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열며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듣는 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된, 그래서 영혼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거짓 복음임을 잘 모르고 있다. 이런 기막힌 현상은 정이철 목사에 대한 이재위 목사의 비판 글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아래는 이재위 목사가 정이철 목사를 비판한 글의 일부이다.

“목사님들은 설교를 하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그럴 땐 주위의 조언/지적을 받아 고치면 되듯이, 고치면 되는 사안이지, 이단으로 몰 만한 사안은 아닌 것입니다. 남침례는 모두 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김성로 목사는 그런 지적을 이미 받아들여 고쳤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참고: 6.30.2016& 7. 20.2016년 2번) 이 외에 다른 사역들은 모두 건강한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필자는 다섯(5)가지 반박문을 통해 자세히 정이철목사의 주장들이 편집 왜곡된 반 성경적인 주장인지에 대해 변증학적 관점, 개혁주의 성경해석에 입각해서 충실히 증명했습니다. 참고로 필자는 김성로목사의 10편의 부흥회 설교, 한마음책자들, 간증들을 최소 20번 이상을 정독하여 분석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김성로 목사의 설교를 단 몇 분만 들어보았어도 그것이 정상적인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 챌 수 있고, 또 ‘부활복음’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비판 글 한 편만 읽었어도 김성로 부활복음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 훈련을 한 이재위 목사는 김성로 목사의 여러 책들, 10편의 설교들, 20여 번의 간증들을 정독하고 분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이런 무지는 일부 신학교 교수들, 또 이단을 연구하며 명성을 쌓아온 이인규 씨나 기이협도 마찬가지이다.

왜 이들은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이 거짓된 다른 복음임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김성로 목사가 성경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의 거짓된 부활복음을 진리인양 교묘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곡된 성경으로 만들어진 부활복음은 거짓 복음이다.

모든 이단들이 그렇듯이 김성로 목사도 성경 말씀을 교묘히 왜곡하므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부활복음을 듣는 사람들 신학교 교수들을 물론이고, 이단 전문가, 일부 목사들까지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라고 여기고 열광하고 있다.

김성로 목사가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예는, 복음서들 후반부와 사도행전 초반부를 근거로 “베드로를 비롯한 주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에 변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의 추종자들(이재위, 지명근 목사 등)은 부활로 인한 변화의 대표적인 예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등을 내세운다.

이런 논리로 김성로 목사와 그의 무리들은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라고 외친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외치는 기성교회에서 사람들이 잘 변하지 않고,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부활을 붙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변화되었다고 하는 한마음 교회의 신자들의 간증을 내세워, 부활복음의 능력을 입증함으로써, 손쉽게 많은 사람들을 미혹의 부활복음 늪으로 빠뜨린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주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에 변했다”는 김성로 목사와 그의 추종자들의 주장은 성경을 교묘히 왜곡시킨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도망갔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십자가 이전의 세속적인 출세의 꿈을 여전히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변화된 것은, 자신들의 세속적인 야망이 예수의 죽으심으로 깨어져 좌절 속에 있다가, 다시 그 세속적인 야망이 되살아남으로 인해 기대와 흥분으로 바뀐 것뿐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 중에 어느 누구도 주께서 원하셨던 본질적인 변화는 없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 이전의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와 도마의 고백은 본질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6-8)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고,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고, 물 위로 걸으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이 그의 능력으로 정치적인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실 때, 출세할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에 의해 힘없이 십자가 처형으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제자들이 꾸었던 정치적인 나라에서의 출세하고 싶은 야망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함께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속적인 꿈을 접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이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예수님을 죽인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행1:6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십자가에서 접어버렸던 자신들의 세속적인 출세 야망을 다시 불태우며, 그렇게 질문했던 것이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보았어도 십자가 이전에 가졌던 정치적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기대하며, 출세의 야욕을 불태웠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의 한계이다. 죄인인 인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할지라도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지 않으면, 그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들에 야망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속적인 야망으로 전혀 변하지 않은 그들에게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 된 한계를 뛰어넘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이 죄인의 심중에 오셔야만, 죄인인 인간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믿어지며, 이때 비로소 죄인인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께서 먼저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변화된다.

김성로 목사가 내세우는 간증자들의 간증 내용을 보라! 마약 중독에서 벗어났다는 둥, 동성애에서 벗어났다는 둥 하면서 모두 세상적으로 신바람 나는 일들만 자랑한다. 거기에는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은 죄 용서의 기쁨이 없다. 그러므로 부활복음의 간증자들은 좁은 문, 좁은 길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악마처럼 살았던 노예상인 존 뉴톤을 변화시킨 십자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성로 목사의 간증자들은 꼭 기억하기 바란다.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으로 인해 동성애에서 벗어나고, 마약 중독에서 벗어난 것이 설령 사실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피를 붙들지 않은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또 김성로 목사는 사도행전(행1:22; 4:33; 행17:18 등)에서 사도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을 전했다고 주장하면서,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라고 강조하는 자신의 부활복음을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이것도 당시 사도행전의 특수한 삶의 정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부활복음을 위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을 왜곡시킨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이스라엘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몰랐던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는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은 사두개인을 제외하고는 부활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정작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구원자)가 나무에 매달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즉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가 나무에 매달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우리 대신 죄를 지시고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발생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부활했다’고 외쳤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부활을 외친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말하기 위해서였지 부활의 능력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다른 서신서들을 보라! 바울 서신, 베드로 서신, 요한 서신 또 부활로 변했다고 하는 야고보의 서 등, 어디에서 부활이 십자가보다 강조되고 있는가? 그러므로 부활이 강조되고 있다는 김성로 목사의 주장은 한 마디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고전15장은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7-19)

김성로 목사는 이 본문으로 ‘부활을 강조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이 없는 헛된 믿음’이라고 강변한다. 이런 그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하셨으면, 하늘에 올라가 하늘성소에서 완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의 부활을 믿지 않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고전 15장을 쓴 바울의 의도를 심각하게 왜곡한 거짓말이다. 바울이 고전 15장을 쓴 것은, 당시 헬라 사상에 물든 고린도교회가 성도들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헬라인들은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마지막 때에 죽은 자의 몸이 부활한다는 것은 오히려 몸서리치도록 끔찍한 것으로 여겼다. 이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자유로운 영혼이"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몸의 부활은 육체의 죽음으로 자유롭게 된 영혼이, 다시 육체의 감옥에 갇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성도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이들은 세례 때 성령에 의하여 영적으로 이미 부활을 체험했다고 믿으며, 헬라 사상과 맞지 않는 미래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이런 그들을 향해 바울이 냉소적으로 말한 것이 고전4:8(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이다.

바울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믿지 않는 심각한 것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들에게 고전 15장을 썼다. 특히 바울은 고전15:17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일이 없으면’이라는 말로, 궁극적으로 성도의 몸을 다시 살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웅변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다면, 우리가 구원의 능력으로 믿는 십자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 그리스도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죄 사함의 능력이 없는 십자가를 믿는 자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 십자가를 믿고 죽은 자들도 구원받지 못했으므로 망했을 것이다.

바울은 고전15:17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입증하는데 반해, 놀랍게도 김성로 목사는 “예수의 부활”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가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가 부활해야 하늘 성소에 올라가 완전한 제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말은 예수가 부활하기 이전의 십자가에서는 구원이 이루지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이런 관점으로 김성로 목사는, 말끝마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으면 큰일 났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너스레를 떨고 있다.
 

롬1:4과 롬4:25은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지원하는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개역한글/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김성로 목사의 ‘한마음 제자훈련 시리즈1’, p.13에서 인용한 롬1:4은 ‘개역한글’이다) 김성로 목사는 물론이고, 그의 호위 무사인 이재위 목사도 필자를 비판하는 글에서, 헬라어를 몇 개 들먹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김성로 목사가 말하는 부활의 능력을 강조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여기서 “인정되셨으니”란 뜻은,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부활 후에야 인간의 인식에 완전히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재위 목사의 이런 설명은, 그가 여러 헬라어를 들먹이고는 있지만, 헬라어에 무지한 자의 오역에 의존한 더 무지한 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롬1:4에서 “선포(인정)되셨으니”로 번역한 “호리스텐토스”(o`risqe,ntoj)는 신적수동태이다. 그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인정)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롬1:4을 보면, 하나님은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선포(인정)하신 시점이 예수의 부활 이후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 번역은 오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 이전에도 예수님이 물세례 받으실 때(마3:17), 변화산상에서(마17:5), 또 십자가 아래에서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막15:39)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여러 번 선포(인정)하셨기 때문이다(마3:17; 17:5; 막15:39).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호리조”를 “선포(인정)하다”로 해석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호리조)는 일관성 있게 “임명하다”, “정하다”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눅22:22; 행2:23; 10:42; 11:29; 17:26, 31; 히4:7 등을 찾아보라). 이렇게 헬라어 ‘호리조’는 적어도 성경 안에서는 ‘선포(인정)하다’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하물며 70인역에서도 ‘호리조’가 ‘선포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곳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롬1:4의 “호리스텐토스”는 예수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부활 때 ‘선포(인정)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셨다”는 것이 “호리스텐토스”의 요점이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셨을 때, 다윗의 씨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롬1:3).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의 권좌를 포기하고 인간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으셨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셔서 메시아적 왕의 보좌에 앉히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을 기점으로 다윗의 아들인 예수가 실제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만왕의 왕으로 임명되신 것이다. 또 다시 말하면 여기서 예수님의 위치가 성육신 때 포기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과 권위의 자리에서, 성육신 이전의 수준으로 높아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롬1:4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불완전한 구속을 완성시키는(이인규 씨와 김성로 목사의 표현을 빌리면 ‘부활은 구속의 완성’이다)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구속을, 죄인들에게 적용시켜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신자들의 몸의 부활)을 위한 또 하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롬4:25은 어떤가?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내줌으로 인간의 범죄가 해결되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그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줌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인간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는 무슨 의미인가?

“의롭다 하시기”의 헬라어 “디카이오신”(dikai,wsin)은 명사로서 ‘칭의’를 의미하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의롭게 됨’을 부활로 증명하시고, 부활로 증명된 ‘십자가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의롭다’고 법정적인 선언을 하신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이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이루어졌음을 선포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의 부활은 언제나 구원의 미래와 관련이 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위 본문들에서 십자가와 관련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과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은 과거 시상으로 이미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부활과 관련해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와 ‘연합한 자가 되리라’는 미래 시상으로, 종말에 몸의 부활로 구원이 완성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김성로 목사는, 롬1:4와 롬4:25 등으로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와 ‘부활이 구원의 완성이다’라는 거짓된 복음을 설명하는 데 쓰고 있다.

죽음 같은 산고 끝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3일 후에 아버지는 동사무소에 가서 그 아이의 출생신고를 함으로써 그 아이는 비로소 그 아버지의 법적인 자녀가 되었다. 위의 사실을 놓고 정이철 목사는 설령 출생신고가 없다할지라도 그 아이는 완전한 인간이며 그 아버지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김성로 목사는 만약 출생신고가 없었다면, 그 아이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며, 그 아버지의 자녀도 결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이철 목사의 긴급 기자회견에 대한 김성로 목사의 반론에서....

"본인은 ‘영원한 제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수정하였습니다. 본인의 저서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초판)” 187쪽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성막이 아닌 하늘나라 참 성막에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하셔야 하기 때문이다”는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개정 증보판(2016.09.10)에는 삭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참 성막에서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히 9:12)를 단번에 이루셨다”는 표현은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라고 수정하였습니다.----(중략)----공의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은 ‘십자가’이다. ‘대속제물의 피흘림을 통한 구원’은 하나님이 정하신 도(道)이다(고전 1:18).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의 죽음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중략)-----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적 사건입니다. 본인은 십자가뿐만 아니라 부활 또한 구속적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활은 구속의 완성이라고 믿습니다.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함께 구속의 완성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김성로 목사의 반론, 11.2일, 기독교 포털뉴스)

위 반론은 김성로 목사가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선 것이지, 결코 원래의 주장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에” 다른 표현을 썼다는 것은 자신의 부활복음에 대해 ‘오해를 일으킬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여전히 진리’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늘나라 참 성막에서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히 9:12)를 단번에 이루셨다”의 다른 표현이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또는 “십자가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라는 것이다.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만이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했지만, 바로 뒤에서 “부활은 구속의 완성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십자가에서 부활이 빠지면 구속의 완성이 아니다’라는 말인데, 이 진술은 “십자가만이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는 말과 모순이 된다. 따라서 김성로 목사에게 “십자가”는 사실상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다.

또 ‘부활은 구속적 사건’이라는 그의 진술은 맞지만, ‘십자가와 함께 구속의 완성’이라는 말도 교묘한 거짓말이다. 이 진술도 부활이 빠지면, 십자가만으로는 구속이 완성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김성로 목사의 부활에 대한 진술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구속의 완성’을 정면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축구경기에 승리(십자가)하고 축하 파티(부활)를 함에 있어서, 축하파티가 승리의 완성이라고 말하면서 축하파티가 없으면 축구경기를 이긴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김성로 목사의 잘못된 표현,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 등을 인정해 준다할지라도,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은 한마음 교회 사람들은 김 목사의 잘못된 표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을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모인 자들이다. 이것은 그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자명해 진다. 그들에게는 십자가 대신 온통 부활뿐이다. 그것도 예수가 부활해서 하늘에 올라가 하늘 성소에서 제사함으로써 구원을 완성했다는 거짓 복음에 열광하고 있다.

그러므로 김성로 목사는 자신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 잘못된 표현을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잘못된 표현을 듣고 모여든 현재의 한마음 교회를 해체한다면, ‘말의 실수’를 인정한 그의 말의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부활은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등장하며, 이방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모든 신화에서 신을 위해 하찮은 인간이 제물로 생명을 내어놓았다는 이야기는 흔하지만, 그러나 신이 하찮은 인간을 위해 대신 죽었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제외하고 어떤 경우에도 없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헬라인들도 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믿을 수 없어서, 그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운 것으로, 미련한 것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김성로 목사도 예수의 십자가를 부끄럽고 미련한 것으로 간주하고, 화려한 부활에 목을 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마치 죽음같이 힘들었던 경기에서 승리하고 난 뒤, 그 승리를 자축하는 파티를 보고 “파티가 승리의 완성이다. 파티가 없었으면 그 승리는 완전하지 못한 승리였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승리를 자축하는 파티는 참 기쁘고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티가 그 경기의 승리에 기여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예수 부활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다시 사신 것을 온 몸으로 믿으며 그것을 기뻐한다. 우리가 온 몸으로 부정하는 것은 구속의 완성인 십자가의 복음을 교묘하게 부인하는, 거짓 복음인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이다. 왜냐하면 부활을 아무리 믿는다고 외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기적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죽이시는 십자가 사건을 주도하셨다면, 그의 아들의 부활은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해 처참하게 죽으셨다는 것은 누구도 믿기 어려운, 즉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되는 기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이심으로 결코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그 구원의 일을 행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쳤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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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