 영생의 말씀을 전하는 최종적인 ‘그 선지자’로 오셨으므로 사탄에 속한 악한 자들의 대적과 핍박이 더욱 극심하였다. 

"그 사람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대적하는 원수 마귀를 물리치셨다.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도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더 이상의 동물의 제사를 필요하지 않게 하셨고,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구약의 인간 제사장이 역할을 친히 죄 없으신 자신의 몸으로 완전하게 이루셨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인간을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하며 중보하는 기도를 올렸던 구약의 세 종류의 중보의 직분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리시며 죽으신 십자가가 그 핵심적인 중보의 사역이었다. 그리고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중보자는 이제 천상에서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간구하신다. 중보자 예수께서 구원하신 우리를 영원히 보존하시기 위해 친히 쉬지 않고 중보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해 간구하심이라"(히 7:25) 

확실하게 성취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하는 기도를 올리면 100% 확실하게 그 결과가 나타난다. 예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에게도 엄청난 마귀의 광풍이 몰아닥쳤다. 그러나 아무도 해를 당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탄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일 정도로 무섭게 공격했음에도 단 한 명의 제자도 상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께서 중보자로서 그들이 보존되기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1~15) 

그 날 밤 베드로도 사탄의 공격을 받아 믿음이 파선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다. 마귀는 그를 죽여버리려고 했다. 가롯 유다처럼 스스로 파멸되어 다시는 믿음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생명과 믿음은 보존되었다. 비록 두 번이나 주를 부인하고, 세 번째에는 자신과 예수가 무관하다고 웅변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주를 저주하였다. 이러한 사람이 다시 빠른 시간에 제기하여 가장 중심적인 사도가 되고,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다. 마귀의 공격이 시작 될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해 이미 중보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셨기 때문이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이처럼 그 결과가 확실하다. 그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완벽하게 중재하는 자격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100% 완전한 하나님, 100% 완전한 인간으로서 십자가를 지셨고, 하나님과 사람 양편의 입장을 100% 만족시키시기 때문이다. 인간을 대표하여 죽으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시는 조건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은혜를 중재하면서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반석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완전한 중보자가 되신 예수를 통하여 얻은 구원이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그 분이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지금도 천상에서 지속되고 있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확실하게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다시 마귀에게 넘어가는 일이 없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그러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의 모임인 신약의 교회에는 인간의 중보기도가 없는 것이다. 중보기도라는 말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혜택을 누리면서 장성한 믿음을 가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만 할 뿐이다. 

중보자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신약의 성도 

그러므로 중보기도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와 관련된 개념이나 사상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단지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부르는 용어일 뿐이라는 주장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말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오해가 생기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뜻으로 말을 했을지라도 듣는 사람들이 저런 뜻으로 이해하면 큰 오해가 생기다. 그래서 입은 비뚤어졌을지라도 말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중보기도라는 말도 충분히 그럴 위험성이 있다. 이미 중보기도라는 단순한 용어의 차원을 넘어 중보기도운동으로 발전되어 버렸다. 그리고 별의별 사이비 개념들이 그 안에서 자리를 잡았고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것처럼 확산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연합기도'·'합심기도'… 등의 적절한 대체 용어가 있음에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계속 고집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그냥 기도하자고 하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보기도하자고 하면, 다른 사람보다 앞서 이끌어가는 영적인 선구자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냥 기도한다고 하면 시시한 느낌이 드나, 중보기도한다고 하면 남들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특수요원 또는 지휘관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만들기 때문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더욱 더 중보기도라는 말은 사라져야만 한다. 

중보기도라는 말이 비성경적이라고 지적만 하면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없다. 중보기도라는 용어와 사상을 추방하기 위해 성도들에게 바른 기도에 대한 이해와 사상을 가르쳐야 한다.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는 이미 엄청난 기도의 특권과 은혜가 보장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하나님께 직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일반 백성들에게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기도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대면하면 기도하기는커녕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려워서 떨기만 했다.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 18:17~18)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간구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지 못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죄가 제거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불완전한 인간 중보자였다. 하나님 앞에 직접 나오지 못하는 다수의 죄인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한 사람을 택하여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중보자들을 통하여 다수의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 구약 시대에는 소수의 인간 중보자들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기도할 수 있었지만, 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멀리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기도했다.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눅 1:9~10)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 모든 성도들은 어디서나 하나님께 직고하는 특권을 누린다. 이는 죄를 제거하시는 완전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다. 구약의 성도들과는 달리 신약의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친밀하게 직접 기도하도록 허락되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우리 안에 성령이 오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었다. 이 신비를 요한 사도는 기름 부음(요일 2:27)이라고도 표현했다. 성령이 우리 속으로 오심으로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었고(고전 3:16), 하나님을 직접 모시는 신약의 영적 제사장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돌보심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구약의 소수의 인간 중보자들에게 임했던 은혜보다 더 한 은혜가 성령 하나님을 모시는 영적인 제사장 된 신약의 모든 성도들에게 임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의 기도보다 더욱 가까이에서 또렷하게 우리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이러한 은혜를 누리는 지금 왜 중보기도라는 말과 개념이 인정되어야 하는가? 기도에 있어서 특별한 은사, 직분, 조건을 선점하고 있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동일하다. 하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기도하는 각자의 믿음에 달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혜택을 입어 구원과 교제를 누리는 성도가 얼마나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가? 이것으로 기도의 응답이 좌우될 뿐이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의를 가진 모든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더욱 가까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완전한 중보사역으로 구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는 사람, 진실하게 믿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삶과 행실과 말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예수의 향기를 내는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께는 더욱 크게 들린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빨리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이제는 특별한 기도 전공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은 말이나 개념을 버려야 한다. 중보기도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런 개념으로 기도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되었고, 계속 오해와 혼란과 부작용을 증폭시킨다. 불신자 전도를 위해, 교회의 어려운 일을 위해, 선교사들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모든 내용을 하나님께 고하면 된다. 그냥 기도하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모든 성도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께 또렷하게 들리도록 기도할 수 있다. 중보자의 입장으로 돌아서 특별기도 모드를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게 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하나님! 우리 민족에게 은혜를 부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교회의 당면한 어려운 일을 풀어주십시오!"라고 아뢰고 간구하는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 

감옥에 갇힌 베드로 사도를 위해 성도들이 그렇게 기도하였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하였다. 

"감옥에 갇혀 생명이 경각에 달린 베드로 사도님을 위해서 중보기도합시다!"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전혀 이러한 개념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완벽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성도에게 주신 기도의 특권으로 그냥 간구하였다. 감사드리면서, 지속적으로, 간절하게,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였다. 모든 성도가 타인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이웃과 국가를 위해 그냥 예수님 안에서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에 반하는 용어와 개념은 무조건 배격해야 한다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분들은 대부분 사상과는 관련이 없고 단지 명칭을 쓸 뿐이라고 한다. 정말 용어만 쓸 뿐이지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기도에 관한 바른 이해와 자세, 그리고 그릇된 이해와 자세가 뒤죽박죽된 상태에서 중보기도라는 말을 쓰고, 그 개념을 말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많은 것은 분명하다. 혹 아무 문제점이 없이 단지 용어만 쓴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것 까지도 고쳐야 한다. 

"기왕에 중보기도라는 말을 써왔고, 이미 자리가 잡혔는데, 그냥 그대로 가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악하다. 성경보다는 자신에게 익숙한 스타일을 더 앞세우는 태도이다. 성경 말씀보다는 자신에게 친숙해진 '자기 믿음'을 중시하는 자세이다. 자신에게 좋으면 성경도 살포시 뭉개면서 가겠다는 자세이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에게 미혹과 혼란과 부작용을 초래하는 '이단 스타일'은 바로 이렇게 탄생한다. 기름부음이라는 말로 인해 어떠한 혼동과 미혹을 경험하였는지, 성령운동이라는 말과 개념이 일어나면서 어떠한 오해와 부작용들이 교회를 더럽게 만들었었는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중보기도에 대해서도 역시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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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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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종수 2016-12-03 21:50:22

    귀한 말씀입니다. 일찍부터 코닷에다 중보기도 쓰지 말자고 해도 이게 고쳐지질 않아요.
    정목사님의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kscoramdeo.com/bbs/list.html?table=bbs_9&idxno=3654&page=2&total=64&sc_area=&sc_word=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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