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죽은 목사의 설교동영상을 보면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나가지 아니하고 인터넷 유튜브 동영상 설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에 가기는 싫고 신앙양심은 아직 남아 있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스스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

소위 가나안교인들이 많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안아야할 숙제이다. 교회에 실망하고 목회자에게 식상한 사람들의 임시방편으로 등장한 영적 비극이다. 혜성같이 나타난 설교자가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을 사정없이 비난하고 비판하고 치는 공격적인 설교를 들으면서 보상심리로 속이 시원한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는 것처럼 느낀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비리(물질문제, 윤리문제)에 상처 입은 성도들에게는 갑자기 뜨고 있는 한 개인의 경건성과 무소유의 청빙성이 예수님을 보는 것처럼 신비함을 느끼게 하는 보상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설교, 검증되지 않은 설교에 심취하여 영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고도 전혀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시대는 영적 대혼란시대이다. 밖으로는 이슬람의 팽창과 공격, 동성애같은 비윤리 비도덕 비성경적 범죄를 합법화하고 성경을 불온서적, 불법문서로 낙인찍고,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아냥거리는 자들이 있다. 안으로 교회 내부는 시기질투분쟁으로 얼룩져있고 수많은 성도들이 우왕좌왕 흔들리고 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영적 리더십이 결여되어 있어 백화점 윈도우 쇼핑 손님처럼 인터넷을 뒤지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는 불쌍한 앙떼들이 있다. 누구의 잘못이며 누구의 책임인가? 첫째는 영적 지도자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분별없이 인터넷 설교에 도취된 성도들도 결코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냉철한 마음으로 이 시대의 영적 혼란을 점검하고 바로 믿고 바로 살아야할 것이다.

이 글은 영적 분별력이 약한 순진한 양들의 마음이 흔들리거나 혹은 작은 부분이라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터넷 설교자들 가운데 근자에 비판을 받고 있는 김성로 목사의 십자가 신학사상에 대해 몇 가지를 살펴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누군가를 비난하고 이단시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성도들에게 올바른 주의를 고취시킨다는 데 있다. 이 많은 문제들을 파악하고 검증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하기에 시간을 두고 더 연구하려고 한다.
 

춘천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와 그의 십자가 신학 사상

1) 김성로 목사
전직 체육교사였고 예수님 만나 은혜 받고 신학을 해서 춘천한마음침례교회 개척했다. 수도 목회 침신대학원 졸업하였으며 현재 한마음 침례교회 담임 목사, 한마음 선교회 대표, 기독교 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FMB) 이사, 세계선교훈련원(WMTC) 객원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2) 그의 십자가 신학의 문제점
참으로 말이 많다. 저명한 P교수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론을 참 잘 하는 것이라고 격려했고 어떤 이단연구자는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평가하고 동조하고 있다. 정말 참 잘하는 것이고 문제가 없는 것인가? 혹자는 이단성이 있다고 까지 비판하였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소위 ‘부활교’ 라고 비난받는 김성로 목사 그의 주장은 십자가만 붙들고 십자가만 믿고 십자가만 전했을 때는 모든 것이 실패였는데, 부활을 붙들고 부활을 외치고 부활을 강조했을 때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성공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교인이라면, 누가 이 말을 들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보혈을 흘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고,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는 십자가, 사도 바울이 평생을 목숨 다해 가르친 십자가, 모든 사도들과 수많은 주의 종들이 십자가 붙들고 박해받고 고난당하고 순교한, 그 십자가가 실패인가? 십자가 없는 부활을 생각할 수도 없는데, 십자가의 필요성을 외면한 채 부활만을 강조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심각한 문제는 실패한 십자가를 버리고 부활만 붙들고 나가면 성공한다는 이 가르침을 대단한 신교리, 새신학인 것처럼 몰려가는 수 백 명의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안 되도 너무 안 되니 답답하고 죽을 지경이라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몰려갔을 줄 믿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부활을 강조하기 위한 잘못된 성경해석상의 문제를 지적해보자.

2016년10월27일 저녁 송촌장로교회 부흥회 설교에서 김성로 목사는 15년 동안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했는데 십자가 중심이었을 때는 사람이 안 변하는 한계에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활을 증거 하니 사람들이 변하더라는 것이다. 김성로 목사는 자신이 죄인임을 십자가로는 알 수 없었는데 부활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는 사랑을 깨닫지 못했는데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 도대체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의 능력은 무엇인가? 십자가의 도는 무엇인가?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들이 변하지 아니하였다면 도대체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는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의 나타남이며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십자가는 도대체 김성로 목사에게 무엇인가?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설 때 죄인임을 깨닫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가지고는 사랑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십자가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한다. 십자가의 의미를 십자가 자체로써 깨달을 수 없고 부활을 통하여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와 부활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인임을 깨닫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확신한다. 그런데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와 부활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서로 갈라놓고 있다. 결과적으로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와 부활을 서로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이다. 믿음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이다. 결단코 둘이 아니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김성로 목사의 사상은 십자가로는 불가능한데 부활로는 가능하다는 사상이다. 결국 그는 십자가와 부활의 동등함을 부인하고 십자가는 차등이고 부활은 우등이라는 잘못된 등식을 만들어놓고 말았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겠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한데 부활로 십자가를 볼 때 십자가는 완전하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그 자체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데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십자가로는 알 수 없는데 부활을 통해서 비로소 십자가의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상은 아주 위험한 사상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는다. 멸시, 천대, 고난당하신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성경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성로 목사는 부활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생각을 입증하기 위하여 요한복음2:22을 인용해석하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2)

김성로 목사는 위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든 성경이 부활을 통하여 깨달아진다고 한다. 그런데 요한복음2:22의 “이 말씀하신 것을”이라는 부분은 신구약 66권 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21절 말씀을 가리킨다. 즉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깨달은 시간이 예수님의 부활 후라는 것이지 이 본문이 부활을 통하여 모든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의 성전청결 작업이 나온다. 요한복음2:13-19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성전에서 장사를 하고 돈을 바꾸는 일을 하였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짐승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엄히 꾸짖으셨다. 이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물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때 당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이 헤롯성전을 가리킴인줄 알았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노골적으로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이 사건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20절에서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을 하였다.

그리고 22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기록했다. 당연히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도 그랬을 것이다. 이 본문의 말씀은 김성로 목사의 말처럼 부활을 경험한 후에 십자가를 알 수 있고, 부활을 통하여 모든 성경말씀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본문이 아니다. 22절의 “이 말씀하신 것”은 19절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당연히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를 이해하고 부활을 통하여 모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모든 성경말씀을 부활이라는 포커스에 맞출 때 깨달아진다고 보는 것은 이상한 논리이다. 십자가라는 안경이 아니고 부활이라는 안경을 써야 성경이 깨달아진다는 논리이다. 모든 성경을 부활이라는 사건으로 해석해야 해석이 된다는 방법이다. 모든 성경은 믿음으로 깨닫는 것이다. 믿음으로 십자가를 이해하고 믿음으로 부활을 이해하는 것이지 부활을 통하여 모든 성경을 안다는 것은 이상한 논리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지 못했던 것은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미리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복음2:22에서 제자들이 말씀을 믿었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내용적으로 19절의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도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이 당시의 헤롯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제대로, 올바르게, 정확하게 알고 믿었다는 것이다.

2)시간적으로 이와 같은 영적 의미를 부활 이후에 믿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본문은 분명히 부활사건이 제자들로 하여금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19절)을 믿게 했다고 말하지 않고 시간적으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성령의 역사, 요14:46) 성경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는 말씀이다.

3)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았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알았던 것이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이 말씀은 분명히 요한복음14:26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말씀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2:22 본문을 가지고 부활을 통하여 모든 성경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고 부활론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본문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이 믿은 것이 무엇인가? 요한복음2:22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본문의 성경은 요한복음5:39과 함께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본문(την γραφην)과 요한복음5:39의 그 성경(τας γραφας, tas grafas)은 헬라어 본문의 관사와 함께 사용된 복수는 구약성경의 잘 알려진 문선집을 가리키는 것이다.(요단출판사, 신약원어대해설 요한복음 154쪽)
 

부활을 통해 모든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해석학적 주장이 성경적인가?

오늘 우리에게 성경은 신구약 66권을 말한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한다. 그 당시 제자들에게는 구약성경만 있었을 뿐이다. 부활을 강조하기 위해 부활을 통하여 모든 성경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이 본문은 부활을 통하여 신구약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후에야 19절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성전을 헐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은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세 번 수난 예고를 하셨다. 마태복음16:21,17:22-23,26:2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요한복음2:22에서 말씀하는 것은 부활을 통하여 모든 성경을 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19절의 말씀이 헤롯 성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가리킴인 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김성로 목사의 십자가를 통해서는 알 수 없었는데 부활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사상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은 3일이라는 시간을 두고 연속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지 서로 별개의 것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십자가가 역사적 사건이라면 부활도 역사적 사건이다.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이라면 부활도 복음의 핵심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연속적 사건이다.

춘천한마음교회 L씨의 간증(김성로 목사의 설교 중 간증이 나옴) ‘십자가로 죽으셨습니다로 끝나면 누가 하나님인 줄 알 수가 없어요’라는 말은 십자가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을 알 수 없다는 말인데 이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선생님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이신 것을 십자가 사건 전에 이미 알았다.

베드로 (마16:16),나다나엘(요1:49),세례요한(요1:29)과 같은 제자들은 다 십자가 사건 훨씬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로 죽으셨다는 것으로 끝나면 누가 하나님인줄 알 수 없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요2:11). 예수님의 이 초자연적 표적(세메이온)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으로 믿은 것은 부활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 전에 이미 알고 믿었다. 그러므로 부활을 통해서만(십자가로는 아니라) 십자가를 이해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간증의 문제점 (춘천한마음교회 L씨)

2016년10월27일 저녁 송촌장로교회 부흥회 김성로 목사 설교 중 영상으로 나오는 L자매의 간증이다. "김성로 목사님이 칠판에 큰 글씨로 ’복음은 부활‘이다 이렇게 쓰셨어요" 라고 간증을 시작했다. 김성로 목사의 ‘복음은 부활’이다는 말을 들으면서 십자가는 복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복음에 대한 전통적 표현은 최고로 요약해서 말한다고 해도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김성로 목사는 교인들에게 (십자가를 강조하지 않고) 부활이 복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김성로 목사 자신이 십자가를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말하지 않고 부활은 복음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복음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일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절뚝발이 복음에 불과하다. 어찌 십자가가 없는 복음이 있다는 말인가?

L씨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간증을 하였다.

"그러니까 십자가로 죽으셨습니다로 끝나면 누가 하나님인 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보고 나니까 그 분이 죽으신 십자가가 아 하나님이 죽은 십자가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죽은 십자가가 사랑이구나 이걸 알 수가 있는거더라구요. 아 누구나 믿을만한 객관적인 증거 그건 역시 부활이구나...정말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물증 부활을 통해서 생기는 거였어요"

이 간증을 설교시간에 하게하는 김성로 목사의 사상은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부활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 저러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내세우고 있다.

1) 십자가로 죽으셨습니다로 끝나면 누가 하나님인 줄 알 수가 없다는 말이 성경적인가?
분명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알고 믿었다. 즉 부활을 경험하기 전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믿었다.

2) 믿음의 발생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고 가르친다. 성경 에베소서2:8 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며 그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교훈한다. L씨의 간증처럼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확실한 물증 부활을 통해서 생긴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믿음이 부활을 통해서 생길 수도 있지만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가르친다.

김성로 목사는 믿음은 물증 즉 보는 것으로 생긴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느니라”(요20:29)고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 김성로 목사가 가르치는 물증 즉 부활을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요한복음20:27에서 예수님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물증)를 만져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면서 요한복음20:29에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분명히 믿음은 물증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는 것이다. 김성로 목사가 믿음을 말할 때 부활이라는 물증을 통해야 된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필자가 이렇게 비판하는 것은 부활을 강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손상시키지 말고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이제 김성로 목사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요약만 하기로 하겠다.

(1) 부활이 십자가 보다 더 중요하다.
“부활이 처음으로 십자가 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십자가는 낮은 것이고 부활은 높은 것인가? 십자가와 부활은 등급이 있는가?

(2) 부활구원론
지상 십자가로 죄 사함이 완성되지 않았고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 단번에 영 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 죄를 완전히 사하셨다는 주장하였다. 과연 이것이 성경적인가?

(3) 십자가는 죽은 신앙, 십자가의 예수는 죽은 예수
과연 이것이 사실인가? 십자가를 강조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강조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강조하는 것이 곧 부활을 부 인하는 것인가? 십자가의 예수는 죽은 예수라는 표현은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

(4) 십자가 복음이 아닌 부활의 복음만을 강조한다.
십자가 복음은 실패인가?

(5)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한다.
한마음교회처럼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인가? 십자가 예수만 믿어서 그런가?

(6) 십자가 복음을 붙들었을 때는 실패했는데, 부활복음을 붙들었을 때 성공했다면 십자가 의 도(십자가의 복음)가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했는데 거짓말인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분명히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날 것인데 십자가는 실패인가?
 

3) 비판과 주의사항

필자는 평소 부활신학은 있는데 부활신앙의 삶이 없는 것을 개탄하는 사람이다.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 부활신앙에 대한 열정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바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활신앙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부활신앙(복음)이 십자가 복음, 십자가 신앙과 대치되거나 방해되고 충돌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손상시킨다면 이것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과 같은 비판과 주의 사항에 유의하기 바란다.

(1) 십자가와 부활은 두 가지가 다 똑같이 중요하다. 성도들 가운데 아직 십자가가 믿어지지 않는 사람도 있고, 십자가는 믿는데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와 부활을 동등하게 믿는 자이다. 십자가와 부활 가운데 덜 귀하고 더 귀한 것이 있겠는가?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는 땅과 꽃의 관계와 같다. 식물의 씨 와 꽃의 관계와 같다. 땅이 없으면 꽃을 피울 수 없고, 씨를 심지 않으면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십자가 죽음의 씨 뿌림이 없으면 부활의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없다

(2) 우리의 죄 사함은 십자가 보혈로 완성, 부활은 죄 사함과 구원의 인치심, 확증이다.

로마서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과 구원 얻는 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한다. 로마서4:25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라고 기록된 것은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이미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것을 확증(인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무시하고 부활교리로 죄 사함과 구원을 논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3) 십자가 보다 부활이 더 중요하고, 십자가만 붙들고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은 아주 잘 못된 것이다. 십자가가 아닌 부활을 자랑하고 강조해야한다면 성경에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라고 십자가를 강조하였는데, 김성로 목사의 말대로라면 사도 바울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십자가는 우리의 최고의 자랑이요 기독교의 핵심이요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 사함을 논할 때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활로 죄 사함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다(고전15:3-4). 십자가 없는 부활의 복음은 절뚝발이 복음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4) 부활의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영적 지도자 목사가 부활이라는 놀라운 신학을 이제야 발견했다면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을 안 믿고 죽은 예수를 믿는 자가 어디 있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불신자일 뿐이다.

우리는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믿는다. 천사들의 말처럼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 찾느냐고 책망한 것처럼 우리는 죽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김성로 목사는 마치 자기만 부활의 예수를 믿는 것처럼 부활만 강조하는 것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가령 혹자가 십자가를 강조하고 증거하고 자랑하고 십자가의 은혜만 말한다고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 십자가 신앙이 부활신앙을 무시하거나 차등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신앙은 곧 부활신앙과 동등하고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어떤 경우(가령 십자가를 아주 강하게 강조하는 경우)에도 부활을 제쳐 두고 십자가의 죽은 예수님만 믿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십자가를 강조하면 부활을 등한시할 수 있고, 부활을 너무 강조하면 십자가 신앙이 결여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는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을 동등하게 강조하고 동시적, 통합적으로 전하여야 한다.

(5) 부활이 십자가 보다 더 위에 있고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활과 십자가는 동일한 가치가 있고 동일한 위치에 있다.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시키는 것은 무서운 죄이다. 성경은 죽어야 산다고 말씀 한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가르친다(마16:25).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길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의 죽음을 본받아 우리도 죽도록 충성하자. 우리가 죽어야 산다.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살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인가? 부활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인가? 십자가는 죽음 희생 헌신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이다. 만약 십자가와 십자가의 희생적 헌신을 무시하고 부활만 강조한다면 누가 죽도록 충성하겠는가?

(6) 십자가를 무시하고 부활만 강조하는 교회는 이상한 교회이다. 십자가 보다 부활을 강조하고 부활을 더 믿는 신앙은 절뚝발이 신앙이다.

(7) 왜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은 강조하지 않는가? 우리에게 남은 소망은 다시 오실 주님이신데 말이다. 초대교회가 선포한 성경의 케르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탄생, 고난, 십자가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 만왕의왕, 만주의 주, 하나님나라 이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부활만 강조한다는 자체가 성경적이 아니고 건전한 신학이 아니다.

(8) 김성로 목사의 신학과 신앙이 문제가 있다고 사료된다.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신학을 더 깊이 연구했으면 좋겠다. 김명혁 목사는 그의 책 ‘십자가와 나’(3-4쪽)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고백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나는 지난 26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충분히 해서 이제는 더 이상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할 것이 없다고 어리석게 생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것이 마귀가 만들어 낸 생각일 것입니다. 나는 지금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에 대한 영광스러운 메시지에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는 언제나 이전에 아무도 보지 못했던 새롭고 참신하고 매력적이고 감동적이고 고양시키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9)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서 선택의 문제로 고민하거나 무엇이 더 귀한가 헷갈리는 자에게 다음 성경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겠다.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에서 아직도 머뭇거리는 사람들이여, 십자가와 부활이 얼마나 명쾌하고 분명하고 선명한가를 확증하기 바란다. 십자가와 부활은 멀리 그리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아멘

 

<제 안>

한 사람의 지도자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많은 수고가 따른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난도 따른다. 한 지도자가 나오기까지는 많은 대가가 지불된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지도자라도 함부로 정죄하거나 매장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큰 손실이 따른다. 할 수만 있으면 바른 길을 따라 사역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끼는 마음으로 제안을 하는 바이다.

최근에 언로에 보도된 김성로 목사의 글은 십자가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강조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사료된다. 그러나 한 지도자의 언사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김성로 목사는 자신의 잘못된 십자가 사상을 회개하고 공개사과하고 다시 십자가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동안 십자가 신앙의 잘 못된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영향을 받았고 그 일로 한국 교회 안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한 진정한 공개 사과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김성로 목사의 십자가 신학 사상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가령 ‘십자가만 붙들고 십자가만 믿고 십자가만 전했을 때는 모든 것이 실패였는데, 부활을 붙들고 부활을 외치고 부활을 강조했을 때 모든 것이 잘 되었다.’라든가, ‘15년 동안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했는데 십자가 중심이었을 때는 사람이 안 변하는 한계에 왔다. 그런데 부활을 증거 하니 사람들이 변하더라는 것이다.’ 라는 말을 다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다시 말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할 것이다.

바라기는 김성로 목사는 성경적 십자가 신학 사상이 정립되고 십자가와 부활을 조화와 균형이 확실한 메시지로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예레미아 5: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마태복음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인터넷 동영상 설교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권면

1)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 인터넷 설교를 뒤지는 소위 백화점 윈도우 쇼핑 크리스천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2) 몰래 혼자 듣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듣고 은혜 받은 말씀은 공동체 교우들과 공유를 하시고 영적 지도자들의 지도를 받으십시오. 혹시 인터넷 설교를 듣게 된다면 담임목사님과 면담과 자문을 구하십시오.

3) 교회중심, 소속 교회 강단 중심의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4) 자기 교회 목사 설교는 듣지 아니하고 방송설교만 듣는 사람은 극히 위험합니다. 언제나 소속된 교회의 강단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5) 한 가지 주제만을 듣지 말고 여러 가지 주제의 설교를 듣도록 해야 합니다. 편식은 건강을 해치듯이 편식 설교 듣기는 영적 건강을 해칩니다.

6) 인터넷 설교는 반드시 영적 지도자의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적인가? 신학적으로 문제는 없는가? 교회 중심적인가? 를 파악하여야 합니다.

7) 성경은 한 가지 주제이지만 그 주제를 우리에게 나타내는 데에는 다양한 말씀들을 사용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복음은 하나인데 사복음서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주 제는 하나님의 구원인데 66권의 방대한 성경책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지개가 일곱 색깔인 것처럼 말씀은 다양합니다. 한 가지 색으로 무지개를 말하면 잘못된 것입니 다. 성경의 말씀도 다양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언제나 한 가지만 강조하고 한 가지 를 가지고 전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기능이 예배, 성 경공부, 봉사, 전도, 선교, 구제 등과 같이 다양합니다. 조직신학은 하나이지만 신론, 인간 론, 기독론, 구원론(성령론), 교회론, 종말론 등 다양한 주제들이 하나로 묶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주제 하나만 강조하여 설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 다. 종합 영양제가 건강에 좋은 것처럼 우리의 영적 건강에는 성경 전체의 다양한 메시 지를 들어야 합니다. 성경의 다양성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한 가지만 강조하는 설교는 조심해야 합니다. 전도, 선교, 종말, 신유, 충성, 축복, 재림, 장자권, 십자가만, 부활만, 개인 체험, 신비적 체험, 찬양만, 성경공부만을 강조하는 설교 는 항상 위험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정의를 가진 인격체 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적, 감성적, 의지적 요소를 조화 있게 취하여야 합니다.

8) 조화 있는 말씀 먹기, 균형잡힌 신앙생활에 힘쓰십시오.

9) 극단적, 배타적, 부정적인 것은 삼가야 합니다.

10) 탈교회적인 내용도 위험합니다.

11) 왜곡, 편협, 외골수적인 것도 위험합니다.

12)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교회를 이탈한 사상은 경계해야 합니다.

13) 성령님의 사역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 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을 하십니다. 설교자가 말씀은 등한히 하고 자기 자랑, 사 람을 증거하고, 세상적인 일들을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설교입니다. 이런 것은 성령님 의 도우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만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설교를 듣도록 해야 합니다.

14) 항상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 교회 중심, 성경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15) 자기 교단과 교회만 자랑하고 자신의 성공적 업적을 치하하는 인본주의 교주 같은 인 상을 주는 설교자는 추방하여야 합니다.

16)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 세우고 새 신자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성경에 기초한, 신학적 검 증이 된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전 태 목사 / 예장 고신 이단대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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